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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 찾아 떠나는 '유목민' 지구촌 인구지형 바꾼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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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마테오 치콜로(28)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진 직후 조국 이탈리아를 떠나 브라질로 이민갔다. 이탈리아 북부 도시 토리노의 디자인 회사에서 일하던 치콜로는 금융위기로 다니던 직장의 형편이 어려워지자 미련없이 사표를 던졌다. 그가 브라질을 택한 것은 경기가 좋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부인 치아라(27)도 흔쾌히 남편의 결정에 동의해주었다. 부부는 현재 상파울루에서 산다. 치아라는 상파울루 주재 이탈리아 총영사관에서 일하고 있다.

치콜로는 중앙SUNDAY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현재 브라질에는 일자리가 많고 돈도 넘쳐 흐른다"면서 "사람들이 착해 적응하는데도 별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치콜로는 20대 초반에도 프랑스에서 일한 적이 있는 ‘구직 노마드(nomad·유목민)'다. KIA 자동차를 갖고 있다고 자랑한 치콜로는 "내 자녀들을 브라질에서 기르고 싶고 여기서 일할 수 있는 한 계속 머물고 싶다"고 말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하던 프랜신(28)은 최근 사업을 접고 중국 중부도시 시안(西安)에 정착했다. 시안이 중국 서부대개발 전초기지로 요즘 한참 잘 나가는 도시라는 소문을 듣고 남편과 함께 모든 것을 정리하고 태평양을 건넜다. 프랜신은 "미국 경제가 몇년 째 뒷걸음질만 치고 있는 상황에 이골이 났다"며 "다른 나라에 가면 사정이 좀 나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민왔다"고 말했다.

그녀는 중국에 와서 두가지 일을 하고 있다.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틈틈이 프리랜서 기고가로 잡지에 글도 쓴다. 무역업을 하는 남편과 맞벌이를 하는 덕분에 현재 자신의 생활수준이 네바다에서 살 때 보다 더 낫다고 미국의 케이블 뉴스채널 MSNBC와 인터뷰에서 말했다.

경제위기로 지구촌 노마드의 대이동이 시작됐다.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조국은 마음의 고향일 뿐이다. 일자리가 있는 곳이라면 지구 반대편도 마다하지 않는다. 남유럽발 재정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유럽에서는 특히 노마드의 엑소더스(exodus, 대탈출)가 심하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일자리를 찾아 태어난 대륙 유럽을 등지는 숙련 전문직 종사자들이 수만명에 달한다. 이들은 주로 2014년 월드컵과 2016년 여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돼 건설 특수를 누리고 있는 브라질로 향한다고 신문은 전했다. 과거 일자리를 얻기 위해 유럽으로 들어왔던 제 3세계 출신 근로자들도 수십만명이 고국으로 돌아가고 있다.

수백년 동안 이민자들이 모여 만든 나라 미국에서도 최근에는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있다. MSNBC는 "수년간 일자리를 중국이나 인도 등으로 수출해왔던 미국이 이제는 사람도 그러한 지역으로 수출하고 있다"며 미국인들의 '아메리카 엑소더스'를 보도했다.

해외에서 일하는 미국인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다. 2004년 미국 인구조사국(Census Bureau)은 공식 조사를 시도하다 중단했다. 하지만 당시 대략 400만명의 미국인이 외국에서 일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됐다. 2009년 미 국무부는 통계가 완벽하게 업데이트되지는 않았다는 전제 하에 530만명 가량 외국에서 살고 있다고 발표했다. 분명한 사실은 미국인이 계속 외국으로 떠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메리카 엑소더스'는 대략 400년 동안 계속돼 온 'go to America(渡美)' 트렌드를 거꾸로 돌려놓은 것이라고 MSNBC는 지적했다. 1620년 영국 뉴잉글랜드에서 최초의 청교도 이민자 102명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들어온 이후 3억1300만명까지 늘어난 인구 변화추이에 거대한 반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유럽연합(EU) 국가중 인구 유출이 심한 스페인은 지난해 1월부터 9월까지만 유출인구가 유입 인구보다 5만5626명이 더 많았다. 포르투갈은 2011년 한햇동안 인구 1100만명 중 최소한 10만 명이 외국으로 이민갔다.

이탈리아 ‘엑소더스 방지 세금우대’ 신설
글로벌 ‘구직 노마드’ 각국 영향과 대책

유럽에서 인력 유출이 가장 심각한 나라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다. 스페인에는 새 천년 직전부터 2008년까지 10년 동안 이민자가 쏟아져 들어왔다. 주로 건설 부문과 서비스업 종사자로 연평균 50만 명에 육박했다. 이들 덕분에 스페인은 유럽에서 근로자가 가장 많이 몰리는 나라로 꼽혔다. 하지만 2008년 부동산 붐이 사그라지면서 지난해 실업률이 20%까지 치솟았다. 실직자들은 대거 스페인을 빠져나갔다. 이로 인해 1990년 이후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인력 순유출 국가가 됐다. 10여 년간 지지부진한 성장으로 서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추락한 포르투갈에서도 국민들의 탈출 러시가 이어지고 있다.

이들이 주로 향하는 목적지는 유럽 외에 옛 식민지인 남미와 아프리카다. 과거 남미와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몰려들던 이주 형태와 정반대다. 스페인 국가통계국에 따르면, 2010년 스페인을 떠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나라 국민 3만7000명 중 남미로 간 사람이 30%를 넘어 다른 유럽지역(49.5%)에 이어 두 번째로 많았다. 아프리카로 간 사람도 4.8%나 됐다. 포르투갈 이민통계국에 따르면, 아프리카의 앙골라는 경제성장에 힘입어 2003년 이후 7만 명에 달하는 포르투갈 노동력을 흡수했다. 이들 지역 외에 아시아와 호주도 경기침체에 빠진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을 탈출하는 인력들을 흡수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뉴욕 월가의 많은 금융업 종사자들이 홍콩과 다른 아시아국가로 떠났다. 중국 경제성장 덕을 톡톡히 보던 호주로도 많은 미국인이 몰렸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호주 취업비자를 신청해 놓은 사람을 국적별로 분류하면 미국인이 영국·인도에 이어 세 번째로 많다. 특히 지난 5년간 신청자가 80% 늘었다.

지리적으로 미국 인접국인 캐나다에도 2008년에서 2010년 사이 미국인들의 단기 노동비자 신청 건수가 두 배로 늘었다. 이 기간 캐나다 실업률은 미국에 비해 2%포인트 정도 낮았다.

심각한 경기 악화가 이들 국가의 실업난을 가중시키는 한편, 기업이 반드시 필요로 하는 핵심 인재마저 떠나면서 향후 성장 전망까지 어둡게 만들고 있다. 그리스의 경우 지난해 12월 실업률이 19.2%로 유로존에서 스페인에 이어 두 번째로 높았고, 기업이 겪는 구인난 역시 유로존 국가 가운데 가장 높았다. 미국의 채용정보업체 맨파워그룹이 최근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그리스 기업인의 41%는 필요한 인재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답했다.

반면 남미의 브라질은 유럽의 쇠락으로 반사이익을 톡톡히 챙기고 있다. 지구촌 양대 스포츠 행사인 월드컵축구와 올림픽을 앞두고 건설경기가 큰 호황을 누리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유럽 내 건설 전문인력들이 브라질 입국 러시를 이루고 있다. 주로 10여 년간 건설 호황을 누려온 스페인에서 8000㎞나 떨어진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들고 있다. 브라질과 같은 언어를 쓰는 포르투갈 사람도 브라질행 러시에 동참하고 있다. 2010년 1월부터 2011년 6월까지 노동 관련 비자로 브라질에 정식 이민을 간 포르투갈 사람은 5만2000명에 달했다. 이민자 외에 단기 노동비자로 입국한 사람도 크게 늘고 있다. 브라질 법무부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 브라질에 단기 노동 관련 비자로 입국한 사람은 전년 동기 대비 50%가량 늘어 146만 명에 달했다. 이 중 33만 명은 포르투갈, 6만 명은 스페인 출신이었다.

과거 일자리를 찾아 브라질을 떠났던 이민자들도 경기가 좋아진 고국으로 돌아가고 있다. 브라질 정부에 따르면 지금까지 외국으로 이민 갔던 브라질인들의 절반 가까이가 귀국했다. 2007년에는 해외 거주 브라질인이 300만 명을 넘었지만 현재는 200만 명이 안 된다는 것이다.

유럽 안에서는 상대적으로 경제가 탄탄한 독일이 내수시장 활황에 힘입어 다른 유럽국가 노동력을 끌어들이고 있다. 이 때문에 재정위기를 겪는 그리스와 스페인 국민 사이에 독일어 배우기 ‘열풍’이 불고 있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최근 보도했다. FT에 따르면 독일 전역에 있는 괴테 인스티튜트(독일문화원)에선 그리스와 스페인 학생의 숫자가 크게 늘고 있다. 바르셀로나 등 외국 도시에서도 독일어 강좌를 듣는 인원이 급증했다.

외국으로 떠나는 탈출 행렬이 길어지면서, 인력 유출이 심각한 유럽 국가들은 과도한 이민을 막기 위해 고육지책을 동원하고 있다. 유럽 재정위기의 진앙지인 그리스에서는 에방겔로스 베니젤로스 재무장관이 지난해 12월 무분별한 이민을 자제할 것을 당부하는 캠페인을 제안했다. 2010년 11월 유럽연합(EU)과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은 아일랜드는 관광업종에 판매세를 없애는 처방을 내렸다. 관광산업 일자리를 늘려 서비스 인력이 조국을 등지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다. 이탈리아는 40세 이하 국민들에게 ‘엑소더스 방지 목적의 세금우대조치(tax break)’ 제도를 신설하기도 했다. 외국에서 2년 이상 일했거나 공부하다 돌아온 이탈리아인이 대상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러한 발버둥조차 어렵게 한다. 재정위기와 디폴트(채무 불이행) 위기에 처한 정부의 경우 세금을 올리고 예산을 삭감할 것을 요구받고 있기 때문이다.

조국을 떠난 이민자들도 경제 상황이 획기적으로 나아지지 않는 한 귀국 의사가 별로 없어 보인다. 스페인에서 브라질로 이민 온 팔렌시아는 WSJ와의 인터뷰에서 “스페인은 우리를 교육하려고 많은 돈을 들였지만 우리는 살 기회를 잡아야 한다. 우리 세대의 많은 사람들은 스페인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은 최근 해외 박사후 과정에 선발된 청년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자리에서 “여러분이 귀국할 무렵에는 조국에 더 많은 일자리가 생길 것이다. 우리 스페인은 여러분을 진정 원한다”고 당부했다.

글로벌 시대를 맞아 이민자들이 현지 문화에 적응하는 것도 전보다 용이해졌다. 전 세계가 인터넷으로 긴밀히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중국 시안으로 이민 온 프랜신은 “정보기술(IT)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발달한 덕분에 미국에 사는 친지와 온라인을 통해 자주 만난다”고 말했다. 프랜신은 또 걸어서 5분 거리에 월마트가 있고, 맥도널드와 켄터키프라이드치킨(KFC), 그리고 미국에서 보던 친숙한 음식점들이 곳곳에 있어 불편함이 없다”고 덧붙였다. 언어 소통 문제도 의외로 쉽게 해결했다. 그는 “한 번도 중국에 와본 적이 없고 중국말도 전혀 못하지만 중국에 와보니 영어가 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고 말했다. 프랜신은 “미국 부동산 시장이 붕괴한 뒤 구할 수 있는 직업은 임금이 낮은 임시직뿐이었다. 미국 경기가 살아나면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상파울루에 정착한 이탈리아인 치콜로는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한국 젊은이에게도 해외 도전을 권했다. 치콜로는 “세상은 가만히 앉아 있기에는 너무나 넓다. 한국인들도 다른 나라에서 적극적으로 일자리를 찾아볼 것을 권한다”고 말했다. 프랑스에서 상파울루로 건너와 2009년부터 한 다국적 기업에서 일하는 닐스 랭돔(30)도 “한국을 떠나기 전에 가고싶은 나라의 언어와 관습을 많이 공부하라”고 조언했다.

박경덕 기자 poleey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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