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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 어떻게 잡느냐 따라 청년실업 40만 →120만 널뛰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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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만, 사기꾼은 숫자로 말한다’는 서양 속담이 있다. 숫자라면 맹신하는 갑남을녀의 순진함을 악용해 통계의 마술을 부리는 이들을 꼬집은 말이다. ‘거짓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거짓말과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영국 디즈레일리)라는 비아냥도 널리 회자된다. 20년 만에 양대 선거가 물린 올 한 해 통계의 권위를 앞세운 감언이설과 장밋빛 경제 전망, 선거 여론조사가 춤출 판이다. 통계(統計, statistics)는 인문학의 깊이에 자연과학의 엄밀성까지 보태준 인류 문명의 획기적인 도구다. 하지만 잘못 작성되거나 해석된 통계의 해악은 가늠하기 힘들 정도다. 통계의 진위와 품질을 가려낼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하다.

#1.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1973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홍역을 치르자 갤럽은 여론조사를 했는데 거의 같은 내용이지만 뉘앙스가 좀 다른 두 가지 질문이 들어갔다. ‘대통령 탄핵에 찬성하는가’와 ‘대통령은 상원조사위원회에 출두해야 하는가’다. 닉슨 대통령은 어느 질문에 대한 응답 여론에 더 큰 타격을 입었을까.

#2. 이동거리 100억㎞당 사고에 의한 사망자 수는 철도가 9명이고 여객기는 3명이다. 그렇다면 여객기가 더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첫째 사례에 대한 정답은 두 번째 질문이다. ‘그렇다’는 응답 비율이 첫 번째보다 두 번째의 질문에서 훨씬 높았다. 미 국민의 상당수가 ‘탄핵(Impeachment)’이란 말 뜻을 제대로 몰랐고, 질문이 너무 강해 선뜻 ‘그렇다’는 답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둘째 사례에 대한 답은 ‘아니다’다. 기준을 거리가 아닌 시간으로 바꾸면 정반대 결과가 나온다. 이동 1억 시간당 사고 사망자는 철도 7명이고, 비행기는 24명이었다.

통계 오류는 부주의·무지에서 오거나 아니면 자의적 잣대에서 나온다. 위의 두 사례가 주로 전자에 기인했다면 막대한 예산과 전문인력을 보유한 정부기관의 통계 부실이 도마 위에 오를 때는 흔히 후자의 의심을 받는다.

통계청이 지난 11일 발표한 취업·실업 통계를 보자. 지난해 취업자 증가가 목표치를 넘어 7년 만에 최대치를 기록했다는 내용이었다. 현 정부의 일자리 정책이 ‘합격점’이란 자화자찬도 나왔다. 하지만 길거리로 내몰린 청년실업자들이 아니라도 체감하기 힘든 수치라는 중론이었다. 취업·실업 통계가 현실과 따로 노는 이유는 체감 여부를 넘어 통계 수치 작성 과정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삼성경제연구소 손민중 수석연구원은 “정부의 취업 통계에서 베이비부머(1955~63년생)의 은퇴 후 서비스업 임시직 취업이 많이 반영됐는 데 비해 청년실업자 수는 과소평가돼 실업률이 현실과 동떨어져 보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청년세대의 경우 취업 준비생이나 구직 단념자 등 ‘사실상’ 실업자는 통계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정부는 청년실업자를 40여만 명으로, 현장에서는 120만 명으로 보는 까닭이다. 통계청 관계자는 “20~30대 취업자가 줄고 50대 취업자가 느는 추세는 맞다”며 “20~30대 연령대가 줄고 50대 연령대가 증가하는 인구구조 변화를 반영한 수치”라고 말했다.

국책 경제연구소 한국개발연구원(KDI)조차 실업률 통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보고서를 냈다. 이에 따르면 우리나라 실업률 통계는 표본 3만3000가구 상대의 설문조사를 기반으로 삼는다.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15세 이상 인구’를 정하고 실업자 중 최근 4주간 적극 구직활동을 한 적이 없으면 ‘실업자’가 아닌 ‘비경제활동인구’로 분류된다. 4주 이전까지 구직 노력 취업 준비자도 실업자에서 제외된다. 따라서 정부가 계산한 실업률과 체감실업률이 다를 수밖에 없다.

12일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에서도 이상한 통계 자료가 나왔다. 교육과학기술부가 지난해 전국 초·중등교 1만1000여 곳에서 1만 건 정도 폭력사건이 있었다고 보고했다. 학교당 한 건도 안 되는 셈이라 엉터리라는 지적을 받았다. ‘교육기관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로 학교알리미에 공시된 자료(2011년 3월 기준)에도 고등학생 100명당 학교폭력 발생 건수는 부산이 0.07건에 불과하고 가장 많은 강원도도 0.31건이었다. 왜 그럴까. 요즘 한창 사회문제가 되고 있듯이 폭력이 발생해도 피해 학생이 겁을 먹고 신고할 수 없는 현실, 학교 등 주변의 무마 시도 등은 감안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나라 인구 통계는 주민등록인구·인구센서스인구(센서스통계조사)·추계인구가 140만 명 가까이 차이가 날 정도로 ‘고무줄’이다. 2010년 우리나라 인구는 그해 통계청이 실시한 인구총조사에서 4858만 명으로 집계됐다. 하지만 인구추계 발표치는 4941만 명, 행정안전부의 주민등록인구는 4993만 명이었다. 통계청 인구총조사는 2005년에도 주민등록인구와 맞지 않아 논란이 있었다. 통계청은 영국·호주 등에서도 인구총조사와 주민등록인구 수치가 달리 나온다고 해명했다.

부실 통계는 국민을 오도할 뿐 아니라 경제적 피해로 이어진다. 지난해 11월 말 쌀값은 80㎏에 16만원대(생산지 기준)로 올랐다. 가을 수확 이후 11월엔 보통 쌀값이 떨어져야 한다. 하지만 1년 전인 2010년 11월 말(13만원대)보다 21%, 비싼 때인 9월보다 10%나 올랐다. 왜 그랬을까. 농민들이 쌀을 창고에 쌓아두고 팔지 않아서다. 2010년 농림수산식품부의 빗나간 쌀 통계로 손해를 봤기 때문이다. 대다수 농민은 정부의 쌀 풍년 수요 예측을 믿고 수확기 직후 13만원대에 쌀을 팔았다. 하지만 쌀 부족 현상으로 창고에 쌓아둔 일부 농민은 15만원대에 팔았다. 정부 통계의 불신은 ‘학습효과’로 이어져 농민들이 지난해 말 쌀 출하를 미루게 한 것이다.

수치를 멋대로 해석해 통계가 왜곡되기도 한다. 지난해 말 통계청은 ‘2011 녹색성장 지표’를 발표했다. 녹색성장 30개 지표 중 24개가 5년 전에 비해 개선됐다는 내용이다. 녹색성장에 올인했던 이명박 정부의 치적을 보여주려는 취지로 풀이됐다. 그런데 그 기준이 이상했다. 5년 기간에는 지난 노무현 정부도 들어가는데, 그 시절의 좋은 숫자가 슬쩍 녹아 들어 있었다. 데이터를 보면 노무현 정부에서 좋아졌던 녹색지표가 현 정부에서는 나빠지기도 했다. 국가경제 ‘녹색성(性)’을 따지는 대표 지표인 국내총생산(GDP) 1000원당 온실가스 배출량은 2005→2007년 0.659→0.616㎏으로 줄다가 2009년 0.619㎏으로 늘어난 것이다.

정부의 부동산 통계는 ‘제멋대로 해석’이 잦은 분야로 꼽힌다. 국토해양부는 지난해 9월 말 전국 주택건설 인허가 물량이 크게 늘어난 통계를 앞세워 ‘분양시장 회복의 신호탄’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9월에만 인허가 물량이 4만856가구로, 전년 동기의 1만4888가구보다 세 배 이상으로 늘었다. 하지만 부동산 시장은 수도권의 아파트 매매가가 10월 중순까지 다섯 달 연속 하락세를 이어갔다. 정부가 입맛에 맞는 부동산 공급지표인 주택건설 인허가 실적만 따졌다는 의심을 받았다. 허윤경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정부가 건설 인허가 실적과 실제 입주 가구 수의 괴리를 외면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분양은 안 하지만 매입한 토지에 자금 조달을 목적으로 인허가 절차를 밟는 건설사가 많았다는 것이다.

지난해 11월 말 통계청의 소비자물가지수 개편은 잣대가 느닷없이 바뀌어 ‘꼼수’ 논란에 휩싸인 사례다. 금반지를 제외하는 등 평가항목을 교체하고 가중치를 조정하면서 그 이전까지 치솟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정부의 목표치 4.0%에 공교롭게도 맞아떨어졌다. 정부가 물가상승률을 목표치 범위 내로 맞추려고 지수를 무리하게 바꿨다는 의심이 나오기에 족했다. 노택선(경제학)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금반지를 제외한 것이나 통상 12월인 개편 시기를 11월로 당긴 점 등은 오해를 살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경기지표 중에 ‘전년 동기 대비’의 함정도 잘 살펴봐야 한다. 통계 자료에는 비교 기간을 ‘전년’이나 ‘전기’ 중 입맛에 맞게 골라 쓴다. 특히 전년 동기 대비는 계절적 영향을 고려한 것처럼 보이지만 중간 과정의 추세를 보기 어렵다. 가령 지난해 11월 경상수지를 보면 수출(통관 기준)이 전년 동기 대비로는 두 자릿수 증가율을 보였지만 전달 대비로는 석 달 연속 마이너스(-)였다. 미국·독일·일본 등 선진국 경제통계의 경우 경제 추이를 금세 살필 수 있는 전기 대비 수치를 애용한다.

선거철에는 여론조사 권력이란 말이 심심찮게 쓰인다.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언론에 발표되는 지지율이나 인기도 수치가 실제 선거 판세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강성남(행정학) 방송통신대 교수는 “보수냐 진보냐에 따라 통계 작업이나 해석을 아전인수 격으로 하는 ‘이념 통계’가 횡행하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선거 여론조사는 더욱 세심한 주의가 요망된다. 지난해 10월 26일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여론조사 결과는 박원순 후보와 나경원 후보가 박빙이었다. 그런데 개표 결과 실제 표심은 7.2%포인트의 격차였다. 물론 조사시점의 지지도와 개표 결과가 같을수는 없지만 그 차이가 과도했다. 기존 집전화 조사에 주로 의존하고, 젊은 층이 많이 쓰는 휴대전화 조사를 소홀히 한 탓 아니냐는 지적을 받았다. 서울시민 중 집전화 없이 휴대전화만 쓰는 사람이 18%에 이른다. 휴대전화만 있는 유권자인 ‘숨은 표’를 배제하면 이제는 선거 판세를 읽을 수 없다.

이원호 기자 llhl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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