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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가 달라졌다] 上. 삶의 질이 우선

중앙일보

입력

소비자들이 달라졌다. 외환위기 이후 경기는 회복됐지만 소비자들의 씀씀이 행태는 완연히 바뀌었다.

무조건 비싸고 좋은 것만 찾던 버블 현상은 더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아낄 땐 아끼고 쓸 땐 쓰는 당당한 소비생활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단편적으론 고급 지향적인 모습도 있으나 꼭 필요한 것이라면 남이 쓰던 물건도 사서 쓴다는 게 요즘 소비자들이다.

삶의 질을 위해 부부가 함께 가계부를 꼼꼼히 챙기는가 하면 아이들을 중심으로 소비행태가 이뤄지기도 한다. 급변하는 소비자들의 의식과 생활상을 3회에 걸쳐 살펴본다.

일산신도시에 있는 할인점 '이마트' 에 추석장을 나온 서준화(41).권인숙(38)부부. 주부 권씨의 손에 든 메모장에는 구입할 물건과 다른 할인점의 가격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남편 서씨도 진열장에 적힌 물건값을 메모장과 비교하면서 쇼핑카에 담고 있다. 부부가 며칠 전 인근 백화점에서 3백80만원을 주고 남편 서씨의 골프채를 덥석 산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아낄 땐 아끼더라도 쓸 땐 팍팍 쓰자" "나만의 물건과 나만의 생활을 즐기자" 등의 신세대적 사고가 서민층에까지 깊숙이 자리잡으면서 소비생활에 일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덜 쓰고 악착같이 모아서 집부터 장만하려던 주부들의 모습은 과거속으로 사라지고, 전세 아파트에 살면서도 고급승용차에 골프까지 즐기는 가장들도 더 이상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서씨네도 현재 35평형 전세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예전 같으면 아내의 '내집 장만' 성화가 대단할 텐데 내집은 아랑곳없이 남편의 취미생활을 배려하는 아내의 모습이 의아하기만 하다.

"전세 아파트면 어떻습니까. 굳이 내집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집을 갖고 있다고 값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무데나 지출하진 않습니다. 한 두푼씩 모았다가 쓰고 싶은데 아낌없이 쓰지요. " 권씨의 말이다. 서씨 역시 아내의 생각에 전혀 이의가 없단다.

분당신도시에 사는 이은희(34)주부는 지난달 외식비로 23만7천원을 지출했다. 결혼 7년 만에 처음으로 외식비가 한달 식생활비의 절반이 넘어선 것이지만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하다.

이달 들어서도 수시로 아이들에게 피자.자장면 등을 시켜주고 토요일 저녁식사는 거의 남편과 더불어 외식으로 해결한다.

가끔은 남편과 정장을 하고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칼질' 을 할 정도로 먹는 일엔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이씨네 집에는 29인치 컬러TV.펜티엄 컴퓨터.5백ℓ짜리 냉장고.세탁기 등의 살림살이가 있다. 대부분 5년 이상된 제품이지만 이씨는 당분간 신제품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

"TV를 켜면 온갖 신제품이 유혹하지만 새로 사야 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획기적인 제품은 없어요. 대신 다음달께 김치냉장고나 장만하렵니다." 지금 쓰고 있는 살림살이에 크게 만족한다는 이씨의 말이다.

이처럼 현재 보유하고 있는 내구재에 대한 소비자들의 만족도가 커져 일부 상품은 소비가 정체.감소하는 현상도 일어나고 있다.

대표적인 품목이 컬러TV.냉장고.세탁기.휴대폰.컴퓨터 등. 컬러TV의 경우 연초 9만9천대에 달했던 삼성전자 제품의 판매량이 지난 6월 6만9천대로 떨어졌고, LG전자의 판매량도 20% 가량 뒷걸음질을 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00년 7월 산업활동 동향을 살펴보면 휴대폰은 정부의 보조금 폐지조치도 있었지만 1년 전보다 무려 50.9% 생산이 줄었다. 경승용차 역시 24.5%나 감소한 것으로 조사됐다.

그렇지만 문화.레저.취미생활 등 고급지향적 소비는 오히려 급격히 늘고 있다.

RV카.김치냉장고.에어컨 등은 없어서 못 팔 정도의 호황을 누리고 있고, 백화점 수입매장의 명품들은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실정이다.

카렌스.레조.산타페 등 RV카는 주문한지 한 달 이상 걸려야 차량을 받을 수 있을 만큼 폭발적이다.

올 상반기 롯데백화점에서는 수입명품만 지난해 같은 기간의 3배가 넘는 1백35억원어치를 팔았다.

7월 중 생산동향에서도 이를 뒷받침해 에어컨은 1백88%의 신장률을 기록했고, 정수기도 94.3%의 생산증가세를 나타냈다.

삼성경제연구소 경제동향실 최숙희 수석연구원은 "최근의 소비행태가 '과소비' '소비위축' 으로 비춰지는 부분은 있으나 우려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며 "이는 자신의 수입 범위안에서 삶의 질을 높이는 쪽에 지출의 우선순위를 두는 새로운 현상으로 봐야 할 것" 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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