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영화의 현재를 보여주는〈상어가죽 남자와 복숭아 소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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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는 의외로 한산하다. 일본영화 몇 편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화제작도 보이질 않는 것 같다. 각각 원작을 영화로 만든〈소용돌이〉와 〈링〉시리즈가 심야상영으로 인기를 끄는 정도라고 할까?

많이 알려진 작품은 아니지만 올해 부천영화제 출품작 중에 챙겨 볼만한 영화 한편.〈상어가죽 남자와 복숭아 소녀〉라는 제목이다. 이시이 가츠히토가 감독한〈상어가죽 남자와 복숭아 소녀〉는 일본영화의 '현재'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영화다. 스타일과 유머감각이라는 견지에서 말이다.

이시이 가츠히토라는 감독은 특이하다. 원래 CF와 뮤직비디오 연출을 주로 했는데 그중에선 우리에게도 낯익은 퍼피(Puppy)의 뮤직비디오도 포함된다. 극도의 상업성을 추구하는 감독이라는 표현이 그리 어색하지 않을 듯하다. 이시이 감독은 자신의 영화 데뷔작〈상어가죽 남자와 복숭아 소녀〉역시 뭔가 색다른 작품으로 만들어냈다. 만화 원작으로, 여기서 감독은 연출 뿐 아니라 소품 제작, 의상 디자인까지 겸하면서 한편의 '만화' 같은 영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상어가죽 남자와 북숭아 소녀〉의 줄거리는 이렇다. 토시코는 자신이 사귀던 중년 남자로부터 도망친다. 이 와중에 사메하다라는 남자를 만나는데 그는 팬티만 입고 산길을 질주하던 중이다. 토시코의 차에 무단으로 승차한 사메하다는 야쿠자들에게 쫒기고 있는 처지. 두 사람은 어느새 함께 길을 방황하게 된다. 그리고 사메하다를 잡으려는 폭력 조직배들이 뒤를 밟기 시작하는데 야쿠자들도 괴상하다. 자신들이 나름의 패션 감각이 있다고 뽐내는 등 약간 어리숙해 보이는 것. 줄거리만 보면 폭력적인 야쿠자 영화로 보일 법하지만 실상 그렇지도 않다. 야쿠자들의 말장난을 비롯해 코미디 요소가 적지 않으므로. 예를 들어 한 폭력배가 문 건너편에 있는 주인공 사메하다에게 총을 쏜다. 그런데 멀쩡하다. 어찌된 일일까? 방탄문이었다!

일본에서 이시이 가츠히토는 "미국영화의 영향을 일본적 대중문화로 성공적으로 옮겨 놓았다"는 평가를 얻었다. 영화의 도입부만 봐도 이는 여실히 드러난다. 마치 상업 광고물처럼 감각적이고 원색적인 장면들이 오프닝을 장식하고 있다. 한편의 뮤직비디오를 연상케하는 것이다. 영화의 전개도 논리적인 방향을 따르기보다 마치 즉석에서 후다닥 만든 것처럼 속도감 있다.〈상어가죽 남자와 복숭아 소녀〉는 '야쿠자 영화'라는 틀을 취하면서 미국의 대중문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특히 타란티노 감독에게서.〈저수지의 개들〉이나〈펄프 픽션〉처럼〈상어가죽 남자와 복숭아 소녀〉역시 폭력에 경도되어 있지만 어느 면에선 유머감각과 황당함을 겸비한 캐릭터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TV와 광고물, 만화적 기법을 빌어와 마구 뒤섞는 것도 타란티노 감독 등의 미국 감독들에게서 이시이 가츠히토가 고스란히 배워온 것들이다.

일본에서 뮤직비디오 연출자가 영화로 전업하는 경우는 종종 있다. 좋은 예가 국내에도 잘 알려진 이와이 슈운지. 그의〈언두〉나〈스왈로우 테일〉같은 작품들은 영화라기보다 길게 늘어뜨린 뮤직 비디오 한편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이시이 가츠히토의〈상어가죽 남자와 복숭아 소녀〉역시 같은 맥락이다. 여기서 감독이 보여주는 '스타일'에 관한 집착은 놀라울 정도다. 그것에 공감하는 사람이라면 재미를 느끼겠고, 반대로 반감을 가지는 사람에겐 다소 천박하게 느껴지겠지만. 이시이 가츠히토 감독의 〈상어가죽 남자와 복숭아 소녀〉는 일본의 '젊은' 영화인들의 고민과 현주소를 축약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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