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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이 걸어 간다

중앙일보

입력

비가 내린다. 파리, 아마도 이폴리트맹드롱 가의 한적한 거리에 비가 내린다. 비는 허공을 적시고 지상으로 하강했다. 비는 자신의 질량을 벗어던지기 위해 지면으로 추락한다. 무게로부터 자유로울 때 비는 비로소 자신을 완성한다. 자진한 목숨들이 도로를 흥건하게 적신다. 비는 수직선(線)의 형상을 벗어 던지고 지면에서 비로서 면(面)이 된다. 포도는 비를 반사하여 빛나는 목숨을 찬양한다.

피처럼 산화하는 비. 비는 순교자 같다. 하늘은 비의 장엄한 순교를 위해 수직 상승으로 높이를 구축한다. 비는 세상 속에 던져진 주체로서의 자신의 삶을 이렇게 마감한다. 세상에 부치는 황홀한 죽음. 그래서일까 빗줄기가 세차게 허공을 질주할수록, 죽음과 입맞추며 삶의 의미를 통찰하는 철학적 모험을 엿보는 것 같다.

자유로운 삶을 지향하는 존재의 한 방식은 목숨을 내건 도전인 만큼 아름답다. 수직으로서의 빗줄기는 세계 속에 던져진 세계 내 존재를 연상시킨다. 그렇다면 비는 실존의 감각적 형상이다. 이제 수직은 수평적 공간을 획득하여 영역을 확대한다. 확대된 영역 속에 사물이 위치한다.

알베르토 자코메티, 빗줄기가 잠깐 소강상태에 처한 순간을 틈타 이폴리트맹드롱에 있는 자신의 비좁은 작업실에서 잠깐 거리로 나섰다. 비가 그를 세계의 중심으로 초청한 것이다. 오랜만에 청량감을 맛본다. 건널목을 건너는 자코메티를 앙리 까르띠에-브레송은 신속하게 포착했다.

찰나적 순간을 잡아내는데 탁월한 능력을 갖춘 귀재. 그래서일까 렌즈에 포박당한 사진 속 자코메티는 '어어'하며 이곳을 그저 응시할 뿐이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서 있다. 두 발은 대지와 밀착되어 있다. 노출을 꺼리며 외투에 몸을 숨긴 은둔자는 이렇게 세계의 중심에 섰다.

"이 세상에 결정적 순간을 갖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카르디날 드 레츠)는 말은 브레송의 예술세계를 이렇게 입증한다. '결정적 순간'을 탐욕적으로 포착하는 브레송의 촉수는 이처럼 날렵하다.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유폐시켜 작업실에서 38년을 은둔한 자코메티. 작업은 그가 세계와 관계하고 있음을 확인시키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오랜 고독과 침묵 속에서 오로지 작업에만 몰두한 그도 브레송의 더듬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의 부친이 후기 인상파 화가로서 유명세를 떨친 조반니 자코메티이고 보면 자코메티의 장래는 출생 전부터 이미 예견된 듯 하다. 유년기부터 조각에 남다른 재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21년 부친과 동행한 로마행은 이채로 다가왔다. 그는 르네상스는 물론 이집트 조각에 황홀하게 매료된다. 잠자던 그의 예술혼이 긴잠에서 부시시 깨어났다. 이후 1922년 예술의 도시 파리에 입성하며 질풍노도의 시적 영감으로 범상을 초월한 실험적 작업에 매진한다. 이때의 예술사는 그를 초현실주의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초현실주의의 충격적인 기법, 우발적 효과가 창출하는 경이로움은 끝내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는 현실에서 일탈한 이외성이나 기괴함, 그리고 대상을 새롭게 인식하는 창의적 기법보다는 실존적 불안에 지펴있었다. 유년기 시절, 사물과 사물이 공간의 심연에 의해 격리되고 그것들이 서로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 아닌가 하는 막연한 공포와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자아와 세계, 사물과 사물과의 단절과 연계에서 미묘한 존재론적 위기를 직감했던 것이다.

이후 그는 인간이면 필연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삶의 불안과 두려움에 초점을 맞춘다. 죽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오히려 인간은 역설적으로 죽음의 공포를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매 순간 자신에게 의미있는 삶의 방식을 선택한다.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는 것은 주어진 순간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판단하며 삶의 의미를 찾는 주체로서의 인간을 말하는 것 아닌가.

가늘고 긴 형상, 질량은 배제되어 정신만이 남아 있는 일련의 인간 시리즈는 이렇게 태어났다. 그는 물리적이고 구체적인 형상을 배제함으로써 극한적인 한계상황에 처한 인간의 존재론적 고독을 가늘고 긴 뼈대의 입상들로 치열하게 그려냈다. 그에겐 연장을 갖는 신체보다 사유하는 영혼이 중요했으리라. 입상들은 세계 속에 홀로 던져진 인간의 불안을 극대화한다. 그는 거추장스러운 육신, 물질적인 질감을 완벽하게 제거하여 철저한 고독자로서의 인간의 속성을 처절하게 재현했다.

물질이 배제된 수직 형상의 인간의 입상은 마치 세상 속으로 기투하는 빗줄기를 연상시킨다. 자코메티 역시 추락하는 빗줄기의 수직 형상에서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을 발견하고 작업실을 나선 것은 아닐까. 존재하는 모든 것은 수직이다. 자신의 극한적인 한계상황과 대면한 인간의 고독한 실존, 서로 닿을 수 없는 인간 사이의 거리감을 시각화하기 위해서 사물은 수직의 형상을 취할 수밖에 없다. 브레송이 사진의 전면에 시야를 가리며 수직상승하는 나무를 배치한 것은 이 때문이다. 전면의 나무, 자코메티, 그리고 뒤에 우뚝한 나무는 공간의 심연에 의해 서로 격리되었으면서도 서로의 존재를 확인시키는 긴장이다.

존재론적 고독에 거주하면서 서로를 주체로서 인식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운명이다. 단절과 연대. 그래서 인간은 '人間'이다. '사람 사이'가 바로 인간이다. 정현종은 이를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섬])고 표현하지 않았던가. 화면 왼쪽 도로 표지판에 새겨진 어른과 유아의 관계 같은 것. 브레송은, 나무와 빗줄기와 자코메티의 수직적 형상이 빚어내는 팽팽한 거리감으로 인간과 사물, 세계와 주체에서 발생하는 단절과 연계를 상징적으로 포착했다. 그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인간의 존재론적 불안을 이렇게 하나의 순간적 동시성으로 재현한 것이다.

조용훈 (yhcho@sugok.chongju-e.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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