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춘원 이광수, 일제의 회유에 넘어가 독립운동 등지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53호 26면

프랑스 조계지가 있던 상해의 주택가 풍경. 영국은 일제의 독립운동가 체포를 방조한 반면 프랑스는 조계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에게 협조적이었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대한민국 임시정부 ⑤독립신문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1919년 12월 2일자 고경(高警:고등경찰) 제36044호 문건은 임정 기관지 독립신문에서 평안북도에 특파원 구인석(具仁錫)을 파견해 독립신문 후원금을 모금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후원금 모집 문건도 첨부해 보고했는데 “2000만 형제·자매가 각 1전씩만 베풀어도 합산하면 20만원의 거액이 된다”면서 후원금을 보내려면 국내의 조선은행에서 가명으로 ‘상해(上海) 중국우편국(中國郵便局) 신상(信箱) 백호내(百號內) 이영렬(李英烈)’에게 보내면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 후원금도 전달되고 비밀도 보장된다는 것이다.

이영렬은 독립신문 영업부장인데, 사장은 박은식(朴殷植), 총무는 옥관빈(玉觀彬), 편집부장은 이광수(李光洙)였다. 독립신문사는 상해 법조계(法租界:프랑스 조계) 패륵로(貝勒路) 동익리(同益里) 5호에 있었다. 상해에는 프랑스가 관리하는 법조계와 영국이 관리하는 공동조계(共同租界)가 있었다.

일제의 상해에 있어서의 독립운동(4월 29일 상해 발신)이란 문건은 “불령선인(不逞鮮人:독립운동가)들이 일본 영사로부터 프랑스 영사에게 어떤 교섭이 있으면 즉시 프랑스 관헌으로부터 내시(內示:안으로 알려줌)되므로 조금도 우려할 것이 없다… 요컨대 프랑스 조계는 안전지대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영·일동맹 관계인 영국은 공동조계 내에서 일제가 한국 독립운동가를 체포하는 것을 용인하는 반면 프랑스는 거부했기 때문에 법조계가 상해 한국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된 것이다.

1 독립신문 창간호. 조선총독부의 경성일보, 매일신보와 맞선 상해 임정의 기관지였다. 2 이광수. 독립신문 초대 사장· 주필로 활약하다 애인 허영숙과 함께 귀국했다.

1919년 8월 21일 창간된 독립신문은 창간사에서 5대 사명을 천명하고 있다. 그중 세 가지는 “①사상 고취와 민심 통일. ②우리의 사정과 사상을 우리의 입으로 말하는 것. ③여론을 환기해 정부를 독려하고 국민의 사상과 행동의 방향을 지도하는 것”이다. 넷째 사명이 ‘신사상 소개’이고, “국사(國史)와 국민성을 고취하고 겸해서 신사상을 섭취해 개조(改造) 혹은 부활한 민족으로써 부활한 신국민을 만들려고(造) 노력함”이 다섯째 사명이었다.

이는 초대 사장 겸 주필이었던 이광수가 쓴 것인데, 다섯째 사명에서 귀국 후 민족개량주의 이론으로 많은 비판을 받는 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의 맹아가 엿보이고 있다. 사장이 박은식으로 바뀐 후에도 이광수는 편집부장으로서 독립신문의 논조를 책임졌다. 이 시기가 몸은 고달팠을지 몰라도 이광수 인생의 절정기였다.

철기 이범석은 자서전 우둥불에서 “기미년(1919) 직후 상해의 우리나라 사람은 대놓고 말은 못했지만 독립이 다 된 것 같은 기대감 속에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런 기대감 속에서 독립신문이 탄생했지만 기대와 달리 독립은 실현되지 않았고, 자금 사정은 어려워졌다.

이 틈을 조선총독부가 파고들었다. 프랑스 조계만 벗어나면 곧바로 체포해 국내로 끌고 갔다. 밀정을 보내 회유하는 것도 주요한 방법이었다.
일제의 회유작전에 넘어간 대표적인 인물이 이광수였다. 1949년 혁신출판사에서 발간한 친일파 관련 문헌인 민족정기의 심판은 ‘이광수도 혁명대열에 참가하여 조국 광복을 위하여 눈부신 활약을 했지만 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丸山)의 밀정으로 상해에 온 허영숙(許英淑)에게 넘어갔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광수와 가까웠던 임정 내무총장 안창호는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출신의 여의사 허영숙에게 상해에서 개업할 것을 권유했지만 이광수와 허영숙은 끝내 귀국해 버렸다.

이광수가 자서전에서 “아니나 다를까 조선일보에서 내가 귀순하고 돌아왔다는 기사를 낸 것을 시초로 거의 모든 신문과 잡지에서 나를 독립운동을 배반한 자라고 공격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공연한 비난이 아니라 1921년 4월 귀국 도중 평안도 선천에서 검거됐으나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됐으니 당연히 받게 될 비난이었다.
이광수가 떠난 독립신문은 위기를 맞았다. 그렇지 않아도 구독료를 선불하지 않으면 신문 발송을 중지한다는 광고가 계속 실리는 형편이었다. 일본의 상해 총영사는 프랑스에 독립신문사 폐쇄를 거듭 요청했다.

독립신문이 창간 이래 최대의 위기에 처해 있던 1921년 3월 만주에서 상해에 도착한 인물이 김승학(金承學)이었다. 김승학은 자서전 망명객 행적록(亡命客行蹟錄)에서 “독립신문사 책임자 이광수는 그 애인 허영숙의 유인으로 상해 일조계(日租界:공동조계)에 은거하여 국내로 투항할 생각을 하고 있었고, 신문사 주간 이영렬은 이광수와 함께 투항할 생각을 가지고…”라고 쓰고 있다. 김승학은 남만주(서간도) 독립군 계열의 자금을 가지고 무기를 구입하러 상해에 왔다가 독립신문을 운영하게 된다.

“(이영렬은) ‘신문 발간할 지가(地價)가 부족하니 금(金) 500원만 대여하여 달라’고 한다. 나는 그 내막을 모르고 금 500원을 주었더니, 그 돈을 여비로 하고 국내로 투항하면서, 신문사 소재처와 삼일인쇄소 비밀처소까지 왜(倭) 영사에게 일러 주어서, 왜적(倭敵)은 프랑스 영사관에 교섭하여 독립신문사를 봉쇄하고 삼일인쇄소 기구는 프랑스 영사관에서 압수케 되었다.”(망명객 행적록)

한글 자모를 구할 수 없어 기자 조동호(趙東祜)가 성경책의 글자를 오려 한글 판형을 만들어 찍었던 독립신문은 일제의 방해 책동에 의한 경영난으로 수명을 다해가고 있었다. 이 무렵 김승학이 안창호의 권유로 독립신문을 인수했다. 프랑스 영사관은 안창호에게 독립신문사의 인쇄 기구가 한국인 소유가 아니라면 묵인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는데, 김승학은 32세 때인 1912년 만주 봉천성의 강무당(講武堂:사관학교)에 입학하면서 김탁(金鐸)이란 중국 이름으로 입적(入籍)한 터였다. 김승학은 프랑스 영사관에서 신문사와 인쇄소의 봉쇄를 해제하는 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내걸었다고 전하고 있다.

1. 인쇄소 기구는 중국인에게 교부하고 프랑스 조계 내에 두지 말 것.
2. 독립신문 발간소는 다른 지방으로 신문지상에 명기할 것.
3. 신문사를 혹 프랑스 조계지에 비밀리 설치할 경우에는 그 장소를 프랑스 공무국에 보고할 것.
4. 프랑스 공무국의 통지가 있을 때에는 24시간 내에 다른 지역으로 이전해 일본에 발견되지 않게 할 것.
5. 신문사나 인쇄소의 비밀한 장소는 다수의 한인이 알지 못하도록 할 것.

프랑스 조계지 안에 독립신문사를 두되 발간 장소는 다른 곳인 것처럼 위장해 달라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1921년 5월 31일자 109호를 끝으로 중단되었던 독립신문은 그해 8월 15일자로 속간되었다. 사장 김승학, 주필 박은식(朴殷植), 편집국장 차리석(車利錫), 기자 조동호·김문세·박영·이윤세, 인쇄소 책임자 고준택(高俊澤)이었다.

신문 좌측 상단에 발행지를 ‘중국 남경(Published in NanJing, China)’으로 표기했는데, 물론 프랑스 당국과의 합의 때문이었다. 복간호는 ‘사고(事故)로 인해 본보의 간행이 지연돼 묵은 기사가 많으니 애독자들은 량서(諒恕:너그럽게 용서)하심을 희망함’이라는 ‘사고(謝告)’도 냈다. 독립신문은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던 의열단원 최경학(崔敬鶴)의 사형 판결 기사를 실으면서 “경성 적(敵)고등법원”이라고 명기했다. 조선총독부는 적(敵)총독부, 일본 경찰은 적경(敵警)이었다.

독립신문이 다시 발간되자 당황한 일제는 다시 방해공작에 나섰지만 1922년 7월 중순에는 중국어판 ‘獨立新聞’까지 발행했다. 중국어판 ‘獨立新聞’ 창간호는 “우리의 광복전쟁의 진상을 우리의 친애하는 4억 동지에게 소개할 길이 열리며…”라며 중국과 항일 연대 수단으로 발행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1500~2000부 정도 찍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독립신문은 상해와 만주는 물론 미주와 국내로도 보내졌다.

일제의 한 공판기록은 “유갑순(柳甲順)이 1920년 5월 상해 임정의 서울 주재 교통국 주임 이원식(李元稙)으로부터 독립신문 20장을 받았다”고 명기하고 있다. 이처럼 국내에는 임시정부의 연통제와 교통국 산하 만주 이륭양행(怡隆洋行)과 부산 백산상회(白山商會) 등의 연락원들이 몸에 숨기고 반입했다.

그러나 복간한 독립신문도 곧 사정이 어려워져 1922년 6월 3일자에서는 “독립운동과 독립신문”이란 기사를 실어 ‘기자나 인쇄소 직원들이 월급 없이 일하고 있다’면서 재정적·인적 지원을 호소하고 있었다. 이런 형편에서도 독립신문은 빈집 한 곳을 확보하고 있다가 일제가 들이닥친다는 프랑스 영사관의 통보가 오면 즉각 이전해야 했다.

사장 김승학은 6년 동안 28차례를 이전했는데 그때마다 마차 2량과 인력거 20여 채가 동원되었으며, 당일 통고를 받고 한밤중에 이전한 일도 있다고 회고했다. 독립신문은 1주에 세 번씩 발행하다가 1924년부터는 사실상 월간지로 변했다가 1925년 9월 25일 일제의 탄압과 자금난으로 제189호를 끝으로 폐간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