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셋값 상승] 34평형 "5000만원 더 내라"

중앙일보

입력

서울 상도동 현대아파트 34평형에 세들어 사는 정철훈(35)씨는 요즘 큰 고민이 생겼다. 8월 중순 2년 전세계약 만료를 앞두고 집주인으로부터 7천만원인 전셋값을 1억2천만원으로 올려달라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아둔 돈도 없을 뿐 아니라 어디에서 돈을 융통할 처지도 못된다. 주변 아파트를 둘러봐도 전셋값은 대부분 비슷하다. 이제 평수를 줄이든가, 값이 싼 외곽으로 이사가든가 선택할 일만 남았다.

최근 소형 아파트 전세물건 품귀현상은 올 초 빚어졌던 전세피난 현상을 그대로 닮아가고 있다. '전세물건 부족→가격 상승→규모(평수) 축소.외곽 피난' 현상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휴가가 끝나고 각급 학교 개학을 앞둔 이달 말부터 상황이 더 심각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더구나 전셋값이 계속 올라 매매가격을 밀어올릴 경우 전체 주택시장이 불안해질 수도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 얼마나 모자라나=소형 아파트 단지는 거의 예외없이 매물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서울 잠실 ERA롯데공인 이청렬 소장은 "주공1단지의 경우 5천3백70가구가 있는데 1일 현재 공개적으로 나온 전세물건은 7건" 이라면서 "그런데 수요자는 하루에 4~5명씩 찾아와 60여명이 계약 대기 중" 이라고 말했다.

특히 기존 아파트 세입자들이 올려주고서라도 재계약하는 사례가 많아져 매물이 거의 나오지 않고 있다.

서울 강동구 고덕동 주공아파트 1단지(7백80가구)도 전세물건이 1~2개에 불과하고 나오자마자 계약이 이뤄진다. 가격도 13평형이 지난 봄에 비해 5백만원 정도 올라 4천5백만원선이다.

서울 양천구 목동 석사부동산 관계자는 "현대.금호.삼익아파트 25~27평형은 전셋값이 9천만~1억원 선인데 그나마 물건이 없어 구할 수 없다" 고 전했다.

◇ 왜 오르나=가장 큰 이유는 지난해 하반기 이후 전셋값이 오르면서 평형을 낮춰 이사가는 사람들이 늘어난 데 비해 공급은 해마다 줄고 있기 때문이다. 2년 전 계약 당시만 해도 전셋값은 현재의 70%선에 불과해 이 돈으로 같은 평수로 옮기기란 턱없이 부족해 집을 줄여갈 수밖에 없다.

시중 금리가 떨어지면서 집주인들이 월세로 돌리는 현상도 전세난을 부채질하고 있다. 서울 상계동 주공아파트 17평형의 경우 보증금 1천만원에 월 47만~50만원짜리 물건이 많다. 이자율을 월 1.5%로 적용하고 있어 수익이 은행 금리의 두배가 넘는다.

이 때문에 월세 물건은 남아도는데 전세는 턱없이 모자라 심한 수급 불균형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런 마당에 소형 평수는 날이 갈수록 줄고 있다. 1998년 소형 아파트 의무 건설비율을 폐지하자 그 뒤 대형 평수를 중심으로 아파트가 공급됐다.

건설교통부에 따르면 국민주택기금을 지원받는 전용면적 18평 이하 주택이 96년에는 10만2천2백여가구가 지어졌으나 지난해는 4만1천9백가구에 불과했다.

◇ 대책은 없나=가장 시급한 것은 정부 지원을 늘려 공공 임대아파트를 많이 짓는 일이다. 재건축 단지에도 정부가 지원해 일정량의 소형 임대아파트를 짓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건설업체의 경영난을 덜어주고 채산성을 높이기 위해 폐지한 소형 평수 의무건설 규정을 되살려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오진모 대한부동산학회장은 "건설업체를 살리기 위해 규제를 대거 풀다 보니 전세물건 부족 현상이 벌어지게 됐다" 면서 "소형 평수 건설은 공공 부문만으로 부족하므로 민간에도 일정 규모를 짓도록 해야 한다" 고 말했다.

재건축 제도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한꺼번에 몇천가구의 아파트를 철거하면 주변의 전세난은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특히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저층 및 중층 재건축 대상 아파트가 줄줄이 대기하고 있어 전세시장에 언제 또 물건부족 현상이 나타날지 모른다.

따라서 연간 철거주택 한도를 정해 재개발.재건축 사업을 조정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생생한 주택은 가급적 재건축을 허용하지 말고 개.보수해 사용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재건축 대상 아파트는 대부분 소형이어서 이를 권장할 경우 서민층의 보금자리가 자꾸 줄어들 수밖에 없다.

주택공사 주택연구소 김용순 연구위원은 "서울지역 대규모 재건축사업 계획 등을 감안하면 소형 평형 전세 수요자의 입지가 갈수록 줄어들 것" 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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