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상자' 브라운관에서 쏟아지는 명강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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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다시 보자.'

오락상자 TV가 가을을 맞아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 한국사회의 문화행태를 짚어보는 대형 강연프로를 속속 신설하고 있다. 강연프로는 그동안 TV가 기피하는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

드라마.쇼 등에 비해 재미가 떨어지고, 마이크 앞에 선 연사를 빼곤 별다른 유인장치가 없어 대중을 사로잡기에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따지고 보면 엄연한 고정관념이다. 생동하는 사람만큼 재미있는 소재 또한 없기 때문. 무미건조하게 비칠 수 있는 강연프로도 기획력에 따라 얼마든지 흥미 만점의 시간으로 꾸밀 수 있는 것이다.

가을철 개편에 들어간 방송사들이 대규모 강연프로에 도전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대표적인 사례가 KBS1의〈도올의 논어이야기〉 (금요일 밤 10시), EBS의 〈기획시리즈〉 (월~목요일 밤 10시40분)와〈최완수의 우리 미술 바로보기〉(수요일 밤 9시20분) 등.

우선 방영시간대가 주목된다. 시청자가 몰리는 주요 시간대에 과감하게 편성했다. 게다가 단발성 프로가 아니라 6개월~1년 동안 계속하는 대형기획물이다.

자극성.선정성 프로에 익숙한 일반인들이 TV를 보는 눈높이를 크게 높여 줄 것으로 기대된다. 그만큼 우리 TV가 성숙했다는 증거로도 볼 수 있다.

이들 프로의 특징은 한국문화를 비판적으로 해부한다는 사실. 일례로 10일 시작하는〈도올의 논어이야기〉는 도덕 교과서로서의 '논어' 가 아닌 살아있는 인간들의 집합체로서의 '논어' 를 조명할 계획이다.

또 지난주 선보인 EBS〈기획시리즈〉 (첫편으로 '임동창이 말하는 우리 음악' 16부작 방영)와〈최완수의 우리미술 바로보기〉도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한국문화의 정체성을 모색하고 있다.

프로그램 구성도 기존의 강연프로와 크게 구분된다. 지식의 대중화란 차원에서 일반 오락프로의 형식도 과감하게 수용한다.

첫째, 무대 자체가 다양하다. 예컨대 국악과 양악을 섭렵한 피아니스트 임동창씨는 강연 도중 피아노를 자주 연주하며 현장성을 높인다. 관계된 무용가.연극인도 불러 즉흥연기도 보여준다. 철학자 김용옥씨도 세계적 석학은 물론 연예인도 초대해 일종의 토크쇼를 펼칠 예정이다.

둘째, 학제간 연구를 시도한다. 논어.공자를 얘기하되 철학.여성학.인류학 등 각종 학문의 최신 성과를 접목하고(김용옥), 한국미술을 강의하되 종교.역사.사상 등을 두루 조망한다(최완수 간송미술관 학예실장). 그만큼 시청자를 흡입하는 매력이 크다. 일반인들이 제도교육 틀안에서 제대로 맛보지 못했던 지식의 성찬이 차려진다.

세째, 미래를 지향한다. 전통을 얘기하되 과거를 복제하자고 말하지 않는다. 새 날을 열어갈 문화.사상적 이념을 집요하게 천착한다 뜻이다.

'우리 것이 아름답다' 는 복고적 태도가 아니라 '우리 것을 아름답게 만들자' 는 진취적 태도가 깔려있다.

각 강사들의 개성을 비교하는 것도 프로그램을 재미있게 감상하는 요령이다. 웬만한 코미디언 뺨치는 김용옥씨의 제스처, 흥이 나면 무대를 뒹구는 임동창씨의 퍼포먼스, 엄밀한 학문적 단련과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시청자를 압도하는 최완수씨의 독특한 카리스마 등.

특히 우리 사회의 쟁쟁한 전문가들이 바보상자로 낙인 찍힌 TV에 대거 출동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사실 많은 외국방송에선 일찍부터 석학들의 토론.강연 등이 인기있는 프로그램의 하나로 뿌리를 내린 상태. 늦게나마 한국에서도 고급 교양프로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과제도 많다. 평소 예술에 무심했던 대중을 끌어들이되, 그러나 영합하지 않는 접점을 찾는 지혜가 요구된다.

〈도올의 논어이야기〉를 기획한 KBS 박해선 CP는 "일개인에게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는 비판도 강했지만 방송의 대변신이란 차원에서 밀어붙였다" 고 말했다.

EBS 편성기획팀 류재호 PD도 "철학.역사 등 한국적 가치관을 탐구하는 대가를 다수 초청하되 흥미 본위의 말장난으로 끝나는 일은 절대 없을 것" 이라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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