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수길 칼럼

반노무현, 반이명박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김수길
주필

우리는 서로 철천지원수가 아니다. 정권은 교체 대상이지 타도 대상이 아니다.

 평화적 정권교체를 몇 번이고 경험한 나라에서, 왜 아직도 증오가 배어 있는 섬뜩한 말들이 나오는가.

 요즘은 온통 반(反)이명박이고, 그때는 죄다 반(反)노무현이었다.

 뭐든지 다 정부 탓을 하는 나라라서 그런지, 무엇이든 다 잘못되면 물러나는 대통령 탓이다. 자기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한명숙 대표와 문성근 최고위원이 약진한 민주통합당 전당대회 결과를 두고 한 언론은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한나라당이나 친여 언론은 민주통합당에 ‘친노 딱지 붙이기’나 ‘김대중-노무현 세력 이간’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

 다른 언론은 “깨끗이 갈아엎겠다…당한 만큼 되돌려 주겠다”는 제목을 뽑았다.

 민주통합당은 분명 친노무현 인사들에 의해 접수당했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 할 것이다. 한명숙·문성근 두 사람의 선전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후광이라고만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딱지를 붙이고 이간질을 하는 언론은 언론이 아닌 것처럼, 노무현의 노자도 한 자 넣지 않고 보도하는 언론도 본연의 자세에서 벗어나 있다.

 갈아엎고 되돌려 주겠다는 언어는 격앙된 감정이 절절히 배어나는 구호다.

 보도를 전제로 한 공개된 장소에서의 발언이라면 “온몸을 던져 이명박 정권이 박근혜 정권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겠다”고 한 한명숙 대표의 표현 정도면 충분하다.

 민주통합당이 정권교체에 성공하려면, 이제부터는 선명성 대신 안정감이 필요하다. 반노무현 정서가 이명박 정권을 탄생시켰듯, 반이명박 정서에 편승해 다시 다른 정권이 탄생한다면 나라가 불행하다. 우리의 공동체를 위해 바람직한 것은 안정감 있는 좌우가 시대 상황에 따라 집권하며 통합을 위해 미래를 설계해 나가는 것이지, 불안한 좌충우돌이 아니다.

 이제는 고인이 된 한 좌파 정치인의 말을 인용해 보자.

 “민주당이 반한나라당 전선에 자신을 위치 짓고, 현 정권을 심판하는 국민 정서에 안주해서 승리를 향유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정권을 잃은 원인에 대해) 극복할 대안은 무엇인지 나름대로 반성하고 고민을 많이 하는데 잘 안 되고 어렵다.”(김근태, 한림국제대학원 정치경영연구소 인터뷰, 2011년 7월 5일, 프레시안)

 인터뷰에서 “청년들이여 미안하다. 그러나 분노하라”고 한 고 김근태 상임고문이 평소 쓰던 가장 격한 표현은 “에이, 나쁜 사람이네”였다.

 복지부 장관으로서 폈던 주요 정책을 보면 굳이 좌우를 가릴 것 없다.

 노인 장기요양보험 도입. 건강보험 암환자 부담 경감. 국민연금 개혁 시동. 경제자유구역 영리병원에 내국인 진료 허용. 저출산 고령화 대책.

 그가 가는 길에 많은 시민들이 함께한 것을 김영환 의원은 ‘김근태의 부활’이라고 표현했다. 정치인으로서 김근태는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했지만 그 진정성이 사후에 평가받고 있다고. 요즘 같은 세태 속에서 무엇이 되느냐보다 어떻게 살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시민들이 알고 보여주는 것이라고.

 김근태 상임고문의 말에 민주통합당이 귀를 기울인다면, 좌파의 진정성과 함께 국정을 책임질 수 있는 안정감을 보여주어야 한다.

 반노무현에 한이 맺혔어도 반이명박만 외칠 것이 아니라, 이제 자신들이 그리는 국가의 미래는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해서 선택받아야 한다.

 당 대표도 뽑았으니 부족한 콘텐트도 채우고, 필요한 자금도 마련하고, 무엇보다 고민해야 한다.

 실상, 헌법을 수호하면서 나라를 갈아엎을 수는 없다. 증세도 감세도 한계가 있고, 나라를 닫아걸 수도 없으며, 사유재산권을 침해할 수도 없다. 대신 일자리를 만들고, 계급투쟁적 갈등을 완화시켜야 한다. 운신의 폭은 무한대가 아니지만, 방향을 잘못 잡으면 훗날 무한대에 가까운 역사적 책임을 져야 한다.

 좌든 우든 정권을 잡는 것은 대개 전 정권이 잘 못했기 때문이지 자신들이 잘해서가 아니며, 국민이 좌우를 선택하는 것은 좀 나아지자고 하는 것이지 한을 풀고 보복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결국엔 경제이고 통합이라는 것이 반노무현·반이명박의 교훈이다. 국제 정세 속에서의 현명한 처신은 한반도의 운명이다.

 몇 달 뒤 또는 몇 년 뒤, 당 이름만 바꿔서 똑같은 칼럼을 쓰는 일이 생긴다면 정권이 아니라 나라가 불쌍할 것이다.

김수길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