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양선희의 시시각각

‘아이는 착하다’는 신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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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양선희
논설위원

“내가 선배인데 반말을 해서….” “나를 째려봐서….” 경찰서엔 이런 이유로 치고받아서 얼굴이 부어터진 사람들이 매일 한 무더기씩 들어온다. 경찰기자 시절, 가장 의아했던 일 중 하나가 어떻게 이런 똑같은 레퍼토리로 싸움박질하는 인구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렇게 많은가 하는 것이었다. 용기를 시험한다며 한겨울 강에서 헤엄치다 심장마비로 죽는 젊은이들도 있다. 한강을 낀 경찰서 출입 당시, 형사계에 일군의 젊은이들이 일렬로 벽을 보고 서 있는 걸 보면, “누가 또 강에 빠졌어요?” 하고 자동으로 물었을 정도로 이런 일은 뜸하지 않게 일어났다. 이렇게 미성숙한 청춘과 덜 성숙한 어른들은 오늘도 서열의식과 과시욕을 주체 못해 폭력을 휘두른다.

 문득 이 기억이 떠오른 건 최근의 ‘학교폭력’ 사태 때문이다. 지난해 말 대구 중학생 자살사건을 시작으로 봇물처럼 터져나오는 학교폭력 실상은 해가 바뀌면서 더욱 가혹한 사례들이 추가되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은폐될 뻔했던 ‘왕따’ 자살 사건이 속속 드러나고, 여학생을 남학생 십수 명이 떼로 성추행하는가 하면 일진들의 경악할 만한 폭력의 세계도 알려지고 있다. 이에 언론과 정책 당국은 불에 덴 듯 원인을 분석하고, 대책을 내놓느라 바쁘다.

 원인 분석은 크게 학교·가정·사회 책임론으로 요약된다. 무능한 학교와 교사들이 학교폭력을 방치해서 키웠고, 가정에서 자식들을 지나치게 과보호하며 교육을 제대로 못했다는 것이다. 또 폭력 및 음란물이 청소년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되는 사회분위기도 탓한다. 대책으로 관용주의에서 벗어나 가해학생을 강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고, 경찰은 스쿨 폴리스를 도입하고, 학교엔 전문 상담교사를 배치해 폭력을 근절하겠단다. 문자로 학교폭력을 알리는 운동이라든지, 동네 공동체가 안전지킴이에 나선다든지 하는 세부적이고 다양한 아이디어들도 나온다. ‘병은 하나여도 약은 만 가지’라고, 증상은 같아도 체질과 환경에 따라 다른 처방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어떤 대책이든 환영이다.

  그런데 이렇게 매일 쏟아지는 원인분석과 대책들은 뭔가 개운치 않고 미진하다. 교육현장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면서 교육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담론은 상대적으로 빈곤해서다. 교육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두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것 같다. 대증(對症) 치료에 급급할 뿐 근원에 접근하려는 노력이 부족해 보인다는 거다. 이럴 땐 가장 기초적인 교육 원론에서 출발해보는 것도 방법이다. 그래서 대학 시절 공부했던 교육학 책과 노트를 뒤졌다.

 원론서인 ‘교육원리’ 교과서에 따르면, 교육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작용’이다. 사람으로 태어난다고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다만 교육을 통해서 사람 노릇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미성숙한 사회구성원에게 사회의 가치와 문화를 전달하는 ‘사회화’ 과정이 교육이다. 다 아는 얘기를 왜 하느냐. 학교에서 교육하는 대상이 미성숙한 존재라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다. 학교만 다닌다고 모든 아이들이 성숙해지지는 않는다.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나이만 들어버린 미성숙한 인간은 어른이 돼서도 선배 대접 안 한다고 주먹질하고 얼굴엔 피 칠갑을 하고 경찰서에서 고함을 지른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 교육현장엔 미성숙에 대한 고민은 사라지고 ‘아이는 순수하고 착하다’는 신화만 남은 듯하다. 그래서 소위 의식 있다는 이들은 학교가 난투장이 된 이 판국에 ‘학생 인권 보호와 권리 신장’이 교육현장의 가장 시급한 문제라며 침을 튀긴다. ‘인권’이란 말만 나오면 오그라드는 사회분위기상 제대로 반박도 못한다. 한데 그렇게 믿고 싶겠지만 실제로 아이들은 거칠고 이기적이고 원시적이다. 미성숙한 존재는 다 그렇다. 동물적 본능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건전한 사회인으로 만들려면 ‘오냐오냐’해선 안 되고, 일기장 검사라도 해서 잘못된 생각이 있으면 바로잡아줘야 한다던 옛 교사들의 말은 헛말이 아니다. 미성숙을 단호하게 다스려 동물적 본능을 누르고 성숙의 세계로 끌어내는 일, 그게 교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