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로에선 닷컴] 상. 끝없는 위기설 실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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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 동안 인터넷 관련 솔루션을 개발하느라 자본금을 거의 다 썼다. 오는 9월부터 마케팅에 나서야 하는데 투자하려는 곳이 없다. 이 상태가 계속되면 9, 10월 대란설의 당사자가 될 상황이다. " (A기업 L사장)

"사업 확장을 위해 지난 6월 2차 자금조달을 시도했지만 투자하겠다는 벤처캐피털이 한곳도 없어 실패했다. 이젠 관련 인터넷 기업에서 투자받는 게 유일한 희망이다. " (B기업 W부사장)

테헤란밸리에 짙은 먹구름이 끼고 있다. 특히 서비스와 아이디어만으로 승부하는 순수 인터넷 닷컴 기업의 기상도는 ''먹구름과 폭우'' 다.

자금난에서 비롯된 이들 ''닷컴기업'' 최고경영자(CEO) 들의 위기의식은 심각하다. ''이러다간 망할지도 모른다'' 며 절박함을 호소한다. 온앤오프의 김현 부사장은 "대부분의 벤처캐피털이 인터넷 닷컴 기업엔 투자를 일절 하지 않고 있다" 고 하소연했다.

◇ 꼬리를 무는 위기설

닷컴기업 위기의 일차 원인은 실적부진이다. 본지가 실시한 닷컴기업 CEO 설문조사에서도 조사 대상자의 44.4%가 "실적부진 때문에 자금난이 초래됐다" 고 대답했다.

실제 A사는 올 상반기 중 지난해 상반기와 같은 12억원의 순이익을 냈지만 영업적자는 75억원을 기록했다.물건을 팔거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의 영업활동에서 발생한 적자를 이자수입 등으로 벌충해 이익을 낸 것이다.

B사는 상반기 중 80억원의 매출을 올렸지만 적자 규모가 70억원이나 됐다. C사도 매출 60억원에 적자만 30억원이었다. 이는 돈을 벌 수 있는 이른바 ''수익모델'' 이 없기 때문이다.

다음커뮤니케이션.새롬기술 등 대부분 닷컴기업들의 서비스는 무료 일색이다. 향후 전망 또한 불투명하다는 게 벤처캐피털들의 분석이다.

여기에다 ''벤처불신론'' 도 닷컴위기론을 증폭시킨 요인으로 작용했다. 지난 4월 이후 닷컴위기가 서서히 고개를 들자 그동안 닷컴신화에서 소외됐던 일반기업 직원.서민들을 중심으로 반(反) 벤처 정서가 급속히 확산하면서 위기론이 확대됐다는 분석이다.

한국소프트창업자문 김동렬 대표는 "시장을 투기장으로 만든 일부 벤처기업과 투자자들 때문에 반벤처 정서가 사회적으로 널리 퍼진 게 문제" 라고 지적했다.

◇ 위기냐 조정기냐

현 상황이 닷컴기업들의 영원한 추락이 아닌 재도약을 위한 조정기라는 분석도 적지 않다.

벤처기업협회 장흥순 회장은 "주가가 폭등한 지난 1년간은 과열상태를 보여 ''무늬만 벤처'' 인 기업이 활개치는 부작용이 나타났는데, 지금은 이런 부작용을 치유하는 조정기로 봐야 한다" 고 강조했다.

실제 닷컴위기론에도 불구하고 벤처기업 창업 열기는 식지 않고 있다. 중소기업청에 따르면 지난 5월 말까지 등록된 벤처기업수는 7천1백10개로 지난해 말보다 44.1%나 늘었다.

특히 닷컴위기론이 확산한 4월 이후에도 벤처기업 수는 꾸준히 늘어 4월 5백43개, 5월 5백63개를 기록했다.

전문가들은 ''서비스와 아이디어'' 만 갖고 도전하는 순수 닷컴기업과 달리 통신단말기.장비 등을 생산하는 정보통신 벤처기업들의 성장이 꾸준히 계속되면서 옥석(玉石) 가리기가 본격화하는 것도 눈여겨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정보통신부가 지난 21일 증권거래소와 코스닥에 등록한 1백개 정보통신 벤처기업의 상반기 실적을 조사한 결과 이들 기업의 총매출은 2조4천3백83억원으로 지난해보다 62%나 늘었다. 총 순이익도 1백19% 늘어난 7천2백26억원에 달했다.

베이직기술투자 김양호 사장은 "현재의 위기는 일부 과대평가됐던 닷컴기업들이 조정기를 겪는 것으로, 비온 뒤 땅이 굳어지듯 옥석을 가려 경쟁력을 갖추는 과정" 이라고 진단했다.

◇ 우려되는 악순환

위기의식이 지나치게 확산하는 것을 우려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삼성경제연구소 김정호 박사는 "현 상황은 단순히 거품이 빠지는 조정기의 수준을 넘어 닷컴기업에 대한 투자 분위기가 과도하게 냉각되고 있다" 고 말했다.

요즘같은 자금난이 계속될 경우 ''벤처캐피털의 투자 냉각→인터넷 닷컴기업 도산→인터넷 장비.솔루션업체 도산→정보통신기술(IT) 산업에 투자한 벤처캐피털 도산'' 이라는 악순환이 우려된다는 것이다.

한국인터넷기업협회 이금룡 회장은 " ''시장창출형'' 기업인 닷컴이 무더기로 도산하면 닷컴기업에 납품하는 장비.솔루션업체도 도산하고, 결국 이들 업체에 투자한 벤처캐피털도 무너져 우리나라 IT산업은 물론 경제 전반에 큰 타격을 줄 것" 이라고 말했다.

삼성물산 골든게이트의 문영우 사업부장은 "4월부터 조정기가 시작됐다고 하지만 닷컴기업에 대한 자금시장은 과도하게 냉각된 상태" 라며 "닷컴기업.벤처캐피털.정부가 협력해 특별한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심각한 상황으로 갈 것" 이라고 말했다.

◇ 본격화하는 구조조정

닷컴기업들의 경쟁력 확보를 위한 구조조정도 본격화하고 있다.
본지의 CEO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52.7%가 경영개선을 위해 구조조정을 계획 중이며
50%가 M&A를 할 계획이고
80% 이상이 해외진출을 했거나 추진해 돌파구를 마련하겠다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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