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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주여 이제는 ‘그 곳’에~주님 갈 길도 바꿔버린 검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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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호 17면

양희은과 김민희의 캐럴음반. 사진 가요114 제공

그러고 보니 성탄절을 떠들썩하게 보냈던 것이 언제던가 까마득하다. 내가 나이 먹은 탓만은 아닐 듯하다. 1980년대만 해도 12월에 들어서자마자 징글징글하게 ‘징글벨’ 소리를 들어야 했는데, 그게 확실히 사라진 것이다. 하긴 이게 정상이다 싶다. 기독교인도 아닌 사람들이 성탄절이라고 그렇게 난리법석을 피울 일은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고 보면 과도하게 들뜬 성탄절 풍속은 확실히 특정한 역사적 산물이었다. 해방 후 미 군정과 전쟁을 겪으며, 성탄절은 미국식으로 사회 전체의 관심사가 되었다. 동아일보 1953년 12월 30일자 사설에는, 평소 교회에 기웃도 안 하던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라고 모여서 술을 마시고 한 장에 ‘십 환’씩이나 하는 카드를 보내니, 과연 이렇게 ‘국민적 명절’로 쇠어야 하느냐고 개탄하고 있다. 하지만 성탄절이 공휴일이 되고 서울시청 앞에 호화로운 트리를 세웠으니, 정부가 나서서 전 사회적 명절임을 공표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60년대만 해도 대통령이 시청 앞 트리 점등식을 하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졌다(이 시절 석가탄신일은 공휴일조차 아니었다).

이영미의 7080 노래방 <39> 크리스마스 캐럴

이것이 비정상임을 깨닫기까지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특히 70년대까지 크리스마스 이브는(12월 31일과 함께) 1년에 딱 이틀밖에 없는 야간통행금지 해제의 날이었다. 술집이 밤새도록 영업을 할 수 있는 날이었던 것이다. 이러니 사람들은 갑자기 고삐 풀린 느낌으로 12월 24일 밤에 별일도 없으면서 모조리 명동거리로 나와 어디서 누구와 ‘올나이트 파티’를 할까 고민하게 되었다.

이러니 60년대까지만 해도 ‘고요한 밤’이나 ‘징글벨’ ‘화이트 크리스마스’ 같은 캐럴은 들어온 지 10여 년밖에 안 되는 신선한 노래였다. 그래서인지 톱가수는 누구나 캐럴을 취입했다. 패티 김이나 조영남 같은 팝 분위기의 가수들은 물론, 이미자와 배호조차 캐럴을 취입했다. 캐럴 음반은 80년대까지 유행이었는데, 1년에 딱 한두 달 팔고 끝내는 한철 상품을 이렇게 매해 냈다는 것은 그만큼 잘 팔렸다는 의미다.이렇게 캐럴이 흔해지자, 남 하는 짓을 그대로 하기 싫어하는 포크송과 록 가수들은 다소 색다른 캐럴 음반을 시도한다. 이들 음반에 실린 가장 파격적인 노래는 아마 1977년 양희은 캐럴 음반에 실린 이 곡일 것이다.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 어디에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 무얼 찾아 헤매이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여기에 우리와 함께 / (하략)”(‘금관의 예수’, 1972, 김지하 작사, 김민기 작곡)애초에 이 노래는 김지하 작·연출의 연극 ‘금관의 예수’ 삽입곡으로 작곡되어 공연됐다. 가사에서 명확히 드러나듯 이 노래는, 당시 음반검열을 통과할 수 없는 작품인데, 양희은이 77년 캐럴 음반을 내면서 ‘주여! 이제는 그곳에’라는 제목으로 개작해 실었다. 김지하나 김민기 이름 대신 다른 이름을 썼고, 가사도 대폭 수정해 심의를 통과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수정의 정도였다. 제목에서부터 나타나듯, 주가 강림하시길 바라는 곳이 ‘여기’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그곳’ ‘어두운 북녘 땅’으로 바뀐 것이다. 북한에 ‘주’가 강림하기를 기도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김지하의 희곡이나 김민기 노래의 초점인 내세만을 외치며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고 돈 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과 야합하는 잘못된 일부 기독교의 행태를 비판하고자 한 의도가 완전히 뒤집혀 버린 결과를 빚었다. 이후 양희은은 김지하에게 불려가 호된 질책을 들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이 노래를 이렇게까지 싣고 싶어 한 양희은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노래가 워낙 좋고 감동스러운 것이다. 엄숙하면서도 비장하고 드라마틱하여, 노래 부르면서 가슴이 벅차오르고 ‘아멘’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다. 77년 양희은의 캐럴 음반은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함께’라는 표어를 매해 내붙여야 할 정도로 들뜬 성탄절 느낌과는 전혀 다른 컨셉트였다. 찬송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참 아름다워라’를 ‘주여! 이제는 그곳에’와 함께 A면에 싣고, 익숙한 캐럴들은 B면으로 밀어놓았다. 성탄절은 예수 탄생의 의미를 생각하는 거룩하고 기쁜 날이라는 선언인 셈이다.

80년대로 넘어서면서 들뜬 성탄 바람은 다소 잦아들었다. 이 시기를 휩쓴 것이 바로 ‘개그 캐럴’과 어린이 캐럴이다. “흰 눈 사이로 썰매를 타고 달릴까 마알까 달릴까 마알까” 하는 심형래의 ‘징글벨’을 필두로 김미화 등 개그맨의 캐럴 음반, 드라마 ‘달동네’ 똑순이 김민희의 캐럴 음반 등이 줄을 이었다. 이제 어른들이 성탄절이라 들뜨면 좀 유치한 일이 되었고, 대신 아이들이 선물 기다리는 날로 격하된 것이다. 그리고 91년 국악 그룹 슬기둥이 국악기로 편곡한 캐럴 음반을 냄으로써, 캐럴의 토착화 흐름에 정점을 찍었다.


이영미씨는 대중예술평론가다. 대중가요 관련 저서로『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광화문 연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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