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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마돈나, 두 아이 엄마... 내가 꿈꿔온 균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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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호 07면

1 싯다르타’에서 니콜라 르 리슈와 2인무를 하는 뒤퐁. Photo Anne Deniau

연말이면 전 세계 대부분의 발레단이 ‘호두까기 인형’을 올리지만 파리오페라발레단은 예외다. 가르니에 극장에서는 ‘오네긴’(존 크랭코 안무)을, 바스티유 극장에서는 ‘신데렐라’(루돌프 누레예프 안무)를 각각 올렸다. 16일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가르니에 극장으로 향했다.마침 자리가 오케스트라 피트와 붙은 맨 앞이어서 뒤퐁의 표정 연기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푸시킨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오네긴’은 ‘나쁜 남자’ 오네긴과 순진하고 낭만적인 여성 타티아나 사이에서 벌어지는 애증과 비련을 다룬 작품이다. 3막 오네긴과 타티아나의 2인무가 하이라이트다. 타티아나 역을 맡은 뒤퐁은 절규하는 듯했다. 그동안 차가울 정도로 절제된 연기를 보여왔기 때문에 그녀의 변신은 놀라웠다. 최근 파리오페라발레단에 입단한 박세은은 “우리 단원들조차 뒤퐁의 폭발적인 감정 연기에 놀랐다”고 들려주었다. 조명과 무대 디자인, 음악도 완벽에 가까웠다. 공연이 끝나자 객석에서는 환호가 터져 나왔다.

파리국립발레단의 간판스타 오렐리 뒤퐁을 만나다

2 신데렐라’에서 무도회 장면. Photo Icare

-‘오네긴’과 ‘신데렐라’에서 어떻게 역할을 설정했나. “오네긴을 갈구하는 타티아나를 생각했다. 나는 비극적인 역할이 싫증나지 않는다. 하지만 사실 하고 싶은 역할은 오네긴이다. ‘신데렐라’는 춤추기 아주 편안하다. 갖가지 색깔로 가득 찬 인물이기 때문이다. 더러운 하녀였다가, 찰리 채플린이 된다. 이 모든 모습을 연기하는 게 좋다.”

3 라 바이야데르’에서 주인공 니키타 역의 뒤퐁 Photo Anne Deniau4 카르멘’에서 솔로로 나선 뒤퐁. Photo Icare 5 오네긴’에서 그레민 공작 역의 뱅상 코르디에(Vincent Cordier) 와 2인무를 하고 있는 뒤퐁. Photo Michel Lidvac

-첫아이 땐 5개월 만에, 이번엔 3개월 만에 무대로 돌아왔다. 어떻게 더 빨라졌나? “에투왈이라는 의무감이 나를 자극했다.”

-어떤 의무감인가. “나의 첫 번째 책임은 주인공으로서 춤을 추는 것이고 가능한 한 그 역할을 잘해야 한다. 에투왈은 항상 모범이 돼야 한다. 수준 높은 공연이 되려면 프리마돈나는 무용수들에게 자신의 에너지를 부어줘야 한다.”

6 39지젤’에서 마누엘 르그리와 2인무를 하고 있는 오렐리 Photo Julien Benhamou7 39오네긴’에서 오네긴과 타티아나의 3막 마지막 듀엣. Photo Sebastien Mathew

-무대로 복귀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겠다. “체중이 20kg이나 늘었고 발도 커졌다. 이전의 내 모습으로, 무용수로 돌아갈 수 있을지 두려웠다. 프리마돈나는 몸매만 되찾아서는 안 된다. 자신의 수준을 회복해야 한다. 어려운 일이다. 우선 나 자신의 엄격한 평가를 만족시켜야 한다. 감독님과 대중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다시 정상에 올라서야 했다. 열심히 연습한다는 그 단순한 사실이 내 몸을 다시 춤출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주었다. 처음에는 어려웠고 때로 실망도 했지만, 나는 결코 나를 느슨하게 풀어주지 않았다. 그런 나의 성격에 감사한다.”

그는 전형적인 파리지엔이다. 1973년 파리 8지구에서 태어나 10살 때인 83년 에투왈의 꿈을 안고 파리국립발레학교에 입학했다. 89년 파리오페라발레단에 입단한 그녀는 오페라하우스를 “매우 아름다운 황금 감옥”이라고 표현한다.
98년 ‘돈키호테’ 공연이 끝난 직후 바로 그 무대에서 에투왈로 지명됐다. 파리오페라발레단 에투왈은 발표 전까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다. 김용걸(전 파리오페라발레단 솔리스트)씨에 따르면 에투왈로 지명되면 다음 날 아침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는 것과 함께 유럽을 대표하는 예술가 반열에 오른다. 박세은은 “에투왈이 갖춰야 할 최고의 덕목은 춤 실력에 앞서 겸손함,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라고 말한다.

-파리오페라발레단의 에투왈이 되려면 어떤 과정을 거치나. “우선 8세에서 10세 사이에 파리오페라 발레학교에 입학한다. 교육 과정이 굉장히 혹독해 많이들 떠난다. 6년 정도 지나면 발레단에 입단하게 된다. 살아남기 위해 모두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겪는다. 그리고 운이 좋다면, 자신의 공연 후 모든 관중 앞에서 에투왈로 지명된다.”

-에투왈이 되었을 때 심정은.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 그 순간을 위해 춤을 춰왔으니까. 그리고 이상했다. 에투왈이 되었지만 다음 날에도 똑같은 일과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웃음)”

-많은 사람이 당신의 재능과 아름다움을 말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10세 때 발레 선생님이 해주셨던 얘기가 생각난다. ‘오렐리! 예쁜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아. 흥미로운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해!’ 그 이후부터 칭찬에 동요되지 않으려고 한다. 그저 멋진 춤을 추는 ‘흥미로운’ 발레리나가 되고 싶다.”

-당신의 재능은 누가 처음 발견했나. “좋은 선생님들이 있었다. 어린 시절 발레학교에서, 그리고 발레단에 입단해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나의 장점과 단점을 알게 됐다. 24세 때 만났던 안무가 피나 바우슈는 내 연약함을 장점으로 이끌어준 분이다. 그녀는 상처받기 쉽고 여린 나의 감성을 먼저 알아보고 그것을 잘 살려내야 한다고 했다.”
그녀의 삶은 발레에 입문한 10세 이래 28년간 하루도 빠뜨리지 않는 기본 클래스와 리허설, 그리고 공연으로 이어져 왔다. 지금 하는 연습도 10세 때와 똑같다. 똑같은 동작을 무수히 반복한다. 무대에서 항상 완벽한 모습을 보이는 비결은 오직 연습뿐이라고 그는 말한다.

-당신에게 발레는 무엇인가. “(웃음) 직업이다. 어렸을 때엔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그 덕분에 힘들고 혹독한 과정들을 견뎌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21세기의 프리마 발레리나는 클래식 발레와 현대 무용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어야 한다고들 한다. “21세기의 무용수에게 전통을 이어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많은 것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라져가는 것을 지키고, 또 그 전통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것이 21세기 프리마 발레리나의 역할이 아닐까? 현대사회에서는 누구나 춤을 출 수 있다. 그것을 위해서는 굳이 클래식 무용 교육을 받지 않아도 된다. 나는 클래식과 현대 무용 모두 좋아하지만, 클래식 발레만이 집요하게 요구하는 어떤 테크닉적인 완벽함이 좋다.”

-언제까지 에투왈로 춤출 수 있나. “파리오페라발레단의 정년은 마흔두 살이다.”

-정년 이후엔 뭘 하고 싶나. “가르치는 일이 좋기도 하고 그게 어쩌면 가장 쉬운 길일 수 있겠지만, 완전히 다른 분야에 도전해 보고 싶다. 춤추는 것 말고 다른 일도 잘 해낼 수 있는지, 나 자신을 한번 시험해 보고 싶다.”

-예를 들면. “나는 손으로 뭔가 만드는 일을 좋아한다. 내 방을 보면 알겠지만, 보석으로 목걸이를 만들거나 직접 옷을 만드는 일도 좋아한다. 실제로 내 아들 옷은 대부분 직접 만든다. 오래된 가구를 새롭게 장식해 변신시키는 것도 좋아한다.”
뒤퐁은 ‘돈키호테’ ‘춘희’ ‘지젤’ 등 다양한 레퍼토리의 주역을 맡았다. 특히 2년 전 은퇴한 에투왈 마누엘 르그리(현 빈국립발레단 예술감독)와 함께 환상적인 듀엣으로 파리오페라발레단의 역사를 새로 썼다. 전설적인 발레리나 마고트 폰테인과 누레예프가 듀엣으로 1960~80년대 수많은 발레의 주인공이 되었듯, 뒤퐁은 르그리와 함께 지난 15년간 수많은 발레 작품의 주인공으로서 갈채를 받았다.

-2009년 도쿄 월드발레페스티벌에서 마누엘 르그리와 함께 했던 ‘춘희’를 인상적으로 보았다. “춘희’는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레퍼토리다. 이상하게 나는 마지막에 주인공이 죽는 비극이 좋다(웃음). 예술적으로 표현하기는 굉장히 힘들지만, 그래도 비극이 재미있다. 가장 좋아하는 레퍼토리는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마누엘 르그리는 마치 쌍둥이 형제처럼 호흡이 잘 맞았다. 니콜라 리쉬 역시 내가 좋아하는 파트너다. 마누엘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파리오페라발레단은 전 세계의 유명 안무가를 초청해 공연을 한다. 안무가들과의 에피소드도 많겠다. “즐거운 기억도, 끔찍한 기억도 많다. 윌리엄 포사이드 같은 안무가와는 처음부터 굉장히 사이가 안 좋았다. 같이 일하는 동안 나를 비롯한 다른 무용수들에게, 또 우리 발레단에 대해 심한 말을 많이 했다. 나는 할 말은 해야 하는 성격이다. 그래도 한 달 반가량을 꾹 참다가 결국 소리치고 뛰쳐나와 버렸다. 3년쯤 뒤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 때문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하필 택시를 같이 타게 됐다. 그때 사과하더라. 자기가 너무 했었고 미안하다고. 그래서 사과를 받아주었다(웃음).”

-좋아하는 안무가나 무용수는. “로열 발레단의 마리아넬라 누네즈를 아주 좋아한다. 춤을 정말 잘 춘다. 굉장히 섬세하고 세련된 감성으로 춤을 추는 친구다. 신체 조건도 좋다. 무엇보다 춤을 통해 그녀의 인간적인 매력까지 느낄 수 있다. 실력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 매력이 많은 사람을 좋아한다.”

-28년간 춤을 추었는데, 육체적으로 좀 편해졌나. “춤과 특히 (발 끝으로 서는)토 자세가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러워졌다. 부상을 당한 적도 있고, 몸을 움직이기 힘든 임신기간도 거쳤다. 무용을 직업으로 삼고자 한다면 조금은 자신의 몸을 망가뜨리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지불해야만 하는 비용이다. 진정한 양보이기도 하다.”
지난해 인터뷰는 파리 오페라 가르니에 극장 2층 그녀의 개인 드레스룸에서 이루어졌다. 드레스룸 창틀에는 토슈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휴식을 위한 작은 침대와 두 개의 화장대. 거울에는 큰아들 자크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남편(제레미 벨랑가르·J<00E9>r<00E9>mie B<00E9>lingard) 역시 같은 발레단 에투왈 무용수다. 그리고 이제 두 아이의 엄마다. 엄마와 아내, 발레리나로서 균형은 어떻게 유지하나. “육아와 춤을 함께하긴 굉장히 힘들다. 돈도 많이 들고. 좋은 베이비시터를 구해야 하니까(웃음). 공연이 없을 때는 그래도 견딜 만하다. 보통 아침 11시쯤 연습이 시작되니 아침에 아이와 되도록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하지만 공연이 시작되면 힘들어진다. 그래도 잘 해내고 있는 것 같다. 두 아이가 있다는 사실은 나를 아주 행복하게 해준다. 오래전부터 내가 꿈꾸어온 균형이다. 나를 반기는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땅 위에 설 수 있도록 지탱해 주는 힘이다.”

-아들이 춤을 추겠다고 하면. “본인이 원한다면 말릴 생각은 없다.”

-한국인 발레리노 김용걸씨와의 추억은. “연습을 정말 열심히 했던 무용수로 기억한다. 진지하고 또 인간적으로 정말 따뜻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를 비롯한 모든 발레단 식구들이 좋아했다. 언젠가 파티에 늦게 나타난 용걸이 들고 왔던 커다란 한국 술병도 생각난다.”

-많은 한국 무용수가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하며, 세계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다. 조언을 해준다면. “파트너, 코치, 오케스트라 단원들, 조명 담당, 메이크업 담당 등 함께 일하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하라고 말해 주고 싶다. 발레리나는 절대 혼자가 아니다. 자신보다 춤을 잘 추는 사람은 어딘가 있게 마련이다. 그것 때문에 우쭐댈 필요도 없다. 진실한 모습으로 무대에 올라야 한다.”


파리국립오페라발레단
‘발레의 아버지’로 불리는 태양왕 루이 14세가 1669년 설립한 왕립무용아카데미에서 출발했다. 현 극장 건물은 1875년 샤를 가르니에가 설계했다. 오늘날 파리에서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건물로 꼽힌다. 좌석은 2300석. 300여 명의 예술가를 포함해 1600여 명의 스태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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