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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의 에디톨로지 창·조·는 편·집·이·다] 짝짝이 팔 성모 그림에 숨겨진 비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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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호 25면

원근법은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유리로 된 창문’의 발견과 그 기원이 같다. 환기 및 외부 빛을 내부로 끌어들이기 위한 창문과 밖을 내다보는 창문의 철학적 토대는 전혀 다르다.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창문은 창 밖의 3차원 세계를 유리벽이라는 2차원의 세계로 환원시킨다. 그러면서도 3차원적 경험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⑫객관과 주관의 변증법

‘객관적으로 본다’와 ‘창문으로 세상을 본다’의 문화적 기원이 같다는 이야기다. 특히 유리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이후의 창문의 기능은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라는 주체적 행위와 맞물려져 있다. 왕과 귀족, 그리고 중세교회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던 스테인드글라스로 만들어진 창문은 세상을 보는 기능과는 상관없었다. 외부의 빛을 이용해 창의 주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만 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외부를 내다볼 수 있는 창의 탄생은 인식의 주체와 객체를 명확히 가르는 문화적 혁명이었다. 그래서 르네상스 초기의 이탈리아 건축가 알베르티는 1435년 출판한 회화론에서 그림이란 ‘열린 창’과 같다는 이야기를 반복한다.

3차원의 세상을 2차원으로 재편집하는 회화 또한 동일한 기능을 한다. 2차원이지만 3차원의 입체적 느낌을 고스란히 전달해야 한다. 알베르티가 이야기하는 창문은 세상을 보는 눈과 사물을 잇는 가상의 여러 직선을 수직으로 자른다. 이 점들을 연결하면 우리가 창문으로 세상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 느낌의 입체적 회화를 그릴 수 있다는 거다. 알베르티의 창문과 더불어 동시대의 건축가 브루넬레스키의 소실점으로 수렴하는 선원근법의 발견은 르네상스 이후 서구 세계관의 핵심인 객관성 신화로 자리 잡는다.
이후 르네상스시대 화가들은 알베르티의 ‘회화론’과 브루넬레스키의 선원근법에 충실해 그림을 그린다. 누가 더 정확하게 3차원의 느낌이 나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가가 화가의 실력을 판단하는 기준이었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그림이 나타났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수태고지(受胎告知)’다. 나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일본에서 다빈치의 ‘수태고지’를 직접 볼 수 있었다.

다빈치 ‘수태고지’ 마리아는 가제트?
일본의 우에노 공원에 가면 국립서양미술관이 있다. 근대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했다고 한다. 단순하면서도 품위 있다. 정원에는 아주 폼 나는 로댕의 조각이 전시되어 있다. 그 유명한 ‘생각하는 사람’도 거기에 있다.(생각하는 사람의 자세를 흉내 내 본 적이 있는가? 불가능한 자세다.) 몇 년 전 도쿄를 방문했다가 그곳을 들렀더니, 때마침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수태고지’가 전시되고 있었다.(그림1: 수태고지)

‘수태고지’는 한자 뜻 그대로, 아기를 잉태할 것임을 알린다는 뜻이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예수를 잉태할 것임을 알리는 천사의 모습과 느닷없는 소식에 놀라는 마리아의 모습이 그려진 ‘수태고지’는 서양 회화사에서 아주 자주 다뤄지는 주제다. 그런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수태고지’에는 아주 이상한 점들이 있다. 이상하다기보다는 좀 말이 안 되는 설정들이 있다. 중요한 네 가지만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마리아 앞쪽의 식탁을 보자. 마리아의 오른손이 식탁에 닿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제대로 그림을 그렸다면 지금의 위치보다 훨씬 더 마리아의 몸 쪽에 식탁이 붙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두 번째 문제가 생긴다. 마리아의 손이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른손이 왼손보다 훨씬 더 길다. 이 그림을 3차원으로 변형시켜보면 <그림2>처럼 된다. 이쯤 되면 ‘가제트형사’지 ‘마리아’가 아니다.

세 번째는 문제가 더 심각하다. 마리아 뒤쪽의 벽돌의 각도다. 한번 잘 살펴보자. 마리아 뒤쪽에 그려진 벽돌들의 각도가 수렴되는 소실점의 위치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마리아 바로 뒤쪽 벽돌의 방향과 좀 떨어져 있는 바깥쪽의 벽돌 방향의 지향점이 서로 다르다는 이야기다. 벽돌 각각의 방향을 자로 대, 길게 늘어뜨리면 두 벽돌의 소실점이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천하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르네상스시대 당시의 가장 중요한 회화의 원리였던 선원근법을 어긴 것이다. 이건 아주 명백하고 심각한 오류다. 우리가 컴퓨터 프로그램을 켜거나 끌 때 느닷없이 나타나 가슴을 철렁하게 하는 ‘아주 심각한 오류’ 이상이다. 네 번째는 그림 왼쪽의 천사의 모습이다. 맥락상 천사라니까 천사라고 보는 거지, 뭔가 아주 어색하다. 너무 살찌고, 자세도 영 어색하다. 살찐 비둘기의 느낌에 가깝다.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은 이 그림이 잘못된 그림이라고 했다. 다빈치가 처음 그린 대작이었기에 원근법을 충분히 훈련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린 그림이라는 주장도 있고, 제자들과 함께 여럿이 그린 그림이라 이런 오류가 생겼다는 주장도 있다. 다빈치가 근시가 있어서 그랬다는 황당한 설명도 있다. 실제 그림이 전시된 우피치 미술관에서 그렇게 설명하는 것을 들었다는 친구도 있다. 아니었다. 이 그림의 ‘실수’는 다빈치가 아주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다빈치는 대작을 그리기 전 그의 노트에 여러 가지 스케치 연습을 했다. 그래서 그의 노트에 그려진 스케치를 잘 살펴보면 그곳에 반복적으로 연습된 장면이 이후 그려진 대작 속에 반드시 들어있다. 그런데 수태고지의 모티브들을 연습한 그의 노트를 보면 이상한 동그라미들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아주 특이하게 옆으로 길쭉한 타원형이다. <그림3> 도대체 무슨 의도였을까. 그 비밀은 동그라미를 보면서 노트를 넘겨보니 바로 해결되었다. 노트 끝을 들어 올릴수록 타원형의 동그라미가 점점 사람 얼굴에 가깝게 변하게 되는 것이었다. 노트가 거의 넘어갈 정도의 각도에서 사선으로 비껴서 동그라미를 보니, 그것은 아주 멀쩡한 아이의 얼굴이었다. <그림4>

바로 이것이었다. 수태고지에 숨겨진 비밀은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소실점이 변한다는 것이었다. 다빈치의 수태고지를 정면이 아니라 <그림5>처럼 오른쪽 끝에서, 마치 노트를 넘기면서 동그라미를 보듯 바라보면 그림의 소실점은 <그림6>처럼 하나로 일치한다. 마리아의 왼손과 오른손의 불균형도 사라지고, 식탁은 적당한 위치를 찾는다. 살찐 천사도 아주 날씬해진다. 실제 이 설명을 처음 들었을 때, 소름이 끼치는 느낌이었다.

도대체 다빈치는 왜 그림을 이렇게 그렸을까? 여러 가지 가설이 있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가설은 이 그림이 걸려 있던 위치 때문이라는 거다. 원래 이 그림은 큰 성당의 오른쪽, 앞쪽 벽에 높이 걸려 있었다는 거다. 아무도 그 그림을 정면에서 볼 수 없었다. 앞쪽에는 제단이 있어 접근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다들 오른쪽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을 밑에서 올려다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다빈치는 그림을 도대체 누가 어디서 보는가에 대해 생각한 것이다.

밑에서 오른쪽 벽 위를 올려다보는 위치에 그림을 걸도록 되어 있는데, 왜 그림은 항상 정면에서 보도록 소실점을 정해야 하느냐는 다빈치의 문제제기인 것이다. 이는 원근법의 근본적 전제에 대한 의문이다. 모든 사람의 시선을 소실점으로 수렴하도록 만든 원근법의 객관성이란 이 그림을 보는 주체를 반드시 전제한다는 인식론적 통찰이기도 하다. 20세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버금가는 혁명적 인식론이다. 객관성은 주관성을 전제로 한다는 변증법적 모순이 다빈치의 ‘수태고지’에는 숨겨져 있다는 이야기다.
그럼 이쯤에서 질문 한번 해보자. 사람들은 왜 그림을 항상 정면에서 봐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왜 모든 화가는 오늘날까지도 그림은 항상 정면에서 봐야 한다는 전제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림을 그리는 것일까? 해답은 아주 단순하다. 정면에서 그리기 때문이다. 그리는 사람이 정면에서 그리니까, 당연히 정면에서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역지사지’ 혹은 ‘남에 입장에서 세상을 보기’가 그리 쉬운 이야기가 아니란 이야기다. 오늘날 모든 기업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소비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봐야 한다’는 주장은 인간 인식에 관한 문명적 통찰이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객관적·합리적 사고의 시작을 알리는 원근법의 발견이 주체와 객체의 문제, 주체들 간의 소통의 문제로 그 논의의 범위가 확대되는 것처럼,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관계는 철학적 인식론의 문제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문학을 아주 치밀하게 공부해야 하는 거다.

객관적이며 동시에 주관적인 원근법
원근법의 발견은 ‘주체’의 발견이다. 사물을 인식하는 주체, 즉 주관성의 발견이라는 이야기다. 객관성·합리성으로 요약할 수 있는 원근법이 주체의 발견이라는 사실은 아주 흥미로운 일이다. 서로 모순관계인 객관성과 주관성이 동시에 성립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한 개의 축이 생기려면 반드시 다른 쪽의 축이 생겨야 한다. 서로 모순되는 양극단의 성립과정을 서양철학에서는 ‘변증법’으로 설명하고, 동양철학에서는 ‘음양의 원리’로 설명한다.

‘퍼스펙티브(perspective)’란 영어단어의 한자어 번역은 주관과 객관의 차이를 절묘하게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 객관적 시점을 이야기할 때는 ‘원근법(perspective)’으로 번역되고, 주관적 시점을 이야기할 때는 ‘관점(perspective)’으로 번역되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이 관점의 문제가 서양처럼 그리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양의 ‘싱글 퍼스텍티브(single perspective)’와 동양의 ‘멀티플 퍼스펙티브(multiple perspective)’ 사이에는 근본적인 세계관의 차이가 존재하는 까닭이다.(이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설명하겠다.)

르네상스시대 원근법의 발견으로 비롯된 주체와 객체의 인식론적 통찰이 의사소통의 문제로 그 논의의 범위를 확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객관성’이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객관적 관점’이란 각기 다른 인식의 주체들이 ‘같은 방식으로 보기’로 서로 약속하는 지점에 불과하다. ‘객관성’이란 상호 합의의 결과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오늘날 인문학에서는 ‘객관성’이란 단어를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으로 대치한다. 상호주관성의 시대에는 어느 때보다도 각 주체들 간의 소통이 중요하다. 그래야 서로 동의할 수 있는 ‘객관적’(본질은 ‘상호주관적’) 시점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퍼스펙티브’를 각 주체들 간의 상호합의의 결과가 아니라, ‘객관적’이라고 우길 경우가 아주 자주 있다. 이때는 반드시 권력이 개입되어 있다고 봐야 된다. 원근법 회화에서 ‘소실점’의 위치를 화가가 자기 마음대로 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관찰자들은 그 소실점으로 자신의 관점을 회귀시켜야 한다고 우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문제는 화가라는 ‘그림 생산자’의 초월적 지위를 이용해 소실점의 위치를 그곳이라고 우기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그림이 언제 어디서나 항상 똑같이 보인다고 믿는다는 사실이다.



김정운 문화심리학 박사.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와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노는 만큼 성공한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등의 저서와 방송 활동, 특강을 통해 재미와 창조의 철학을 펼치고 있다. cwkim@m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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