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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접은 '풍운아' 이헌재 전 재경부 장관

중앙일보

입력

"원래 건달이었고 다시 건달신분으로 되돌아가는데 뭐가 걱정이냐"

개각설이 나돌 때마다 이헌재(李憲宰) 전 재정경제부 장관이 기자들에게 자주 던졌던 말이다. 소신대로 일할 뿐 장관직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국민의 정부 출범이후 2년6개월간 금감위원장과 재경부장관을 지내면서 해방이후 쌓인 기업.금융의 쓰레기를 청소하느라 온갖 악역을 감수해야했던 그는 이제 다시 야인생활에 접어들었다.

재직기간 동안 조직에 일을 맡기기 보다 혼자 독주한다는 비판을 들을 정도로 눈부신 활약을 했고 자신의 소신을 일관되게 견지했다.

금감위원장 시절 이 전 장관은 은행.기업 퇴출, 기업 부채비율 200%로 축소, 재벌기업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등을 추진하면서 추호의 타협이나 흔들림이 없었다.은행.기업퇴출때는 신변에 대한 위협으로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호텔방을 전전해야 했다.

재경부장관에 취임한 뒤에도 2.8 대우채환매, 금융시장 불안, 채권시가평가제, 현대 유동성위기, 금융파업 등에 대한 대응을 실질적으로 주도하면서 자신의 의지와 구상을 관철시켰다.

공적자금 추가조성에 대해서는 여야 국회의원들과 여론의 동시다발적이고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반대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정부가 섣불리 공적자금을 조성 하겠다고 발표하면 기업들이 국민의 `혈세'에 기댄채 구조조정을 외면하려는 도덕적 해이에 빠질 수 있다는게 그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이런 소신은 금융분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정확히 그리고 많이 알고 있다는 자신감에서 나온다. 사실, 그가 아니면 금융.기업구조조정을 제대로 마무리짓지 못할 것이라고 보는 관료들도 많다.

재경부 관계자는 "금융이 뭔지 가장 많이 알고 모든 정책을 시장과 연계시키는 시장 존중형인데다 직원들이 따라가기 힘겨울 정도로 아이디어가 많았다"고 말했다.

그는 구조조정의 명수로 알려졌지만 거시경제에 대해서도 해박하다는 점을 재경부내 거시경제담당 직원들도 인정하고 있다. 그는 재경부장관으로 취임하자 마자 거시경제에 대한 보다 정확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거시경제점검회의를 강화했다.

또 디지털경제의 전도사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기회있을 때마다 디지털경제로 조속히 이행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강구하는 등 미래에 대한 확실한 비전도 갖고 있다.

소득분배에 대해서는 온정주의적이고 일회성 방안보다는 중산.서민층의 내집마련 지원 등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있는 방안을 강구했으며 공공요금도 인상요인을 무조건 억누르는 정책방향에도 반대했다.

그의 이런 실용적.현실적 감각과 미래를 준비하는 자세는 그동안 순탄치 않았던 인생행로와 무관하지 않다.

이 전장관은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행정고시(6회)에 수석 합격한뒤 69년 재무부 이재국 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금융정책과장 시절에는 돋보이는 아이디어와 업무 추진력으로 당시 김용환(金龍煥) 장관의 총애를 받아 '장관급 과장'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79년 율산사태로 당시 김용환 장관과 함께 옷을 벗은 뒤 20년간의 야인 생활에 들어갔다.

미국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보스턴대)를 받고 하버드대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했으며 대우그룹에서 임원을 지내고 신용평가회사 사장, 증권관리위원회 상임위원 등을 거치며 시장 감각을
익혔다.

낭인생활을 통해 엘리트 관료의 때를 벗고 잡초같은 승부사기질을 몸에 익힌 덕인지, 97년 비상대책위원회 실무기획단장이 됐고 바로 김대중(金大中) 당시 대통령 당선자 눈에 들어 98년 4월 초대 금감위원장에 올랐다.

그가 일을 잘못해서 물러난다고 생각하는 공무원들은 별로 없다. '경제팀의 불협화음' '지지부진한 구조조정' '시장에 대한 지나친 간섭' '추가공적자금조성 외면 등 안이한 상황인식' 등 이 전 장관에게 쏟아지고 있는 비판은 일부 옳은 것도 있으나 상당부분 상황이나 '정치 탓'으로 돌려야한다는 견해가 많다.

구조조정이 탄력을 얻기위해서는 연초부터 재벌.금융개혁 드라이브를 강하게 걸었어야하는데 4월 총선을 치르느라 1분기를 거의 허송세월했다. 이 전 장관의 개혁 성향때문에 '표'가 떨어진다는 정치권의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그가 '개혁피로감'에 젖어있다고 몰아붙였다.

그는 현재 급성 맹장염으로 지난 4일부터 병원에 입원중이다. 장관교체 사실은 입원하기전에 청와대로부터 통보받았다. 그는 문병간 지인들에게 '피곤하다 쉬고싶다'는 말을 많이 했다..

병원에서 퇴원한뒤에는 집에서 잠시 요양한뒤 바람을 쐬러 미국으로 건너갈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외 금융기관이나 대기업, 컨설팅업체 등에서 그를 원하는 곳이 많아 어디에 몸을 담아야할지 속으로 고민하고 있을 것이라고 한 측근은 전했다.

그를 잘아는 주변 사람들은 이 전 장관이 아직 나이가 있고 쓰임새가 많은 인물이어서 다시 '한자리'할 것으로 믿고 있다. 행정과 금융, 기업에 대해 그만큼 균형된 지식과 감각을 갖춘 인사를 국내에서는 찾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이 전 장관은 금융감독위원장으로 금융과 기업 수술을 집도하면서 국내외의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고 있을 당시 사적인 자리에서 누가 추겨세우는 발언을 하면 "물러날때 침이나 뱉지 말아주시오”라는 말로 응수하곤했다.

'퇴출' '워크아웃' '부채비율 200%' '야생마(재벌) 길들이기' 등 숱한 유행어를 만들어내며 한 때 외신으로부터 '한국 금융계의 황제' 'MF 터널 탈출의 일등공신'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이 전 장관은 자신의 말해온대로 다시 한번 야인으로 돌아갔다.
(서울=연합뉴스) 김종현.윤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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