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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pecial] 관능적 패션의 대명사, 디자이너 로베르토 카발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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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때기였다. 뭘 물어도 얘기는 ‘여자’로 흘렀다. 패션 철학, 디자인의 영감, 친구까지도 종국은 ‘여자’였다. 패션 디자이너 로베르토 카발리(71). 그는 이처럼 노골적이었다. 지난 41년간 보여준 옷도 다르지 않다. 시종일관 ‘관능과 섹시’를 고집했다. 골반까지 깊게 파인 스커트, 표범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호피무늬 드레스 등을 창조해 내는 것은 그만의 주특기였다. 그래서일까. 인터뷰에서 그는 화려한 수사, 관념적인 용어가 쏟아냈다. 하지만 지금도 귓전에 생생한 말은 “아이 러브 우먼, 아이 러브 섹시 우먼( I love woman, I love sexy woman)”. 1일 일본 도쿄 플래그십스토어 오픈 행사에 참석한 그를 만났다.

도쿄=이도은 기자

카발리는 전형적인 이탈리아 남자였다. 1m70㎝의 다부진 체구와 까무잡잡한 피부, 여기에 화끈하면서도 살가운 태도가 꼭 그랬다. 실내에서도 선글라스를 벗지 않았다. 악수 대신 두 손으로 상대의 손을 감싸더니 손등 위에 가벼운 키스를 했다. ‘젊어 보인다’고 인사를 건네자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콧잔등까지 내렸다. 말없이 뚫어져라 쳐다보는 눈길은 생각보다 강렬했다. 말투도, 몸짓도 그의 옷과 닮아 있었다.

[Getty Images/멀티비츠]

●70대 디자이너의 옷이 굉장히 도발적이다.

 “나는 이 나이에도 여자를 사랑한다. 특히 섹시한 여자! 지금껏 내 인생의 대부분을 독특한 라이프 스타일을 가진 여자들과 얘기하는 데 썼다. 실제 옷을 만들 때도 한 여자를 마음속에 떠올리고, 그를 위해 뭔가 만들고 싶어지면 작업을 시작했다. 나는 여자가 옷 하나로 더 섹시하고 특별하게 변한다고 믿는다. 이것이 내 패션의 철학이자 목적이다.”

●작거나 뚱뚱하거나, 그런 여자들이 옷 하나로 섹시해질 수 있나.

 “물론이다. 내가 말하는 ‘섹시함’이란 말 그대로 성적인 욕망을 일으킨다는 뜻이 아니다. 그저 야한 여자는 지적이지도 않고 자신만의 취향도 없다. 심하게 말하면 저속하고 음탕하다. 때때로 나는 ‘천한 여자를 위해 섹시한 드레스를 만들고 있지 않나’ 하는 두려움을 느낀다. ‘섹시함’이란 단어는 내게 ‘관능적’ ‘감각적’인 그 무엇이다. 개성 넘치면서 묘한 끌림이 있다면 섹시한 여자다.”

●특별히 그런 뮤즈가 있나.

 “그저 길 가다 마주치는 한 여자가 내 뮤즈가 될 수 있다. 내게 다가와 ‘카발리, 난 당신을 흠모해요. 당신의 드레스를 입은 내 모습이 너무 환상적이고 아름다워요’라고 말해주는 여자 말이다. 나는 그런 칭찬에 에너지를 얻고 또다시 새로운 걸 만들어낼 수 있다.”

●모든 여자를 대상으로 둔다니 놀랍다.

 “나는 앞으로 30년은 더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슨 문제인가. 아마도 이건 본능이지 싶다. 나는 여자들을 사랑하고 여자들도 나를 사랑한다.”

엄청난 바람둥이 같은 그는 사실 다섯 남매를 둔 유부남이다. 스물넷에 첫사랑과 결혼해 두 남매를 낳고 이혼했다. 그리고 서른일곱에 두 번째 아내 에바를 만났다. 당시 에바는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 출전한 18살 소녀였고, 카발리는 심사위원이었다. 둘은 대회 1년 뒤 다시 만나 결혼했다. 카발리는 “내가 그녀를 택한 게 아니라 그녀가 나를 찾아왔다”고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영감을 받을 때마다 아내가 질투할 것 같다.

 “글쎄. 아내는 아트 디렉터로 나와 컬렉션을 함께 준비한다. 내 작업 방식을 잘 이해해 주고 또 존중해 준다. 가족이 일과 엮여 있다는 게 물론 쉽진 않지만 서로 최선을 다한다.”

●동성애자가 많은 패션계에서 유부남인 당신이 오히려 튄다.

 “나도 안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동성애자들이 여자를 위한 옷을 만들 수 있는지 모르겠다. 여자를 이해하는 게 아니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남자 입장에서 언제 여자가 가장 아름다워 보일 수 있을지 완벽히 알고 있다. 그것이 내가 작품을 하는 시작점이다.”

고집은 때론 시련이 된다. 그에겐 1980년대가 그랬다. 절제되고 단순한 미니멀리즘이 패션계를 뒤흔들던 시기였다. 화려하고 여성스러운 그의 옷은 외면당했다. 브랜드를 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아내는 남편 사업을 되살리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1990년대가 되자 반전이 시작됐다. 청바지에 프린트를 찍은 두 번째 라인 ‘저스트 카발리’가 성공을 거뒀고, 이에 힘입어 94년 밀라노 패션위크에도 입성했다. 이때 고유의 뱀피·얼룩말 무늬를 전 세계에 알리는 발판을 마련했다.

●유행하던 미니멀리즘을 왜 거부했나.

 “난 미니멀리즘을 이해하고 싶지 않다. 왜 여자들만이 지닌 섬세함·화려함을 두고 남성적인 이미지를 좇아야 하나. 여성성을 잃어버린 여자는 모든 것을 잃은 여자다.”

●브랜드까지 포기할 정도였는데.

 “나는 당시 일본 스타일에 오히려 심취했다. 굉장히 건축적인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프라다 같은 미니멀리즘을 넘어선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제대로 해낼 자신이 없었다. 더 이상 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대중적인 청바지로 재기의 기반을 마련한 셈인데.

 “꼭 성공을 바란 건 아니었다. 다만 창작을 위해 필요한 만큼의 돈을 벌겠다는 약간의 야망은 있었다. 나는 패션을 세탁기처럼 팔고 싶지 않았다.”

 이후 카발리는 지금까지 순항하고 있다. 1999년 뉴욕 명품거리 매디슨 애비뉴에 매장을 연 뒤 5년 만에 미국에서만 1억5000만 달러의 매출을 기록하기도 했다. 카페·디스코테크·보드카 등 로베르토 카발리의 이름을 단 라이선스 상품들이 줄줄이 생겨났다. 현재 전 세계 매장은 68개로 늘어났고, 도쿄에 아시아 첫 플래그십 스토어를 냈다.

●당신과 같은 70대 디자이너들이 제법 있다. 경쟁 상대가 있나.

 “전혀. 조르조 아르마니는 좋은 친구지만 그는 미니멀리스트라 나와 완전히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카를 라거펠트는? 음, 그는 늙었지 않나. 나보다 무려 두 살이나 많다. 어쨌든 나는 그들에 비해 젊다고 자부한다. 나는 아직도 디스코테크에 가는 젊은 여자를 보면 설레고, 춤추고 노래하는 걸 좋아한다. 트럼펫도 분다. 나는 나이를 먹지 않는다. 날 믿어라.”

●육체적으로 젊다는 건 아닐 듯싶다.

 “내 마음이 젊다. 정치나 관습에는 보수적이지만 꿈을 꾸기에 젊다. 내가 비록 밀라노·피렌체에 있어도 상상은 전 세계에서 펼쳐진다. 게다가 나는 진짜 젊은 남자들보다 매우 정중하다. 그들은 어떻게 정중해야 할지, 어떻게 여자를 대접해야 할지 모르지 않나.”

●하루 일과는.

 “보통 오전 10시쯤 일어난다. 오후 1시쯤 사무실로 가 여성복·남성복·액세서리 등 부문별로 체크한다. 퇴근은 보통 오후 8시다. 먹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저녁을 안 먹을 때가 많다. 밤에는 주로 컴퓨터를 켜고 새로운 사진을 찾아 나선다. 아, 나는 요즘 내 일생을 담은 자서전을 쓴다. 제목은 『나의 모험(My Adventure)』이라고 지으려 한다. 내 인생이 딱 그러니까.”

●원로 디자이너로서 패션계 변화를 꼽는다면.

 “딱 하나만 말하겠다. 1971년, 나는 굉장히 유명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로베트로 카발리라는 이름보다 내가 만든 옷을 주목했다. 누가 카발리 재킷을 샀다고 치자. 그는 너무 맘에 들어서 친구가 입는 것이 달갑지 않다. 그래서 누구 옷인지 알아챌까 봐 슬쩍 레이블을 떼어버린다. 결국 소수만 어디서 그 옷을 살 수 있는지 공유한다. 하지만 80년대가 되면서 달라졌다. 조르조 아르마니. 이게 다 아르마니 때문이다. 스타들을 내세워 자기 이름을 알리기에 바빴다. 패션을 마치 수퍼마켓처럼 산업화했다. 예전 컬렉션은 예술 작품을 창조해 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르마니는 패션을 파스타처럼 만들었다. 그냥 주문하면 비슷비슷하게 나오는 거다.”

●혹시 은퇴를 생각해 보진 않았나.

 “아직은 아니다. 나를 감동시키는 아주 사소한 것, 내 머리와 내 인생을 흔드는 아주 작은 것이라도 있다면 나는 물러서지 않는다.”

‘프린트의 대가’ 카발리

“동물 무늬라고 같지 않다
내 디자인은 따라 할 수 없다 ”

카발리는 프린트의 대가다. 19세기 인상파 화가 주세페 로시(Guiseppe Rossi)의 외손자인 데다 예술 아카데미에서 회화까지 공부한 그가 패션계에 입문한 것도 프린트 때문이었다. 우연히 친구의 부탁으로 스웨터의 프린트를 만들었다가 대박을 낸 것. 이후 디자이너 브랜드 ‘마리오 발렌티노’에서 일하면서도 가죽·스웨이드 위에 프린트를 찍어내는 기술로 이름을 날렸다. 특히 동물 프린트는 그의 시그니처나 다름없다. 뱀·얼룩말·호랑이 등의 무늬가 컬렉션마다 빠지지 않는다.

●왜 동물 프린트를 고집하나.

 “엄격히 말해 동물이 아니라 자연 프린트다. 자연만큼 환상적인 색깔과 무늬를 타고난 것은 없다. 비단 표범·얼룩말만도 아니다. 집에 제법 큰 수족관을 두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그 안의 물고기 무늬가 기린 무늬랑 똑같다. 신은 최고의 디자이너다. 어쨌거나 이런 이유로 나는 지난 20년간 내 스타일을 자연에서 찾아왔다.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그때마다 아름다운 동식물을 카메라에 담는다(그는 최근 사진에 빠져 집에 스튜디오 별채를 따로 마련했다). 뭣보다 중요한 건 여자들이 이런 디자인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야성적인 표범이나 호랑이처럼 고양이과 동물들을 사랑하고 매력을 느낀다.”

●하지만 남자들은 싫어하지 않나.

 “그저 순한 여자만 좋아하는 남자들이 그렇다. 나는 동물 프린트를 입은, 특별해 보이는 여자가 좋다.”

●동물 애호가들의 비난을 받진 않나.

 “그들이 난리 치는 건 모피 아닌가. 나도 뭐 모피를 약간 쓰긴 하지만, 코트를 만들진 않는다. 어쨌든 동물 애호가들을 이해한다. 하지만 때때로 그렇다면 고기도 먹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모피에 해당하는 동물이 아니라 모든 동물을 그렇게 보호해야 한다는 게 아닌가 싶다.”

●동물 프린트는 너무 쉽게 복제된다.

 “절대 아니다. 내가 캐나다에 가서 ‘핫팔루자’라는 이름의 말을 봤다고 치자. 그리고 그 가죽의 무늬를 카메라에 담아온다. 그런데 어느 날 피렌체 어시장에 가서 비슷한 무늬의 물고기를 발견한다. 나는 이 둘을 결합해 디자인한다. 아주 세밀한 프린트로 말이다. 이를 보고 다른 디자이너들이 비슷하게 따라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들은 절대 모른다. 내 프린트에는 비늘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어디에서 내 디자인이 나왔는지 모른다면 절대 복제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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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론 스톤, 제니퍼 로페즈, 레니 크라비츠 … 카발리의 절친들

카발리의 의상을 입은 스타들. 드류 베리모어, 비욘세, 니콜 리치, 샤론 스톤, 빅토리아 베컴(맨 윗줄 왼쪽부터), 기네스 팰트로, 제이드 제거, 클로디르 쿠로(둘째줄 왼쪽부터), 스파이스 걸스, 할 베리(셋째줄 왼쪽부터), 공리, 카발리의 아내 에바(마지막 줄 가운데).

카발리는 세계적 스타들과 친분이 두텁기로 유명하다. 옷을 입혀주고 브랜드를 알리는 ‘스타 마케팅’ 수준이 아니다. 그는 피렌체 외곽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 종종 스타들을 불러 만찬을 벌이곤 한다. 그 때문에 그의 주변에는 옷만큼이나 요란한 루머들이 생겨나기도 한다. 카발리는 “스타들 자체가 내겐 아드레날린”이라고도 말한다. 자신의 옷을 가장 빛내줄 수 있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스타들 중에서도 진짜 ‘절친’은 그와 남다른 시간을 보낸다. 카발리가 사들인 길이 40m짜리 초호화 요트를 타고 지중해를 누빈다. 샤론 스톤은 매해 여름마다 카발리와 부부동반 요트 여행을 떠난다. 카발리는 “스톤은 내가 좋아하는 여성상 그 자체다. 똑똑하고 또 굉장히 개성이 강한 여자다. 무엇보다 자기가 뭘 원하는지 언제나 알고 있다”며 극찬했다. 지난해엔 베컴 부부, 제니퍼 로페즈와도 요트 여행을 즐겼다. 로페즈의 경우 이혼 전 남편 마크 앤서니와 쌍둥이 애들까지 함께한 여행이라 더욱 기억에 남는단다. 로페즈와의 인연에 대해선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그의 의상을 만들어 줄 땐 하나의 디자인에 두 가지 버전의 옷을 준비했다. 공식 행사와 공연을 위해 하나는 여성스럽고 길게, 다른 하나는 짧은 드레스였다. 순간마다 섹시할 수 있는 옷은 다르기 때문이었다.”

 카발리는 가수 레니 크라비츠도 돈독한 관계로 꼽았다. 재작년 그와 함께 뉴욕·마이애미·로스앤젤레스 등을 여행했다. “아 그리고 참, 할 베리도 있는데… 너무 많아서 이건 곧 나올 자서전을 봐줬으면 좋겠다. 하하.”

“일흔한 살, 여전히 섹시한 여자가 좋다
여성들도 나를 사랑한다 ”

What Matters Most?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당연히 가족이다. 언젠가 내가 세상에 없더라도 나는 그들을 통해 계속 살아 있음을 느낄 것이다. 내 사랑·열정·패션이 이미 그들에게 전해져 있기 때문이다. 현재 10대인 막내를 뺀 아들·딸들이 나와 함께한다. 둘은 남성복·액세서리 디자인을 총괄하고, 다른 둘은 카발리 클럽과 주류사업을 각각 맡고 있다. 가족을 통해 내 옷이, 내 인생이 결코 평범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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