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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종의 미술 투자] 언제까지 베낄건가 … 작가여, 앞선 감각을 보여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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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1914~15년)

2005년부터 한국 미술계에는 흥미로운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바로 영향력 있는 세계 미술계 인사들의 방문이 상당히 잦아졌다는 점이다. 방문의 형태가 사적이고 언론에 노출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뉴욕의 현대미술관, 구겐하임 미술관, LA 현대미술관 등 세계적인 미술관 관계자, 크리스티·소더비 등 세계적인 경매회사 관계자, 가고시안 갤러리, 화이트 큐브, 에마뉘엘 페로탕 갤러리, 페이스 갤러리 등 세계적인 화랑 관계자 등이 수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의미 있는 잠행이었다. 한국 작가와 한국 미술시장에 대한 관심이 그들을 불러들인 것이다. 모마 미술관은 이미 민병헌·세오·서도호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여러 점 소장하고 있다. 이들이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들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보증수표’격 증거다. 올해에는 사진작가 이명호의 작품이 폴 게티 미술관에서 전시됐고, 이 미술관의 소장품 목록에 이명호의 작품 다섯 점이 이름을 올렸다. 이렇게 한국 미술이 세계 미술계에 편입되는 ‘세계화’ 현상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한 해를 마무리하며 최근 10여 년간의 한국 미술계를 뒤돌아 보면 안타까운 사안이 여럿이다. 작가·큐레이터·비평가 등 외국 유학파들이 1990년대 이후 미술계에 대량 유입되면서 서구 형식이 무비판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개성을 잃은 서양의 짝퉁 같은 작품들이 범람하고 있는 것이 가슴아픈 현실이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려는 노력이 막연한 유행 좇기와 개성의 상실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 더군다나 창조성을 근간으로 하는 미술 분야에서는 더욱더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고구려 벽화를 창조한 유구하고 훌륭한 예술적 DNA를 갖고 있는 민족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2000년대 초반 지금의 우리처럼 많은 세계 미술 관계자가 중국을 방문해 중국의 작가들을 만났다. 그리고 소위 ‘사대천왕’으로 꼽히는 웨민쥔, 장샤오강, 왕광이, 팡리쥔과 쉬빙, 아이 웨이웨이, 장 후안 등이 세계적인 작가들의 반열에 올랐다. 이들은 모두 가장 중국적인 특징의 작품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획득한 작가들이다. 멀지 않은 장래에 한국에서 세계적인 작가가 나오게 된다면 어떠한 자세로 작품에 임하는 작가가 그 반열에 오를 것인가는 자명한 일이다.

 과일 그림이 유행하면 모두 과일을 그리고, 꽃 그림이 유행하면 모두 꽃 그림을 그려서 화랑이 꽃가게인지 과일가게인지 모를 지경이 되기도 한다. 유행을 좇는 작품들의 유통기한은 아주 짧다. 10년을 못 간다. 오래도록 가치를 유지할 수 없다. 2008년 미술시장 호황기에 시장에서 우세종을 이루던 작품들이 채 3년이 못 된 지금 숨을 죽이고 있다. 이런 사태와 관련해 나는 우리 모두의 반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우선 작가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이 진정 창조적인 능력을 타고나 창의적인 행위로 존경받고 있는 천재인지, 또는 헤겔의 말대로 천재적인 원숭이일 뿐인지, 잘못된 확신을 갖고 우리들 범인(凡人)과 마찬가지로 맹신 속에서 작업하고 있지는 않은지, 앞선 감각으로 어제의 확신들을 오늘 새롭게 해석하는 자만이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말레비치의 이야기를 가슴 구석에 한번은 담아보았는지, 그래서 우리를 혼란과 공포와 스트레스의 오늘에서 위안을 주는 앞선 감각의 능력을 보여주었는지 돌아볼 일이다.

 또 화랑에도 묻는다. 혹시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좋은 작가를 발굴하기보다 눈앞에 보이는 당장의 이익을 좇아 나쁜 작품의 전시와 유통을 은연중에 조장하지는 않았는지. 그 책임이 크다.

 이 모든 상황의 경제적인 동력이 되었던 컬렉터들에게도 묻고 싶다. 개성 있는 안목을 갖추고 좋은 작가의 작품을 구입해 좋은 작가의 작품 생산을 독려했었는지, 아니면 남이 산 작품을 그저 따라 산 것은 아닌지, 더 나쁘게는 나쁜 작품을 구입함으로써 나쁜 작품이 양산되는 것을 조장하지는 않았는지…. 반성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서연종 하나은행 삼성역 지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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