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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인권조례라 했느냐 긁어 부스럼 만들진 마라 토론 벌어지는 것만도 기껍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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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세상 참 어지럽구나. 굳이 영화관까지 갈 필요도 없구나. 37년 전 극장에서 보았던 ‘007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가 엊그제 저 멀리 회회교(回回敎) 나라에서 싸구려 쇠총에 맞아 비참하게 가더구나. 미국에선 호랑이·사자·늑대 수십 마리가 길거리를 떼지어 돌아다니더구나. 맹수들이 도시를 휩쓸고 다니는 영화 ‘쥬만지’와 다를 게 뭐 있느냐.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어지럽게 돌아가도 아직 변하지 않은 게 있느니라. 너희가 나를 아느냐. 나는 순빈 봉(奉)씨다. 세종대왕의 며느리, 그러니까 문종의 세자 시절 세자빈이었노라. 1414년에 태어나 만 스물두 살, 지금 생각해도 참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억울해서 아직도 구천(九泉)을 떠돌고 있다. 내가 아비의 손에 목 졸려 죽은 지 올해로 575년. 서인(庶人)으로 강등돼 대궐에서 폐출됐을 때 아비도 피눈물을 흘리더구나. “자결하라”고 권하시길래 무섭고 억울해 거절했더니 내 목에 손을 대시더라. 내 시신을 가지런히 해놓고 당신도 자진(自盡)하셨다. 이해하노라. 세월이 흐른 지금은 아비도 나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더구나.

 내게 소소한 잘못이 있었다는 것은 인정하노라. 남편이 입을 옷과 신발을 친정집에 좀 보내긴 했다. 그러나 아무리 추상같은 궁중 법도라도 효성에는 한 풀 접어주는 게 고래(古來)의 금도(襟度) 아니겠느냐. 가끔 시녀들 측간에 들어가 벽 틈으로 외간 사람들 훔쳐보고, 종년에게 사랑노래를 불러달라 한 적도 있긴 하다. 그게 무슨 큰 죄인고. 그때 내 나이 갓 스무 살. 요새 젊은 애들 하고 다니는 걸 보면 원통해 미칠 지경이구나.

 내 죄는 딱 하나, 여종 소쌍(召雙)을 유달리 아꼈다는 것뿐이구나. 그래, 솔직히 말하마. 사랑해서 같이 잤다. 비록 성은 봉씨지만 웬일인지 봉(棒)은 도저히 내키지 않더구나. 너희 또래 학자들이 궁구한 바로는 인구의 5% 안팎이 선천적으로 그렇게 사랑하게끔 태어났다더구나. 차별 받고 남몰래 괴로워하는 이들이 많다고 들었다. 가여운 일이지만 나는 과연 어땠을지 짐작이라도 해보기 바란다. 차라리 감동·어우동처럼 살았다면 후대에 에로영화 소재라도 됐지, 나는 맷돌이니 뭐니 온갖 모욕 다 받았느니라.

 한양 교육청인가에서 무슨 성적(性的)지향성에 관한 조례를 만든다는데, 자칫 긁어 부스럼 만들지는 말거라. 99%가 나서서 1%를 다그치는 시위가 전 세계에서 벌어진다지만, 우리 5%를 이해하는 건 아직 희미한 모기 소리다. 나는 조례 파문이 우리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는 계기가 된 것만으로도 기껍구나. 575년을 기다렸는데 이삼십 년 더 못 기다리겠느냐. 오죽하면 색목인(色目人)들도 시달리다 못해 ‘더 나아질 거야’라는 주문을 왼다고 들었다. ‘It gets better’라더구나.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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