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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빛낸 미중년들 본능 제어하는 원숙함…세월은 그들에게 좋은 일을 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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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고백하자면, 또래보다 꽤 연상인 남성에게 끌리는 편이다. 여중생 땐 교생 선생님, 대학 시절에는 졸업한 선배, 요즘 와선 멋지게 나이 먹어가는 이들에게 자꾸 눈이 간다. 그런 면에서 지난달 26일(현지시간) 미국 LA에서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은 딱 내 취향이었다. 그야말로 미중년(美中年)의 파노라마 아닌가.

 남우주연상 후보들만 해도 눈이 부셨다. 먼저 ‘팅거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게리 올드먼(55). 영화 속 그는 근육이 아닌 지성으로 승부하는 고참 스파이다. 낡았지만 격식 갖춘 슈트가 잘 어울린다. 기품과 절제, 상대의 내면을 꿰뚫는 묵직한 시선. 젊은 날 올드먼은 종종 예민하고 대담한 ‘육식남’을 연기했다. 이제 그는 “안경 닦는 동작 하나만으로 전율을 일으키는”(영화제작자 팀 베번) 배우가 됐다. 그런 존재감이라니, 여성으로선 저항하기 힘든 매력이다.

 ‘디센던트’의 조지 클루니(51). 그가 연기한 맷은 하와이의 성공한 변호사다. 일에 빠져 가족을 못 챙겼다. 아내가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자 두 딸과 함께 그녀의 정부(情夫)를 찾아 나선다. 클루니는 이 우유부단하고 실수투성이인 보통 남자를 기막히게 연기한다. 찌질하지만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진심으로 애쓰는 남자다. 그 귀여운 솔직함에 반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클루니는 할리우드에서 손꼽는 ‘개념배우’다. 아프리카 내전 종식을 위해 힘써왔다. 2006년엔 ‘굿 나잇 앤드 굿 럭’으로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까지 올랐다. 말장난이나 하는 바람둥이 이미지는 이제 옛 얘기다.

 다음은 ‘머니볼’의 브래드 피트(49)다.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남자’로 불리는 그는 실상 매서운 승부사다. 외모 대신 연기력으로 인정받고자 험한 길을 걸어왔다. 직접 영화사를 차려 ‘트로이’ ‘디파티드’ ‘트리 오브 라이프’ 같은 문제작을 내놓았다. ‘머니볼’의 피트는 더 이상 엉덩이로 승부하지 않는다. 옛 영광을 되뇌기보다 새 도전에 기꺼이 몸을 던지는 사람. 나이를 잊은 열정은 미중년의 기본이다.

 아쉽게도 이 셋은 모두 남우주연상 수상에 실패했다. 다행인 건 내가 열렬히 응원한 이가 남우조연상을 탄 거다. ‘비기너스’의 크리스토퍼 플러머(82)다. 어릴 적 그가 연기한 ‘사운드 오브 뮤직’의 트랩 대령을 보고 중년남성도 멋있을 수 있음을 처음 알았다. ‘비기너스’에서 그는 아내가 죽은 얼마 뒤 불현듯 커밍아웃한 노년의 게이다. 생경한 설정임에도 그의 연기는 더없이 우아하고 자연스럽다. 다른 파트너가 있는 연하남을 기꺼이 애인으로 맞고, 뒤늦게 얻은 게이 친구들과 힘 다해 교우한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행복에의 열망을 놓지 않는다. 뭣보다 인상적인 건 본능을 포기하지도, 거기 휩쓸리지도 않는 원숙함이었다. 이야말로 미중년 혹은 미노년의 진정한 마력 아니겠는가.

이나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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