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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애 의원 권유로 정치, 지난 대선 때 대변인 맡아 부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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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호 06면

16대 대통령 선거를 석 달 앞둔 2002년 9월 법조계에 작은 술렁임이 있었다. 뛰어난 미모와 부부 판사란 사실로 인해 법관 임용 때부터 유명세를 탔던 서울행정법원 나경원 판사가 사표를 던진 것이다.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의 대선 캠프에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현직 여성 판사가 사표를 내고 정치권으로 뛰어든 건 1995년 민주당 추미애 의원 이후 두 번째였다.

서울시장 후보 인물 탐구 한나라당 나경원과 그의 인생

나 후보는 전혀 정치를 할 것으로 보이지 않았던 인물이어서 동료 법관들의 놀라움은 컸다. 나 후보 스스로도 지난해 펴낸 저서 세심에서 “내가 정치인이 될 거라곤 나 자신도 몰랐다”며 “지금도 친구들로부터 ‘너같이 어리바리한 애가 어떻게 정치 하니’란 말을 자주 듣는다”고 썼다. 당시 나 후보와 함께 행정법원에서 근무했던 한 판사는 이렇게 회고한다. “성실하게 업무만 수행했지 정치엔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남편과 함께 오직 법조인 외길로만 나갈 줄 알았다. 왜 시끄럽고 혼탁한 정치권에 발을 담그려고 하느냐는 만류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나 후보의 정치 입문은 여성 1호 사법시험 수석 합격자로 여성 판사들의 멘토이던 이영애 부장판사(현 자유선진당 의원)의 권유가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고 한다. 이회창 후보도 나 후보를 만나 캠프 합류를 요청했다. 20~30대 젊은 여성 표를 잡기 위한 전략이었다.

딸 초등학교 입학 거부도 정계 입문 계기
법관으로서 앞날이 촉망되던 나 후보가 고심 끝에 정치 입문을 결심한 배경은 그의 가족 내력과 무관치 않다. 나 후보는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첫아이(딸)를 생각하면서 장애인과 소외된 계층을 위한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은 애절한 마음이 가장 큰 이유였는지 모른다”며 “딸이 초등학교 입학을 거절당하는 차별을 경험한 게 (정계 입문의) 계기가 됐다”고 했다. 나 후보는 초선 때부터 장애아 문제에 관심을 갖고 국회에 ‘장애아이 We Can’이라는 연구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그는 출산 이틀 만에 딸의 선천성 장애를 알고 난 뒤 평생 흘릴 눈물의 절반쯤 흘렸을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동료 법관 K씨는 이렇게 말한다. “사무실에 가족 사진을 담은 액자를 놓아뒀는데 딸의 모습은 누가 봐도 장애인이라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딸의 장애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숨기려고도 하지 않는 걸 보고 유약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내면엔 당당함과 단단함이 있구나 생각했다.”

학창 시절의 나 후보는 시쳇말로 ‘엄친딸’이었다. 예쁘고 공부 잘하는 것은 물론 유복한 집안환경까지 남부러울 게 없었다. 나 후보의 부친은 공군 조종사로 예편한 뒤 사립학교를 설립했다. 현재 화곡중·화곡고·화곡여상을 운영하는 흥신학원 이사장이다. 야당이 ‘사학재벌의 딸’이라고 공격하는 이유다. 나 후보가 늘 1등을 놓치지 않았던 것은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라 노력파여서라고 강조한다. 그가 스스로 밝힌 별명은 ‘나징가제트’였다. 무쇠같이 끝까지 앉아 공부만 한다는 뜻에서였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 이렇게 썼다. “내 인생을 한 편의 영화로 본다면 졸음이 오는 잔잔한 영화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잔잔한 영화를 찍기 위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는지 모른다.”

1982년 서울대 법대에 진학한 나 후보의 대학 생활은 평범했던 듯하다. 하루가 멀다 않고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던 시절이었지만 그는 학생운동과는 담을 쌓았다. 현재 로펌 변호사로 재직 중인 82학번 동기는 “학창 시절에는 누구도 나경원이 정치할 줄 몰랐다. 예쁘고 성적도 좋아 눈에 띄긴 했지만 성격이 조용한 편이었다. 현재의 남편과 과 커플이었지만 연애도 조용하게 했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 일화가 별로 없다”고 말했다. 그는 동기생들에 비해 다소 늦긴 했지만 92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예정된 길’을 갔다. 서울대 법대 입학정원 360명(여성 11명) 가운데 190여 명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나 후보의 인생 항로는 정치 입문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하지만 정계에 입문한 뒤에도 탄탄대로를 달린 것은 그의 학창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들어간 뒤 2006년 당 대변인으로 발탁됐다. 2007년 대선 땐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후보 선대위 대변인도 겸했다. 초선의원 나경원이 대중적 지명도를 높인 계기가 됐다. 18대 총선에선 서울 중구에 출마해 야당 후보를 큰 표 차로 따돌리고 재선에 성공했다. 당시 나 후보는 공천파동으로 선거 지원에 손을 놓고 있던 박근혜 전 대표를 대신해 다른 후보들의 지원 유세에 적극 나섰다. ‘제2의 선거의 여왕’이라 불린 건 이때부터다. 지난해 7월엔 한나라당 전당대회에 나가 최고위원 자리를 거머쥐었고 올 7월 전당대회에서도 자리를 지켰다. 득표수는 두 차례 모두 3위였다. 짧은 정치 경력임에도 당의 간판급이 된 것이다.

예쁜 외모, 말 잘하기는 장점이자 단점
예쁜 외모와 논리 정연한 언변이 정치인 나경원의 장점이긴 하지만 그로 인해 손해를 보는 측면도 있다. 외모로 인기를 모았지만 정작 콘텐트는 없다는 비판이 나오기 때문이다. 홍준표 대표가 서울시장 후보의 조건을 거론하며 “탤런트 정치인은 안 된다”고 한 건 나 후보를 의식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TV 토론에서 보여주듯 어떤 정책을 놓고 토론을 해도 자신 있을 정도의 콘텐트로 무장되어 있다는 게 나 후보 측 반론이다.

주변에 인물을 끌어모으는 흡인력이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회 보좌관들 사이에선 모시기 어려운 의원으로 통한다. 실제로 보좌진이 자주 교체되는 것을 두고서도 “인간적 포용력이 부족한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친이계로 분류되지만 두드러진 인맥은 없다.

그는 사회적 약자의 입장을 배려해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무상급식 반대, 재벌규제 완화 등 의정활동에서 보인 성향은 대체로 보수적이었다. 약자를 껴안는 사회활동도 장애인 관련 외에는 이렇다 할 게 드러나지 않는다. 부유한 환경에 엘리트의 길만 걸어오다 보니 소외 계층의 실상을 제대로 알지 못할 것이란 목소리도 적지 않다. 미디어법·사립학교법 등 여야 간 쟁점 법안에서는 야당과의 대결에서 몸을 사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판사 시절에도 조정하는 것을 좋아했던 것처럼 갈등을 해결하는 것에 있어 아이디어를 내고 방안을 수립하는 것이 더 적성에 맞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정치보다 행정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했다.” 나 후보가 저서 세심에 쓴 글이다. 그가 가끔 생각했던 대로 서울시 행정의 수장이 되기 위해 출사표를 던졌다. 그의 바람이 이뤄질지는 사흘 뒤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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