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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Biz] 교황부터 레이디 가가까지 옷 입힌 남자, 디자이너 카스텔바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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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면

고(故)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가수 레이디 가가. 이 둘을 관통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패션 디자이너 장샤를 드 카스텔바작(Jean-Charles de Castelbajac·62)이다. 교황에게 무지갯빛 사제복을 만들어 준 이도, 세계 최고 가수에게 요상한 무대 의상을 입힌 사람도 바로 그다. 의상 컨셉트가 헷갈리기 마련인데 종잡을 수 없는 건 또 있다. 커튼·대걸레·타월·펠트까지, 그는 무엇이든 옷으로 변신시켰다. 앤디 워홀, 키스 헤링 등 팝아트 예술가들과의 협업도 즐겼다. 44년 차 원로인 그가 ‘어디로 튈지 모를 괴짜’ 소리를 듣는 이유도 그래서다. 최근 행보 역시 예상을 넘어선다. 올 9월 한국 캐주얼스포츠 브랜드 EXR에 브랜드를 팔았다. 언뜻 봐선 어울리지 않는 조합. 하지만 그는 힘주어 말한다. “어렵고 비싼 옷을 거부하라. 누구나 대중화된 옷으로 민주주의를 이루자.” 한계 없는 ‘패션 혁명’을 꿈꾸는 그의 얘기를 들어봤다.

글=이도은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jokepark@joonang.co.kr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됐다.

 “지난 3월 EXR 민복기 사장이 파리 컬렉션을 보러 왔다. 나는 그때 투자자를 찾고 있던 참이었다. 그는 내 패션쇼를 굉장히 만족스러워하면서 브랜드 인수를 원했다. 한국에서 내 이름은 골프 의류로나 알려져 있었는데 말이다. 그는 후에 나의 1만 벌이 넘는 아카이브를 보고 ‘계속 글로벌 아티스트 디렉터로 일해 달라’고 요청했다.”

●프랑스 혹은 유럽 회사에서 먼저 탐냈을 것 같다.

 “물론 그 전에 프랑스 회사 두 곳에서도 입질이 있었다. 하지만 돈을 얼마나 주느냐보다 나를 동반자로 이해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보통 브랜드 인수자는 상표권만 가져가고 디자이너나 그 가족들을 내보내면서 모든 걸 바꾸지 않나. 민 사장은 내 가족사에도 관심이 많았다. 카스텔바작이 단순한 브랜드가 아닌 가치 있는 가문의 전통이라는 걸 이해해줬다.”

 그는 귀족 가문의 후예다. 할아버지까지 4대에 걸쳐 군인을 배출했다. 집안은 성이 세 채, 전용열차를 갖고 있을 정도로 부유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경마에 빠지면서 가문이 몰락했다. 맏아들이었던 아버지는 모든 빚을 떠안았다. 그는 모로코로 건너가 궁정에서 피아노 치는 일을 했다. 결혼도 했고 아들도 낳았다. 어린 카스텔바작은 전통에 따라 귀족의 코스를 밟았다. 부모와 떨어져 다섯 살 때부터 프랑스 니스에 있는 기숙학교에서 생활했다. 할아버지가 다녔던 예비사관학교였다. 교칙과 체벌이 엄해 적응이 힘들었다. 12살에 옮긴 기숙학교는 최악이었다. 독재 치하가 따로 없었다. 결국 불을 지르고 17살에 졸업장을 받지 못하고 떠나야 했다.

●불을 질렀다니 무슨 얘기인가.

 “건물을 태웠다거나 한 건 아니고 소동에 그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을 만큼 엄격한 집단생활이 싫었다. 기숙학교에선 매일 오전 5시만 되면 기상을 알리는 포탄이 터졌다. 그 시간에 전체 조례를 했다. 벌을 받을 땐 2시간씩 무릎을 꿇었다. 대여섯 살 꼬마에게 장난감 하나가 없었다. 외로웠다. 종이비행기가 헬리콥터가 되는 상상, 배를 타고 아마존 강을 떠다니는 꿈을 꿨다. 군인은 내 길이 아니었다. 오히려 배우나 가수가 되고 싶었다.”

●군사학교 생도 출신이 어떻게 디자이너가 됐나.

 “학교를 나와 원단회사를 꾸리던 어머니에게로 돌아갔다. 처음엔 디자이너가 될 생각이 없었다. 공장에서 천 냄새나 맡고 다니는 한량처럼 지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이젠 디자인 스케치도 좀 해보지 않겠니’라는 말을 꺼냈다. 재미 삼아 그림을 그렸는데 의외로 나를 매혹시켰다. 순간적으로 분노가 표출되는 듯했다. 패션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던 내가 1968년 첫 번째 컬렉션을 만들었다.”

1997년 ‘세계 기독 청년의 날’ 행사에선 교황 및 신부 5000여 명에게 무지갯빛 사제복을 입혔다.

●어떤 옷이었나.

 “카키색 군복에서 영감을 얻어 플라스틱 풀과 체리로 재킷을 만들었다. 감자를 담아놓는 부대나 수술대에서 쓰는 의료용 실 등도 썼다. 나는 패션으로 혁명을 하고 싶었다. 패션에 불을 지르려 했다. 당시 유행은 너무 여성적이고, 좋은 가문의 처자들이 예쁘게 보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나는 사람들의 분노를 표현할 수 있는 패션을 하고 싶었다. 옷이 꼭 예쁠 필요는 없었다. 일종의 테라피, 영혼의 치료라고 생각했다. 내게 패션은 전투였다.”

 그는 1970~80년대 내내 ‘화제가 되는 옷’을 만들었다. 군인들의 전유물로만 여겼던 카무플라주 패턴을 드레스에 응용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는가 하면, 장난감을 빼앗겼던 유년 시절을 그리워하듯 테디 베어를 40개 이어 붙인 코트를 만들었다. 패션의 트렌드를 거부한 ‘키치 예술’ 그 자체였다. 전위적인 옷만 만든 건 아니었다. 다른 한편에선 대중문화와 결합한 팝아트를 옷과 결합시켰다. 캠벨 통조림부터 스누피·미키마우스·팅커벨 등 만화 캐릭터를 프린트한 티셔츠를 만들었다. 그는 이를 두고 “뭔가 비트는 듯한 메시지를 유머를 담아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쉽게 입을 수 있는 옷은 아니었다.

 “나는 유행을 좇지 않았다. 그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뿐이었다. 디자이너 인생 44년 중에 ‘팔리는 옷’을 생각한 건 불과 10년 전부터다. 사람들은 나를 두고 ‘아름다운 패배자’라고 불렀다. 특히 1990년대엔 프라다·헬무트랭·질샌더 등 지극히 단정한 옷을 만드는 브랜드로만 돈이 흘러갔다.”

●그래도 누군가는 사야 할 것 아닌가.

"뜻밖의 팬들이 있었다. 90년대 힙합 그룹들이었다. 빨강·파랑으로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스웨터들을 그들은 특이하다고 좋아했다. LL Cool J(미국의 유명 힙합가수)는 내 옷을 보고 ‘옛 기사들의 갑옷과 같이 상징적인 옷’이라고 했다. 원색의 강렬함이 전투에서나 볼 수 있다는 얘기였다. Jay-Z(미국의 유명 힙합래퍼)는 내 옷을 150벌이나 모으고 있었다. 힙합은 내가 전혀 모르는 음악인데 놀랐다. 봐라. (아이폰으로 들어온 메일을 보여주며) 지금도 LA의 힙합 밴드 하나가 옷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그렇다면 힙합과 전혀 상관없는 교황은 어떻게 당신의 옷을 입게 됐나.

 “얘기가 길다. 우리 가문은 천주교를 믿는다. 92년 어느 날 사촌이 찾아와 제안을 했다. 재소자들에게 미사를 여는 신부에게 옷을 만들어 주자는 얘기였다. 딱딱한 그의 인상 때문에 아무도 그 사람에게 예배를 보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투명한 천에 하얀색·초록색·파란색·빨간색 십자가를 그려 넣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신부가 색깔이 들어간 옷을 입는다는 소문이 나면서 재소자들이 미사를 찾았다. 이 이야기를 나중에 교황의 가장 친한 친구가 들어 교황에게 전했다고 한다. 97년 바티칸 비서실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파리에서 열리는 ‘세계 기독 청년의 날’ 행사에 예술감독을 맡아달라는 요청이었다. 신자 100만 명을 위한 옷도 디자인해 달라고 했다. 고민하다가 무지개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복음서에 보면 노아의 홍수가 지난 다음 하나님과 사람들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이다. 신부 5000명에게는 무지개색 중 주황·파랑 등 몇 가지 색만 줄무늬를 넣고, 추기경 옷에는 색깔을 더 집어넣었다. 마지막으로 교황에게는 모든 색깔을 합한 색깔로 유일화를 상징했다. 추기경과 똑같은 색깔로 100만 명 청년들에게 똑같이 티셔츠를 만들어 줬다.”

●패션쇼를 할 때와는 달랐을 것 같다.

 “당시 날짜까지 또렷이 기억한다. 8월 24일, 나는 ‘내 인생이 바뀌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내 창작력이 사람들을 운집시킬 수 있구나, 깨닫고는 소름이 돋았다. 다음 날 교황을 만나러 갔더니 교황이 손을 내밀어주고 묵주를 건넸다. 그리고 조용히 한마디를 남겼다. ‘당신은 신념과 희망의 시멘트를 만들어 냈습니다. 색깔들을 신념과 희망의 시멘트로 썼습니다’라고 말이다. 이 순간부터 나는 패션이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가수 레이디 가가는 카스텔바작의 청개구리 인형이 잔뜩 달린 코트를 TV 토크쇼에 입고 나와 화제를 모았다

●이후 레이디 가가가 당신 옷을 입은 것도 화제였다. 스타 마케팅인가.

 “전혀. 나는 레드카펫에서 배우들에게 드레스를 입히는 일도 하지 않았다. 레이디 가가와 인연을 맺은 건 2006년 빅토리아 앨버트 뮤지엄에서 열렸던 회고전 덕분이다. 당시 관객 7만 명이 몰렸다. 날 모르던 젊은이들도 내 작품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됐다. 그중 레이디 가가의 스타일리스트도 있었다. 그는 전시를 본 뒤 레이디 가가의 노래 ‘텔레폰(telephone)’ 뮤직 비디오 의상을 부탁했다. ”

●당신의 과거는 종잡을 수 없다.

 “한마디로 ‘언더그라운드’ 디자이너였다. 내게 패션은 뭔가 느끼고 소통할 수 있는 예술이다. 나는 80년대부터 패션에 음악과 미술을 접목했다. 당시 사람들은 나를 보고 미쳤다고 했지만 요즘 디자이너들은 죄다 협업을 하고 있다. 백화점조차 쇼윈도·매장을 마치 예술작품처럼 꾸미지 않나. 지금 세대가 나와 더 맞았던 거다. 시간이 나를 따라잡았다.”

●유행과 거리가 멀었던 당신이 캐주얼 업체와 손잡은 것이 놀랍다.

 “요즘 젊은이들은 우울하다. 우리 때만 해도 10, 20대는 유토피아를 꿈꿨다. 달나라로 여행 가고 레드 제플린과 언젠가 기타 연주를 하겠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현재도 미래도 캄캄하기만 하다. 이럴 때 패션이 최소한의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위트 있는 옷 한 벌, 창의력을 불어넣는 디자인이 나와야 한다. 물론 비싸면 그들이 즐길 수 없다. 누구나 지성과 감성을 담은 옷을 부담 없이 입을 수 있는 ‘패션의 민주주의’를 이루고 싶다. 내가 교황과 레이디 가가의 옷을 만든 것 역시 그걸 보고 즐길 수 있는 젊은이들을 위해서였다.”

●구체적으로 어떤 옷을 만들 생각인가.

 “한마디로 프랑스식 프레피룩(미국 명문 사립학교 교복을 본뜬 옷)이다. 프랑스 역사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가문의 깃발·문장 등을 활용해 보려 한다. 전통적 상징들을 현대적으로 푸는 작업이 될 것이다.”

●아직도 당신에게 ‘혁명’이 남아 있나.

 “벌써 기운이 느껴지나. 하하. 젊은이들을 위한 문화복합공간을 만들고 싶다. 그들만을 위한 놀이공원이다. 상상력을 발휘해 사람들 눈이 번쩍 뜨일 수 있는 곳 말이다. 사회적 압박에 짓눌려 잠자고 있는 젊은이들의 감각들을 일깨우고 싶다. 나는 또다시 패션계의 ‘트러블 메이커(trouble maker)’가 될 것이다.”

j 칵테일 >> “신라는 힘·아름다움 함께 가졌던 나라 ”

카스텔바작은 20년 전부터 열 번쯤 한국을 찾았다. 관광지나 한식 정도나 익숙할 줄 알았는데 관심이 예상을 뛰어넘었다. 한국 패션을 평해 달라는 질문에 역사 지식을 자랑했다. 대뜸 “신라 왕국을 떠오르게 한다”며 “다른 아시아 나라들과 달리 트렌드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창의적으로 소화하는 게 놀랍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신라를 알고 있나.

 “물론이다. 예술을 사랑한 나라 아니었나. 그러면서도 당나라와 연합해 삼국을 통일할 정도로 정복의 힘을 지닌 국가였다. 에너지와 아름다움을 동시에 갖췄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어떻게 한국사를 알게 됐나.

 “나의 상상력은 언제나 역사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과거를 공부해야 한다.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도 그렇지만 한국에 올 때도 역사부터 공부했다. 그것이 내가 한 나라를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예전엔 책을 찾았지만 최근엔 위키피디아에서 정보를 얻는다. 몇 시간씩 보는 게 지겹지 않다.”

●신라 말고 관심을 갖는 한국사가 있나.

 “시대보다 인물이다. 이순신 장군이다. 그는 똑똑한 지략이 있었기에 훨씬 강한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 어떻게 악조건을 이기고 거북선 3척으로 일본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기원전 217년 로마군과 전투를 벌였던 한니발 장군에 비견될 만하다.”

●역사 공부가 디자인에 도움이 될까.

 “적어도 내겐 그렇다. 100벌의 옷이 있다면 그 속에 100개의 스토리가 담겨 있다. 내가 한국에 새로 선보일 옷들도 역사를 품을 것이다.”

카스텔바작의 2009년 가을·겨울 파리 컬렉션. 유머가 풍부하고 상상력 넘치는 특유의 디자인을 선보였다.

What Matters Most?

●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

“뭔가 표현하려는 행위, 그 자체다. 나는 찰나의 느낌부터 오래된 가치관까지 인생의 순간 순간마다 그것을 모두 드러내고 싶다. 꼭 패션쇼를 말하는 게 아니다. 음악일 수도, 유머러스한 말 한마디일 수도 있다. 그리고 능란하게 보여주고 전달하는 게 내 재능이라 여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여기에 공유하고 참여하는 순간 나는 가장 행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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