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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381> 선거 포스터의 정치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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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3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통령선거에 가장 많이 출마했던 정치인 중 한 명입니다. 1971년 7대 대선에서 신민당 후보로 나섰던 그는 13대(87년)·14대(92년) ·15대(97년) 대선에 연거푸 도전했습니다. 71년의 선거포스터엔 청년처럼 보이던 정치인이 26년 뒤 포스터엔 노정객(老政客)으로 변해 있습니다. 요즘 들어 인터넷 선거전이 대세라지만 그래도 포스터로 벽을 도배하던 ‘풍습’이 바뀔 것 같진 않습니다. 선거 포스터 속의 사람들은 거의 모두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꺼풀 뒤엔 ‘저에게 한 표를…’이란 절박함이 숨어 있는 미소입니다.

조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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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첫 총선포스터엔 막대기로 기호 표시

우리나라에서 첫 국회의원 총선거는 48년 5월 10일 치러졌습니다. 헌법을 만들 초대 국회의원(제헌의원)을 뽑는 선거였습니다. 성별 구분 없이 선거인으로 등록을 한 21세 이상 성인이면 누구나 투표에 참여할 수 있었던 첫 선거였습니다. 제헌의원 198명을 뽑았는데 출마한 사람은 1000명에 가까웠습니다.

선거포스터는 10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을 알리기 위해 5·10 선거부터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포스터는 지금의 선거 벽보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포스터의 규격을 제한하는 별다른 규정이 없다 보니 크기나 모양이 제각각이었습니다. 특히 문맹률이 80%에 가깝다 보니 후보자의 기호는 숫자가 아닌 막대기로 표시됐습니다. 1번이면 ‘I’, 2번이면 ‘II’로 말이죠. 로마숫자 표기법이 아니었습니다. 예컨대 ‘5’를 ‘IV’가 아니라 ‘IIIII’로 표기했으니까요.

후보 얼굴을 사진이 아닌 그림으로 묘사한 포스터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약 813만 명의 유권자 중 784만 명이 선거인 등록을 했고, 그중 748만 명(92%)이 투표에 참여했으니 포스터의 기여도가 적지 않았던 셈입니다. 글과 숫자를 읽을 줄 모르는 국민이 많았던 탓에 막대기 기호 표시는 그 후로도 오랜 기간 계속됩니다. 67년 6대 대선에 출마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선거포스터에도 6번이란 숫자 위에 ‘IIIIII’이란 기호가 덧붙여 있답니다. 경쟁자로 나선 윤보선 후보의 이름 위에도 ‘III’이란 기호가 빨간색으로 크게 표시돼 있지요.

단순히 후보의 얼굴과 이름·기호·이력을 알리는 데 그치던 선거포스터에 56년 3대 정·부통령 선거에서부턴 ‘슬로건’이 실리게 됩니다. 민주당 신익희 대통령 후보와 장면 부통령 후보의 선거포스터엔 유명한 ‘못 살겠다. 갈아 보자’란 글귀가 새겨졌습니다. 요즘 말로는 ‘이승만 정권 심판론’에 해당되는 문구였습니다. 신익희 후보는 대통령 선거를 불과 열흘 앞둔 그해 5월 5일 지방유세를 위해 기차를 타고 가다 열차 안에서 뇌출혈로 갑작스럽게 사망했습니다. 6대 대선에 선보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포스터는 큰 얼굴사진과 이름·기호·소속 정당이 두드러진 ‘심플한’ 것이었습니다. 현직 대통령으로서 자신감을 드러내 보인 것이라 할까요. 그러나 다음 대통령부터는 각각 포스터에 자신의 비전을 한마디로 압축해 담기 시작합니다. 87년 대선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은 ‘이제는 안정입니다’를, 92년 대선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신한국 창조’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새로운 대한민국’을 제시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은 선거 당시 어려운 경제상황을 반영해 ‘경제’란 단어를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각각 포스터에 ‘경제를 살립시다’(김대중), ‘실천하는 경제대통령’(이명박)이란 문구를 삽입한 것이죠. 역대 어느 대통령의 슬로건이나 열 글자가 채 안 되는 짧은 글귀였습니다만, 하나같이 당대의 내로라하는 선거 참모들이 장막 안에서 머리를 짜낸 ‘전략상품’들이었습니다. 그런 소중한 결과물들이 실리는 곳이 바로 선거포스터인 것이죠.

파격 중의 파격 … 얼굴 없는 포스터도 등장

상식을 깬 재미있는 선거포스터도 많습니다. 92년 치러진 14대 대선에선 김옥선 후보가 무소속 기호 7번으로 출마했습니다. 당시 선거포스터는 유권자들을 꽤 헷갈리게 했지요. 포스터 속의 김 후보가 남장차림이었기 때문입니다. ‘남장 여자’ 정치인으로 유명했던 김 후보는 선거포스터에도 자신의 개성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15대 총선(96년)에서 대구남구에 도전장을 던진 무당파국민연합 소속 성만현 후보는 포스터에서 얼굴 사진을 과감히 뺐습니다. 대신 ‘남구여! 내 입술로 정의의 노래를 크게 부르도록 해주소서’란 감성 넘치는 문구로 포스터를 채웠습니다. ‘얼굴 없는 포스터’는 선거포스터 치곤 파격 중의 파격이었습니다만 성 후보를 당선시켜 주지까진 못했습니다. 성 후보는 2669표(득표율 2.8%)를 얻으며 11명의 후보 중 6위에 그쳤지요. 1회 지방선거(95년)에서 울산시의원에 출마했던 무소속 이창호 후보는 선거포스터를 아예 ‘녹색 경고문’으로 대체했습니다. 자신이 당선되면 ‘교통이 너무 좋아질 것이므로 조심하십시오’라고 호기롭게 외치지요. 16대 대선(2002년) 당시 호국당 소속 기호 6번으로 출마했던 김길수 후보의 선거 포스터에 적힌 문구는 ‘불심으로 대동단결’이었습니다. ‘○○으로 대동단결’이란 표현은 한 때 젊은 층 사이에 유행어로 인기를 끌기도 했지요.

4회(2006년) 지방선거에서 서대문구의원 선거에 나섰던 한나라당 이기돈 후보는 얼굴 부분을 백지로 하고 물음표를 크게 그려놓는 파격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얼굴을 완전히 빼지는 않았습니다. 포스터에 적힌 이름 위에 조그맣게 얼굴을 올려놓은 것이죠. 2008년 18대 총선에서 강남갑에 출마했던 기호 8번 무소속 김원종 후보는 나비 넥타이에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선거포스터에 등장합니다. 젊은이다운 기발함을 포스터에 담은 것이지요.

지난해 6월 지방선거에서 얼굴 없는 포스터가 다시 등장합니다. 후보자 얼굴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신비주의 컨셉트’이자 차별화 전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충북 옥천군의원에 출마한 무소속 오한흥 후보는 아예 얼굴 대신 효자손을 커다랗게 선거포스터에 넣었습니다. 주민들의 답답하고 가려운 부분을 효자손으로 시원하게 긁어 드리겠다는 문구와 함께 말입니다.

그러나 ‘튀는 포스터’와 선거 성적표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음표 포스터’를 만든 이기돈 후보 말고는 거의 한 자릿수 득표율에 그치며 선거에서 패했으니까요. 이기돈 후보는 당시 6078표(16.6%)를 얻어 당선됐습니다.

총선 포스터, 50㎝의 정치

얼굴 없는 포스터까지 등장했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포스터를 만들어도 되는 건 아닙니다. 선거포스터의 제작 규정은 꽤 까다롭습니다.

‘공직선거법’과 ‘공직선거관리규칙’에 따르면 선거포스터에 담기는 내용은 후보자의 ▶사진 ▶성명 ▶기호 ▶소속 정당명 ▶경력 등입니다. 홍보할 만한 정책이나 정강도 표기할 순 있으나 허위 사실을 선거벽보에 실었다가는 ‘허위사실 공표죄’에 해당해 5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집니다. 당선이 무효가 될 수 있는 무거운 처벌이지요. 경쟁자를 낙선시키려고 거짓을 선거포스터 등으로 알리면 더 무거운 벌을 받습니다. 문제의 선전물을 배포하거나, 배포할 목적으로 가지고만 있어도 7년 이하의 징역, 500만원 이상 3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습니다. 선거포스터를 붙이기로 한 곳의 소유인이나 관리자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벽보를 부착하는 데 협조해야 한다고 선거법은 정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선거에서 선거벽보의 크기는 가로 52㎝, 세로 76㎝여야 합니다.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 지방의회 의원 선거에선 그보다 작은 가로 38㎝, 세로 53㎝입니다. 50㎝ 안팎의 씨줄·날줄 안에 자신의 인생을 열 글자 이내로 담아내는 게 바로 ‘포스터의 정치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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