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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B] 명예의 전당 (4) - 놀란 라이언

중앙일보

입력

놀란 라이언처럼 함부로 평가하기 어려운 선수도 드물다. 그는 야구 역사상 가장 많은 탈삼진을 기록하였으며, 역시 역사상 최다인 7회의 노히트 노런과 월터 존슨 다음으로 많은 11회의 탈삼진왕 등극 등 믿기 힘든 기록을 남겼다. 또한 그는 피안타율이 가장 낮았던 투수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컨트롤이라는 측면에서는 수준 이하였으며, 역대 투수 중 사사구 부문에서 압도적인 차이로 1위에 올랐다. 또한 그는 항상 승률이 좋지 않아 사이영상을 수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러한 만큼 라이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릴 수밖에 없다. 선수의 화려함에 끌리는 팬들은 그를 역사상 최고의 투수로 꼽기도 하지만, 투수로서 갖추어야 할 여러 가지 요소 간의 균형을 중시하는 전문가들은 그가 역대 투수 중 열 손가락 안에 꼽힐 만한 인물인지에 대해서조차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투수라는 점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라이언은 텍사스에서 6명의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야구를 하며 자랐으며, 고교 시절부터 강속구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컨트롤이라는 측면에서는 항상 문제를 드러냈다.

1965년 역사상 처음으로 아마추어 드래프트가 실시되었고, 당시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에 전체 1순위로 지명된 릭 먼데이를 필두로 수백 명의 선수가 드래프트를 통해 각 팀에 입단하였다.

고교 시절 그리 명성을 얻지 못했던 라이언은 드래프트 탈락의 위기에 있었으나, 신생팀 뉴욕 메츠의 스카우트 레드 머프는 그의 빠른 볼을 보고 팀에 그를 선발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라이언은 전체 295순위로 간신히 프로 세계에 발을 내디뎠다.

라이언은 메츠 산하의 마이너 리그 팀들인 매리언과 그린빌, 윌리엄스포트 등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으며 ,특히 그린빌에서는 놀라운 기세를 보였다. 그러나 컨트롤은 항상 문제로 지적되었다.

1966년 처음으로 빅 리그에 올라간 그는 시즌 말미에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상대로 한 홈 경기에서 중간 계투로 첫 등판을 하였으나, 조 토리에게 홈런을 허용하였다. 이어 그는 휴스턴에서 애스트로스를 상대로 처음으로 선발 투수로 등판하였으나 1이닝만에 강판당하고 패전 투수가 되었다. 컨트롤 불안을 여지없이 드러낸 그는 이듬해를 다시 마이너 리그팀인 뉴헤이븐과 잭슨빌에서 보내야 했다.

1968년 다시 빅 리거가 된 라이언은 4월 14일에 애스트로스를 상대로 설욕전에 나섰고, 래리 디어커 투수를 누르고 첫 승을 따냈다. 그러나 이 해에도 라이언은 그리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컨트롤 불안은 여전했으며, 손에 생긴 물집 때문에 제대로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그는 이 해에 6승 9패에 그쳤다.

1969년 만년 꼴찌로 인식되던 메츠는 길 하지스 감독의 지휘 하에 처음으로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고,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라이언이 3차전 승리를 따낸 데에 힘입어 브레이브스를 완파하고 월드 시리즈에 올랐다. 라이언은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맞붙은 월드 시리즈 3차전에서 세이브를 기록하여, 메츠가 예상을 뒤엎고 우승을 차지하는 데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라이언의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 시리즈 등판이었다.

그러나 뉴욕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한 라이언은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했으며, 톰 시버와 제리 쿠스먼 등 뛰어난 투수진을 갖춘 메츠는 라이언을 별로 효용 가치가 크지 않은 투수로 여겼다. 결국 라이언은 팀에 트레이드를 요구하였고, 팀은 1971년 시즌을 마친 뒤 리 스탠턴, 돈 로즈, 프란시스코 에스트라다를 라이언과 묶어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의 3루수 짐 프레고시와 트레이드했다.

에인절스에서 톰 모건 코치의 지도를 받은 라이언은 급성장하였다. 새로운 팀에서 맞은 첫 해인 1972년 라이언은 2.28의 방어율과 19승(9완봉승)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팬들을 정말 놀라게 한 것은 그의 탈삼진 수(329)였다. 그는 이 해에 8 연속 탈삼진을 기록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AL에서는 신기록이었으며 메이저 리그 전체에서는 타이 기록이었다. 라이언은 이 해에 처음으로 올스타전에 선발되었으나. 실제로 등판하지는 못했다.

이어 1973년 라이언은 캔자스시티 로열스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의 대기록을 수립하는 등 더욱 위력을 보였으며, 383번이나 삼진을 잡아 샌디 쿠팩스의 종전 기록을 경신하고 한 시즌 최다 탈삼진 기록 보유자가 되었다. 이 해에 그는 사이영상의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으나, 승률이 좋지 않아(21승 16패) 오리올스의 짐 파머에게 상을 양보해야 했다.

1974년 라이언은 타이거스와 대결한 경기에서 시속 100.9마일이라는 볼 스피드를 기록하였다. 이는 공인된 기록으로서는 가장 빠른 볼 스피드였으며, 기네스북에 올랐다. 또한 이 해 8월에 그는 보스턴 레드 삭스와 대결한 경기에서 19 탈삼진을 잡아, 과거 팀 동료였던 톰 시버와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스티브 칼든이 세운 한 경기 최다 탈삼진 기록과 타이를 이루었다.

이 기록은 1986년 로저 클레멘스가 한 경기 20탈삼진을 기록하기까지 깨지지 않았다. 이 해 마지막 등판에서 라이언은 트윈스 타자들에게 한 개의 안타도 맞지 않아 3번째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였다.

이듬해인 1975년 그는 오리올스를 상대로 4번째 노히트 노런의 위업을 남기며 샌디 쿠팩스와 함께 가장 많은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투수가 되었다. 그러나 이 해에 그는 팔꿈치 부상을 당해 전반적으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라이언이 에인절스에서 활약한 시즌 중 탈삼진 수위를 놓친 해는 1975년뿐이었다.

시즌 후 수술을 받은 그는 다시 위력적인 구위를 과시했으며, 1976년과 77년에 연속으로 300개가 훨씬 넘는 탈삼진 기록을 남겼다. 1977년에는 AL 사이영상은 뉴욕 양키스의 마무리 투수 스파키 라일에게 돌아갔으나, '스포팅 뉴스'는 라이언을 '올해의 AL 투수'로선정했다.

라이언은 1979년 처음으로 올스타전 선발 투수의 영광을 차지했으며, 이 해에 AL MVP가 된 돈 베일러와 함께 에인절스를 첫 포스트 시즌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에인절스는 오리올스에 1승 3패를 당해 물러났다.

1979년 시즌 후 자유 계약 선수로 풀린 라이언은 에인절스의 버지 바바시 단장과 연봉 협상을 벌였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했고, 결국 애스트로스와 계약을 맺었다. 그는 애스트로스와 계약을 맺으면서 3년간 350만 달러라는 거액을 연봉으로 지급받기로 하여 최초로 연평균 100만 달러 이상을 받는 선수가 되었다.

그는 지명 타자 제도가 있는 AL에서 오래 활약했음에도 불구하고, NL로 돌아와 맞은 첫 해인 1980년에 처음 등판한 경기에서 홈런을 쳐 놀라운 힘을 과시하였다. 그는 이 해에 팀의 첫 포스트 시즌 진출에 기여하였으며 3000탈삼진을 돌파하였으나, 11승을 올리는 데에 그쳤다.

이어 1981년에도 그의 승수는 그대로였다. 그러나 이 해에 라이언은 처음으로 리그 방어율 1위에 올랐으며, 또한 LA 다저스를 제물로 하여 NL에서는 처음으로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그는 이 해에 팀을 디비전 시리즈에 진출시켰다.(이 해에는 선수 파업으로 시즌이 단축되어, 각 지구별 전·후기 우승팀끼리 디비전 시리즈를 가졌다.)

애스트로스에서는 에인절스 시절처럼 경이적인 탈삼진 수를 보이지는 못했으나, 여전히 그의 구위는 위력적이었다. 그는 1983년 몬트리올 엑스포스의 브래드 밀스를 삼진으로 잡아 월터 존슨의 통산 탈삼진 기록(3,508)을 경신하였다. 이어 1985년에는 메츠의 대니 힙을 제물로 4000탈삼진이라는 대기록의 주인공이 되었다.

라이언은 80년대에 중반 잦은 부상으로 기량을 완전히 발휘하지는 못했으나, 1986년에 스플리터의 명수 마이크 스카트와 함께 애스트로스를 다시 서부 지구 정상에 올려 놓았다. 그러나 팀은 라이언의 전 소속팀인 메츠를 상대로 2승 4패에 그쳐 패퇴하였다.

1987년 라이언은 최초로 양대 리그에서 통산 2000탈삼진 이상을 올린 선수가 되었으며, 40세의 나이로 NL에서 방어율과 탈삼진 수위에 올라 사이영상 후보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팀 타선의 지원 부재로 8승에 그친 것이 악재로 작용하여, 결국 사이영상 투표에서 4위에 그쳤다.

애스트로스와 마찰을 빚던 라이언은 1988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팀을 떠났다. 뉴욕 양키스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등 여러 팀이 라이언에게 손길을 뻗쳤으나, 고향인 텍사스 주를 떠나고 싶지 않았던 라이언은 알링턴을 연고지로 하는 텍사스 레인저스에 둥지를 틀었다.

1989년 라이언은 42세의 나이로 다시 탈삼진왕에 등극하여 42세의 나이를 무색하게 했다. 그는 이 시즌에 역대 최고령 올스타전 승리 투수가 되었으며, 애슬레틱스의 리키 헨더슨에게서 삼진을 뺴앗아 통산 5000탈삼진이라는 전인미답의 대기록을 작성하였다.

또한 이듬해인 1990년에는 헨더슨과 호세 칸세코, 마크 맥과이어 등 당시 최강의 타선을 자랑하던 애슬레틱스를 상대로 생애 6번째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였으며, 이어 밀워키 브루어스를 상대로 통산 300번째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이 해에도 탈삼진 수위를 지켰다.

그는 1991년 토론토 블루 제이스를 상대로 생애 마지막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부상으로 시즌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1993년을 마지막으로 화려한 현역 생활을 마감하였다. 그가 남긴 기록은 역대 최다 탈삼진(5714), 최다 노히트 노런(7회), 최장기간 선수 생활(27년), 한 시즌 최다 탈삼진(383), 최다 사사구(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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