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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 대화 사이 … 조의로 대북관계 리셋 신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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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류우익

고심 끝에 나온 미묘하고도 전략적인 수위 조절이다. 20일 오후 4시 류우익 통일부 장관이 발표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조문과 관련한 정부담화문이 그렇다. 사망 발표로부터 28시간이 걸렸다.

 “정부는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과 관련하여 북한 주민들에게 위로의 뜻을 전합니다. 북한이 조속히 안정을 되찾아 남북이 한반도 평화와 번영을 위해 협력할 수 있게 되길 기대합니다.”

 정부 당국자가 북한 주민을 위로하는 형식을 빌려 김 위원장의 사망에 대해 조의(弔意)를 표한 것이다. 하지만 정부 차원의 조문단은 보내지 않기로 했다. 다만 류 장관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의 유족에 대하여 북측의 조문에 대한 답례로 방북 조문을 허용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북한은 2009년 김 전 대통령이 별세했을 때 조문단을 파견했고, 2003년 정 전 회장 장례 때는 조전(弔電)을 보내왔다. 2001년 정 전 회장의 선친인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별세했을 때도 조문단을 보냈었다. 통일부 관계자는 “유족은 사회에서 통용되는 범위로 미망인이나 자녀”라고 설명했다. 노무현재단 등 여타 사람이나 단체·기관의 조문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거다.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 사망 당시 김영삼 정부는 조의를 표명하지도 조문을 허용하지도 않았다.

 정부의 입장이 크게 달라진 건 “김 위원장이 사망한 이번이 대북 관계를 리셋(reset·다시 맞추다)할 수 있는 기회”(정부 고위 관계자)란 시각에서다. “북한을 위로하고 안심시키는 메시지를 통해, 북한 지도부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우리 스스로 선택의 폭을 좁히거나 북한 강경파가 득세할 빌미를 줘선 안 된다”는 판단도 했다고 한다. ‘북한이 기회로 여기도록 문을 열어두자’는 취지다. 누가 후계자가 되든 상당 기간 ‘유훈통치’가 불가피한 만큼 어느 정도 조의를 표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현실론이기도 하다. 류 장관은 이날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에서 “북한이 현실적으로 우리의 안보 위협 세력인 동시에 대화 파트너인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국민 여론도 크게 달라졌다. 94년엔 “조의를 표해야 한다”고 하면 비판론이 많았지만 지금은 한나라당 대표를 지낸 홍준표 의원도 “조문 특사라도 보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할 정도가 됐다.

 그렇더라도 아웅산·KAL 테러에 천안함·연평도 사건에 책임이 있는 김 위원장에 직설적으로 조의를 표하는 건 보수정부로선 곤란한 일이다. 정부가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던 이유다. 그 결과 북한 당국이 아닌 북한 주민을 위로하고, 인도주의적 성격의 답방 조문을 허용하는 절충점을 찾아낸 것이다. 청와대에선 “천안함·연평도 사건 등을 일으킨 권력 자체는 인정할 수 없다”며 “다만 북한 주민들이 (김 위원장을) 추앙하니 주민들을 위로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일본의 접근법과도 유사하다. 정부는 또 북한 주무장관인 류 장관이 담화를 발표토록 해 향후 남북 관계가 열려 있다는 메시지도 담았다.

 정치권은 대체로 반겼다. 한나라당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 황우여 원내대표 등도 정부 입장에 공감하고 있다. 민주통합당에선 “조의를 표명한 건 참 잘한 일이다. 그러나 정부 차원에서 조문을 보내지 않기로 한 건 아쉽다”(김유정 대변인)는 기류다.

고정애·권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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