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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가 인정 못 받아 자살했다고? 천만의 말씀

중앙선데이

입력

오베르의 노트르담 성당?, 캔버스에 유채, 94*74㎝ 사진 지식의 숲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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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에 등장하는 유명 작가를 추려 ‘나는 화가다’라는 프로그램을 만든다면, 대중 평가단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1위를 차지할 사람은 단연 빈센트 반 고흐다. 어렵지 않은 내용에 강렬한 감동 코드를 담았기 때문이다. 구두·해바라기·의자·자기가 살던 마을 풍경·우체부·화방 주인·카페 여주인 등 반 고흐는 거창한 것이 아닌 자기가 사랑하는 것들을 진정성을 담아 그려냈다. 여기에 예술가적 광기와 고독, 충격적인 연애사건과 비극적인 자살까지 그의 일대기는 ‘불우한 천재 예술가’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킨다. 오죽하면 “나보다 더 고독하게 살다 간 고흐라는 사내도 있는데…”라는 유행가가 다 나왔을까.

1934년 처음 발간된 어빙 스톤의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청미래, 2007년, 1만5000원)는 반 고흐의 신화를 완성하고 대중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성공한 전기작가인 스톤은 미술작품에 대한 이해가 높았고 글 재주 역시 탁월해 ‘불우한 천재 예술가’에게 ‘미치광이’라는 수식어를 하나 더 붙이는 데 성공한다. 그럴 만한 근거가 반 고흐의 삶에 충분히 있다.

반 고흐의 아버지는 개척교회 목사였으며, 그 형제들은 모두 사업적으로 성공해 부를 쌓았다. 후에 다른 사람에게 지분을 팔았지만, 삼촌 중 한 사람은 유럽에 몇 개의 지점을 가진 구필 화랑을 운영하는 막강한 미술가문이었다.

반 고흐는 화랑 판매사원, 전도사 등 진로를 여러 번 바꾸다 스물일곱의 늦은 나이에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가족들은 더 이상 그를 믿지 않았다. 추문에 가까운 몇 번의 연애사건까지 일으킨 골칫거리였다. 오로지 동생 테오만이 그를 이해했으며, 죽는 그날까지 10여 년간 헌신적으로 돌봐준다. 테오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빈센트 반 고흐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감정 조절에 미숙하고, 당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을 그렸으며, 간질 질환으로 의심되는 발작을 여러 차례 일으켰다. 여러모로 상식 밖의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반면에 1890년 7월 29일 사망하는 날까지 파리 북부 오베르에서 보낸 마지막 70일의 행적을 꼼꼼히 살펴본 『반 고흐, 마지막 70일』(지식의 숲, 2011년, 2만2000원)의 저자 바우터르 반 데르 베인·페터르 크나프는 이렇게 만들어진 이미지에 반기를 든다. “가난과 인정받지 못해 자살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심할 정도로 순진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테오는 재료 값을 제외한 생활비로 매달 200프랑씩 보냈다. 당시 반 고흐가 초상화를 그렸던 우체부 룰랭의 월급이 135프랑이었다고 하니, 적지 않은 후원을 받은 셈이다. 다만 그 돈을 육체적 웰빙을 위해 쓰지 않은 것이 문제다. 그는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고 뜨거운 태양 아래 ‘그림 그리는 기관차’처럼 앞으로 내달리기만 했다. 반 고흐는 860여 점의 유화를 남겼다. 대부분 죽기 직전 4년간 그린 것들이다. 남들은 한평생 그릴 분량이다. 정신적·육체적으로 너무 많은 에너지를 짧은 시간에 소진해 버린 것이다.

이미 유명한 화상이었던 테오는 통찰력 있는 투자가였다. 그는 인상주의 화가 피사로의 후원자였고, 고갱·세잔 등 파리의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거래했다. 형의 그림이 유명해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생활비와 작업비를 대는 대신 그림을 가져갔으므로 “생전 단 한 점의 그림밖에 팔지 못했다”라는 말도 그다지 옳은 말은 아니다. 빈센트는 언제나 자신의 모든 그림을 테오에게 팔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빈센트의 그림으로 테오의 가족들은 큰돈을 벌 수 있었다.

담당의사였던 가셰 박사 역시 상당한 안목을 가진 사람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꺼리던 인상주의 작품 여러 점을 이미 소장하고 있었다. 그는 반 고흐의 작품도 좋아해서, 흔쾌히 치료비를 작품으로 받았다. 생전에 이미 유명 잡지에 반 고흐를 높이 평가하는 글이 실리기도 했다. 대중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그림을 본 동료 화가와 미술인은 모두 높게 평가했다. 1990년 ‘가셰 박사의 초상화’가 8250만 달러에 팔리며 정점을 찍었던 반 고흐 열풍은 사망 후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책은 반 고흐 작품들의 사후 처리 같은 세속적인 궁금함을 충족시켜 준다. 언젠가 테오의 초상화를 그리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빈센트는 예상치 못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형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테오 역시 6개월 뒤에 죽는다. 사인은 “마비 증세를 동반한 정신질환·유전·만성질환·과로·슬픔”이었다. 테오마저 덧없이 죽고 나서, 모든 것을 감당한 사람은 테오의 젊은 아내 요한나 봉허다. 그녀는 반 고흐의 작품을 세상에 보이고 가치를 최대한 높이는 일에 평생을 바친다. 수차례 전시회를 조직했고, 형제가 주고ㅅ받은 편지를 몇 년간 꼼꼼히 정리해 출간하는 등 다양한 각도에서 유산을 관리했다. 그녀는 200여 점의 그림을 평생 간직하고 있다가 아들에게 어마어마한 유산으로 만들어 물려주었다. 형제 간의 우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요한나는 테오의 무덤을 형의 무덤이 있는 오베르로 이장해 나란히 쉬게 했다.

작품은 두 번 태어난다는 말은 언제나 진리다. 한 번은 창작자의 손에서, 다른 한 번은 그 작품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말이다. 생전의 고흐는 자신의 작품이 세계적으로 사랑받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림이 보여주듯 반 고흐는 지상에서의 진실을 사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평범한 사람들과 어울리려 할수록 그는 평범하지 못한 사람이 되어갔다. 뭐라고 불리든, 그는 세상을 아파하면서도 사랑했다. 그것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에 여전히 그의 작품은 사랑을 받는다. 지금도 여전히 세계 어디선가 반 고흐 관련 전시가 기획되고, 젊은 화가들에 의해 그의 이미지가 그려지고 있다. 반 고흐에 관한 책이 수없이 많이 나왔지만, 여전히 새로운 책들이 쓰이고 있다. 반 고흐 신화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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