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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로 말하는〈정동진〉대 〈소나티네〉

중앙일보

입력

멋있는 주인공, 한마디로 뽀대(분위기)나는 영화의 주인공들을 보면 한결같이 말이 없다.

술집으로 유유히 흘러 들어가 살려달라고 벌벌 떠는 악당들을 쌍권총으로 쏘아대던 주윤발도 그랬고, 굵은 시가를 물고 말을 타고 달렸던 황야의 무법자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의 모든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말없이 먼 곳에 시선을 두는 주인공들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AV에선 코미디 장르의 독특한 캐릭터를 제외하고는 그러한 주인공들을 만나기 힘들다.

아마도 성이라는 것을 펼쳐 놓고 얘기를 하다보니 멋있는 주인공보다는 인간적인 주인공에 초점이 맞춰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게다가 AV의 관객의 대다수가 남성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멋있는 주인공은 AV의 관객에게 매력이 없을지도 모른다.

코믹에로가 AV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요즘 먼바다를 배경으로 긴 머리를 휘날리며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멋진 주인공이 등장하는 AV가 나왔다.

바로 〈감각커플〉을 만든 언타이틀에서 제작한 〈정동진〉.뽀대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배우들이 하나 둘이 아니겠지만, 근래 한일 문화 개방을 틈타 일본에서 건너온 코메디언 출신의 개성파 배우 기타노 다케시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뽀다구 맨이다.

그가 야쿠자의 오야붕으로 눈가에 잔뜩 힘주고 나오는 영화가 있으니 그 영화가 바로 오늘 〈정동진〉과 비교할 〈소나티네〉다.

우선 밝힐 것은 〈정동진〉과 〈소나티네〉사이에 비슷한 점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내용은 완전히 다르고, 하고자 하는 얘기도 다르다.하지만 주인공의 직업-깡패도 직업으로 친다면-이 같고 그들이 활동하던 무대를 떠나 바다로 간다는 설정이 같다.

한마디로 조직의 우두머리가 각자의 이유를 가지고 한적한 바다로 떠나게 되고, 그곳 바다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내용에는 큰 차이가 있지만 주인공이 품어내려고 하는 분위기에는 서로 어울리는 것이 있다.
그리고 두 영화 모두 분위기로 승부하는 영화이다.

우선 우수에 찬 눈에 긴 머리를 휘날리며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한국형 뽀다구 〈정동진〉.납골당에 소중한 사람을 묻고 돌아서는 주인공. 또 다른 아픔을 안고 납골당에 들어가려는 한 여인을 잡아채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의 말론 브란도와 마리아 슈나이더처럼 아무런 이유도 없이 섹스를 한다.갑작스럽게 강간을 당한 여인은 섹스를 끝내고 돌아가려는 남자의 뒤를 아무 불만없이 따른다.

휴게소에서 정동진으로 가고 싶다고 말하는 여인.둘을 태운 오토바이가 달리던 길은 아스팔트에서 해변의 모래사장으로 바뀐다.

긴 머리 대신 짧은 머리에 무서울 정도로 눈동자에 변화를 주지않는 일본의 뽀다구 〈소나티네〉.지역 야꾸자의 오야붕인 주인공.위에서 하달된 지시를 받고 도움을 주기 위해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한적한 바다 마을로 떠나게 된다.

지역에서의 그의 야꾸자라는 권위와는 전혀 다르게 바닷가에서 한적한 소일거리를 해야하는 주인공.어느 날 강간당할 뻔한 한 여인을 구해내고 친해지게 된다.

주인공 남자의 욕구대로 섹스만 하는 〈정동진〉의 두 사람. 주인공 남자는 괜히 터프한 척 하며 겉멋을 낸다. 바닷가에서 우연히 만난 불륜의 연인. 주인공과 불륜의 연인은 파트너가 서로 바뀌게 되고, 주인공은 불륜의 여인과 함께 산 속으로 떠난다.

반쯤 정신을 잃고, 자신의 몸에 누가 들어오는지 신경쓰지도 않은 채 바다만 바라보는 정동진을 그리워하는 여인. 근처의 조직원에게 걸려 팔릴 처지에 놓이게 된다.

조직원들과 바닷가에서 한가로이 지내던 야꾸자 오야봉. 조직의 지시가 없자 이를 수상히 여기다가 조직 내부에서 음모가 있음을 알아내게 된다. 그러나 이미 자신의 조직부하들은 모조리 죽은 뒤였고, 평상시 모습에서 약간 표정만 일그러진 주인공은 조직 내부로 들어가 무자비한 복수를 한다.

산 속에서 부하의 도움을 받으며 한가로이 지내는 〈정동진〉의 주인공. 〈소나티네〉의 주인공들이 서로 재밌는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데 비해 곁에 있는 여인들과 몸을 섞어가며 시간을 보내는 이들.

한 날 부하가 정동진을 그리워하는 여인의 소식을 전해주게 되고, 한가로운 일상에서 뭔가 변화를 보인 〈정동진〉의 주인공은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주먹 3방에 바닷가의 조직들을 헤치우고는 그녀를 데리고 빠져 나온다.

그리고 다시 휴게소. 남자는 여자에게 정동진으로 가자고 권하고, 함께 떠난다.

이상의 내용만 보아도 알겠지만, 〈정동진〉과 〈소나티네〉사이에 비교해 볼만한 것이 있을까 할 정도로 서로 상이한 부분이 많다. 어떻게 보면 〈정동진〉은 다른 영화와 더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쟈켓의 표지를 보면 최근 개봉한 〈섬〉과 비슷하고, 반쯤 정신이 나가 바다만 바라보는 여인의 캐릭터는 〈꽃잎〉과 비슷하다. 또한 긴 머리의 말수가 적은 주인공의 캐릭터는 누가 보아도 〈비트〉의 정우성이다.

이렇게 많은 영화들과 비교할 것이 많은데 굳이 〈소나티네〉와 〈정동진〉을 비교한 이유는 영화가 내는 분위기를 내는 방법을 비교해 보기 위해서다.

〈소나티네〉는 일본에서 1990년대 우수한 10편의 영화에 꼽힐 정도로 그 지명도가 높다. 위에서 열심히 설명했지만 〈정동진〉의 분위기는 절대〈소나티네〉에 뒤지지 않는다. 물론〈소나티네〉가 먼저 나오긴 했지만, 그 내용이 서로 다르고, 하고자 하는 얘기도 다르다.

〈소나티네〉나 〈정동진〉은 모두 분위기로 말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정동진〉도 〈소나티네〉에 못지 않은 분위기로 하고자 하는 얘기를 진지하게 풀어나가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물론 AV에 걸맞게 다양한 러브씬을 활용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실상은 주인공의 겉멋에만 신경쓰고, 그 겉멋이 어디서 왜 나왔는 지에는 신경쓰지 않아 주인공에게서 나오는 분위기가 그냥 겉멋에만 그쳐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분위기만을 차용하려다 보니, 여러 가지 영화에서 빈번히 사용되었던 이미지들이 많이 겹쳐져 있다. 때문에 어디선가 본듯한 이미지들이 많이 떠오르는 것 같다. 아무리 어렵게 만드는 저예산 영화라고 하지만 〈소나티네〉같은 영화도 많은 제작비가 들지는 않은 것 같다.

〈정동진〉을 계기로 독특한 분위기를 추구하는 고집있는 AV가 많이 나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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