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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다시 묻는다] 4. 위기는 다시 오는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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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과 같은 외환위기는 아니라도 유사한 어려움이 올 가능성이 크다." (고려대 이만우 교수)

지난 18일 주가와 금리.환율이 크게 출렁인 '블랙 먼데이' 를 고비로 2차 경제 위기설이 고개를 들고 있다.

일반 국민이나 기업 등 경제 주체들은 위기의식에 가까운 불안 증상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11월 '경제위기 극복' 을 선언했던 김대중(金大中)대통령도 "경제가 어렵다" 고 인정
하는 상황이다.

제2 위기설의 진원은 어디일까. 시장 관계자들이나 기업인들은 단연 금융부문을 꼽는다.

"위기는 취약한 부분에서 온다. 환란 후 외환보유고를 넉넉히 쌓은 만큼 경제위기가 온다면 이번엔 외환보다는 금융쪽에서 올 것" (금융연구원 김상환 박사)이라고 본다.

문제는 금융기관과 시장 양쪽에서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은행.투신 등 금융기관들은 구조조정이 미흡해 제구실을 못하고 있고, 이에 따라 금융시장에서 돈이 제대로 돌지 않아 결국 경제 전체가 갈수록 혈액 공급을 못받는 환자처럼 시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6월 이후 금융시장은 돈을 필요한 곳에 공급하는 신용공급 기능을 거의 상실했다.

기업은 반도체 등 소수 호황업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돈가뭄을 겪고 있다. 주가 폭락으로 주식시장에서 돈을 마련하기도 어렵다. 회사채 시장은 사실상 거래가 끊긴 채 얼어붙었다.

돈이 없어 이런 일이 벌어진 게 아니다. 금융시장엔 지금 최소 1백조, 최대 2백조원의 단기 자금이 떠돌고 있다. 투신권엔 언제라도 돈을 찾을 수 있는 초단기수익증권(MMF)에만 돈이 몰리고, 은행권으로 들어오는 자금도 3개월 미만이 주를 이룬다. 불안심리가 돈의 흐름을 왜곡시킨 것이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멀쩡한 기업도 돈을 못 구해 흑자 도산할 수 있다.

그 피해는 금융기관의 부실로 이어져 기업 도산→금융 부실→공적자금 투입→기업부실의 악순환이 발생, 경제위기를 재촉하게 된다.

현재로서는 정부가 지난 2년반 동안 투입한 1백조원이 넘는 공적자금의 약효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구조조정은 내년 2월이라는 완료 시한만 제시됐을 뿐 지주회사 설립이나 은행 합병 등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다.

어떻게든 시장을 돌려보려다 보니 당국은 하이일드니 비과세펀드니 비슷한 금융상품을 포장만 바꿔 내놓는 미봉책에 의존하고 있는 형편이다.

2차 금융구조조정을 위해 다음달중 정부는 30조원 안팎의 공적자금을 더 조성할 계획이다.

이 경우 전체 공적자금 투입규모는 당초 정부가 충분하다고 장담했던 64조원의 두배를 넘어서게 된다. 그러나 이 돈으로도 시장을 완치시킨다는 보장이 없다.

전문가들은 위기의 싹을 잘라내려면 금융구조조정을 서둘러야 한다는 점에 입을 모은다.

"최근의 3대 악재 가운데 고(高)유가는 통제 밖의 일이고 대우차 매각은 상대방이 있는 문제다. 당장은 금융 구조조정을 신속히 추진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금융연구원 정한영 박사)

대신 지금처럼 금융기관에 공적자금만 넣고 마는 '부실 털어주기' 식 구조조정은 안된다는 지적이다.

금융기관이든 거래기업이든 가망이 없으면 잘라내고, 부실책임을 철저히 물어 방만한 경영을 막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금융.기업부실의 고리를 끊는 게 급하다. 부실 금융기관에 공적자금을 서둘러 집어넣되 한계기업은 즉각 퇴출시켜 한쪽의 부실이 다른 쪽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막아야 한다." (산업연구원 고동수 박사)

"공적 자금을 지원받은 은행들이 웬만하면 정부에 의존하려는 모럴해저드도 심각하다. 정부 지원은 부실을 털어주는 것보다 체질을 바꾸는 쪽으로 이뤄져야 한다." (KDI 고영선 박사)

정부 당국자들도 이런 전문가들의 진단과 처방을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막상 내놓는 대책은 시기를 놓치거나 엇나가기 일쑤다. 정치논리에 휘둘리거나 공직사회의 뿌리깊은 보신주의 탓이다.

게다가 여야의 끊임 없는 정쟁은 구조조정 관련 법안을 몇달째 국회에 묶어놓고 경제위기설을 확대하는데 한몫하고 있다.

김일섭 한국회계연구원장은 "정치적 배려 차원에서 공기업 사장인사가 결정되고 은행장 선임이 이뤄지는 현실에선 공기업.금융개혁 처방이 소용없다" 며 "정부가 소신있게 일할 수 있도록 비상경제대책위원회를 만드는 등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경제현안들을 시급히 챙겨야 한다" 고 말했다.

이정재.정경민.김원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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