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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나 도로보데쓰!”5共시대 신랄히 풍자 ,드라마로 불의 맞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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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호 31면

1991년 무렵의 작가 김기팔. [사진 중앙포토]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면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사람이었다. 평안남도 용강 출신의 6·25실향민인 그는 대학 후배며 오랜 술친구였던 김지하를 면전에서 ‘빨갱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철저한 반공산주의자였다. 하지만 정부가 잘못하면 반체제 저항운동도 필요하다고 믿는 그런 사람이었다. 방송작가며 희곡작가인 김기팔(1937~91)이다. 그는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같은 학교 3학년이었고 문예반장이었다. 소설가를 꿈꿨던 그는 그 무렵부터 필명을 떨치고 있었다. ‘매사에 칠전팔기(七顚八起)하겠다’는 뜻으로 본명인 김용남 대신 김기팔이라는 이름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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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문리대 철학과에 진학한 그는 2학년 되던 195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중성 도시’가 당선하고, 3학년 되던 60년에는 KBS라디오의 ‘100만환 고료 드라마 현상 공모’에 ‘해바라기 가족’이 당선해 다소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김기팔이 방송작가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중반까지 동아 라디오에 ‘정계야화’를 쓰면서였다. 그는 당시의 정권이 금기로 삼았던 부분들을 과감하게 파헤쳤다. 두 차례나 방송이 중단되는 곤욕을 치렀으나 그는 굴하지 않았다. 그 무렵 그는 3개 TV에도 돌아가며 드라마를 집필하고 있었는데 대중과의 영합이 인기 작가의 첩경이었으나 그는 영합하는 대신 대중의 아픈 곳을 보듬어주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자세로 일관했다.

김기팔의 그런 작가적 특징은 8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민나 도로보데쓰!”(‘모두가 도둑놈’이란 뜻의 일본어·‘거부 실록’ 중 ‘공주 갑부 김갑순’) “나 돈 없시요” “당신 미인이야요”(이상 ‘야망의 25시’) 등 그가 쓴 TV 드라마의 대사들이 한동안 대중에 유행어로 회자된 것은 제 5공화국 초기였던 당시의 서슬 퍼런 시대 상황을 풍자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당초 50회 정도로 예정됐던 ‘야망의 25시’나 ‘제1공화국’ 등이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도중하차하게 된 것도 그 이유를 물을 수조차 없었던 권력기관의 외압 탓이었다. 그는 타협을 종용한 방송 측의 요청도 거부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83년 제19회 백상예술대상에서 ‘거부 실록’으로 TV극본상을 받기도 했다.

그의 작품세계가 그렇듯 그의 생활신조도 힘 센 쪽, 가진 쪽, 옳지 못한 쪽을 철저히 배척하고 약한 쪽, 가난한 쪽, 옳은 쪽을 두둔하고 옹호하는 자세였다. 가령 이런저런 이유로 배역을 받지 못해 형편이 어려운 많은 연기자가 김기팔의 강력한 입김으로 출연 기회를 얻어 유명 연기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좋은 예다. 박근형·박규채·심양홍 등이 대표적이다. 나중에 희곡작가로 변신한 박정기와 TBC-TV 공채 탤런트 5기로 연기 활동을 시작한 내 아우 정규택(미국 이민)도 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방송이 통폐합되던 80년 11월 30일 저녁에도 김기팔은 몇몇 연출자·연기자와 함께 밤을 새워 통음하며 울분을 토했다.

김기팔의 마지막 작품은 노태우 정권 말기인 91년 초부터 MBC-TV에서 방영된 ‘땅’이었다. 본래 그해 말까지 약 50회가 예정돼 있던 이 드라마는 4월 들어 15회가 방송되면서 뚜렷한 이유 없이 돌연 조기 종영됐다. 회를 거듭하면서 이 드라마가 ‘수서 특혜 비리 사건’을 연상케 해 청와대를 격분케 했다는 소문이 나돈 것과 때를 같이했다. 드라마가 종영되자 방송연기자노조(위원장 유인촌)는 이례적으로 성명을 내고 “방송의 자주성과 자율성을 수호하자”고 결의했다. 연기자노조가 출연료 등 처우 문제로 성명을 낸 적은 있으나 드라마에 대한 권력층의 압력을 문제 삼아 성명을 낸 것은 처음이었다.

김기팔은 낙담하지는 않았다. 전체 줄거리를 미리 구상했기 때문에 드라마 ‘땅’의 소설화 작업에 착수했다. 소설가가 되고자 했던 젊은 시절의 꿈을 실현하고 싶었고, 드라마로 채 보여주지 못했던 현실적인 여러 가지 문제를 소설 형식으로 재현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끝내 완결을 보지 못하고 췌장암이 발병해 그해 12월 24일 숨을 거두었다. 54세였다. 이듬해 1주기 때 김기팔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뜻을 모아 고양시 장곡동 통일공원에 그를 추모하는 ‘통일 염원 방송비’를 건립했다. 김지하가 비문을 쓰고 고등학교 후배인 조각가 심정수가 조형했다. 김지하는 비문에 이렇게 썼다.

“밤새 뜬눈으로 지새우다가 신새벽에 돌아가셨다/밤새 사악한 무리를 질타하고 한 품은 이들을 달래시던 님은/민주와 통일의 먼동이 틀 무렵 기어이 돌아가셨다/그리던 북녘 고향 저만큼 보이는 곳에서 님이여/아직도 걷히지 않는 어둠을 지켜 다가올 대낮으로 증거하시라”
한국언론학회는 2010년 10월 16일 서울대 관악 캠퍼스 미디어실에서 제50차 정기총회를 열고 고 김기팔에게 한국 미디어 발전 공헌상을 수여했다. 12월 24일은 그의 20주기가 되는 날이다.


정규웅씨는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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