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독일통일은 벌써 21년, 우리는 언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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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

스산한 추위가 몸을 감싸 들며 한 해가 저물어가는 이맘때가 되면 얼어붙은 북한 동포들의 일상(日常)이 걱정되며 분단의 답답한 실상을 통감하게 된다. 분단 66년, 얼마나 긴 세월인가. 아직도 통일로 갈 길은 멀고 험난하게만 느껴질 뿐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패전국인 독일은 동서로, 일제로부터 해방된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되는 민족적 수난이 함께 시작되었다. 그러나 독일에선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329일 만인 90년 10월 3일 분단 45년 만에 통일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마침 한반도에서도 냉전의 종식이란 역사적 전환기를 맞아 잠시나마 남북대화의 물꼬가 트여질 듯 보였지만 이내 극심한 대결구도로 돌아선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행운의 독일’과 ‘불운의 한국’에서 각각 통일업무에 깊게 관계하였던 양국 인사들이 지난달 초 서울에서 모여 각자의 경험을 회고하며 한국통일의 가능성을 점쳐보는 기회를 가졌다. 한국과 독일이 처한 상황과 여건이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독일이 경험했던 통일의 행운이 혹시 우리에게도 찾아올 수 있지 않겠느냐는 소망 어린 논제를 놓고 한·독 간에 솔직한 대화가 이어졌다.

 좋든 나쁘든 기적은 한번 일어날 뿐 반복되지 않는다는 옛말을 무시할 수는 없으나 역사를 돌이켜보면 얼마나 많은 성공과 실패의 패턴이 반복되어 왔는가. 역사의 흐름을 거역하고 역류에 휘둘리게 되면 순식간에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져버렸던 사례는 수천 년의 세계사에서 역력히 보여주었다. 21년 전 독일은 역사의 흐름에 맞추어 예기치 않게 찾아온 기회와 행운을 완벽하게 활용하여 통일을 이루는 데 성공하였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통일을 기다리는 우리는 독일통일의 성공요인 중 특히 다음 세 가지를 되짚어 보며 참고할 필요가 있다.

 첫째, 세계사와 국제정세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통일전략의 방향을 조율한 것이다. 통일 당시 콜 서독총리의 특보였던 텔칙 교수에 따르면, 이미 67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는 유럽의 동서대결을 극복하려면 독일분단 문제의 해결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이를 일관되게 추진한 결과 20여 년 만에 고르바초프의 결단을 계기로 공산진영의 동의를 얻어냄으로써 독일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었음을 강조하였다. 오늘날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는 미국과 중국 사이의 주도권경쟁이 날로 치열해지고 있다. 세계의 새로운 중심부로 부상하는 아시아에서 미국과 중국이 평화협력의 방향으로 함께 전진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반도 문제의 해결이 선결조건임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미국과 중국, 그리고 아시아의 이웃들에게 이것을 설명하고 설득하는 노력은 물론 한국의 몫이다.

 둘째, 동독의 마지막 총리였던 데메지에르 박사는 동독시민들이 소련 영향권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의 도래를 감지하고 통일과 자유와 민주로 향한 집단적 의지를 발휘한 것이 독일 통일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음을 누차 강조하였다. 통일을 위해서는 시민들의 정서와 바람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80년대 말의 동독과 오늘의 북한의 위상이나 형편은 너무나 다르기에 단순한 비유나 추리는 바람직하지 않다. 한 번도 시민문화의 세례를 받지 못한 채 특수한 왕조체제의 독재하에서 반세기 이상을 생활해온 북한동포들의 마음이 통일로 향하여 어떻게 움직일지는 섣불리 예단하기 어렵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북한동포와 우리가 통일로 향한 정서와 희망을 같은 방향과 주파수에서 어울리게 하려면 북한 주민의 어려움과 고뇌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이해를 지금보다 훨씬 높여가야 된다는 것이다.

 셋째, 독일은 통일이란 목표를 큰 소리로 외치기보다는 그로 향한 과정을 조용히 준비하는 데 성공하였다. 통일과 같은 큰 역사적 목표는 떠들수록 성공 가능성이 줄고 조용히 노력할수록 실현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역설적 법칙에 묶여 있는지도 모른다. 독일에선 다행히도 이러한 역설적 상황의 논리에 대하여 광범위한 국민적 합의가 이심전심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되겠다. 동독의 정치적 변화보다도 동독주민의 복지향상을 위한 생활경제의 개혁에 더 큰 관심을 보였던 서독정책이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어떻게든 동독인들을 지구촌의 고아가 되지 않도록 바깥바람을 불어넣는 데 진력한 서독정부와 시민의 끈질긴 노력은 높이 평가되어 마땅하다. 독일통일을 부러워하는 만큼 우리의 준비도 조용히 서둘러야 하겠다.

 추운 겨울이 지나면 따뜻한 봄이 오게 마련, 우리에게도 통일의 행운과 기회는 결국 찾아오지 않겠는가.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