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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불공평한 세상을 사는 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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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심상복
경제연구소장·논설위원

올봄 KAIST 대학생 넷이 잇따라 자살했다. 언론이 대서특필했고, 자살 원인에 사회적 관심이 집중됐다. 서남표 총장이 도입한 차등적 수업료가 ‘용의자’로 지목됐다. 수업료가 공짜지만 학점이 3.0 미만이면 6만원에서 많으면 600만원까지 내도록 하는 제도다. 하지만 자살한 넷 중 둘은 3.0을 넘었다. 그럼에도 국가인권위원회까지 나서 이 제도에 인권침해 요소는 없는지 조사하는 희한한 일까지 벌어졌다. 결국 4월 7일 대학 측은 차등적 수업료제를 철회한다고 발표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에서도 최근 5개월간 네 명이 목숨을 끊었다. 학교는 침울한 분위기에 빠졌고, 자살 원인을 놓고 말이 많았다. 지난 6일 서울 석관동 캠퍼스에서 추도식이 열렸다. 교수협의회는 성명서에서 “신자유주의 시대 ‘잉여’ 청년이 겪는 삶의 위기, 누구보다 청년예술인들이 처한 위기의 삶”이라고 현상을 진단했다. 총학생회장도 애도문에서 비슷한 언급을 했다. “신자유주의와 경쟁만이 답습된 사회에서 서로의 죽음을 딛고 서 있다”고.

 KAIST에 비해 한예종 사태는 조용하게 지나갔다. 과학 수재들의 자살은 크게 부각됐지만 장래의 예술가들은 사회적 주목을 덜 받았다. 자살 배경으론 공통점이 보인다. 넓게 보면 다 경쟁에서 좌절한 흔적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KAIST 학생들은 수업료를 내지 않기 위해 남보다 좋은 성적을 내야 했다. 대학에 들어온 뒤에도 성적의 노예가 돼야 하는 현실이 지겨웠을 게다. 한예종 교수나 학생회장의 추모사에는 공교롭게도 신자유주의란 용어가 똑같이 등장했다. 무한경쟁으로 내모는 현실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사회적 쓰임새는 적어 잉여인력이 되고 마는 처지를 개탄했다.

 수재들만 모인 곳이라도 우열은 있다. 세상에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는 법, 경쟁을 통해 앞뒤가 가려진다. 그 차이는 각자 타고난 재능이나 노력 정도, 집안 환경이나 재력 등 다양한 원인을 갖는다. 1등은 사회에 나가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서 좋은 대접을 받는다. 꼴찌는 어쩌면 중도 탈락해 실업자로 전락하기도 한다. 물론 역전현상도 벌어진다. 쉽게 좋은 자리를 얻는 사람도 있고, 아무리 애써도 실패를 거듭하는 이도 있다. 어쨌든 사람마다 소득차가 생겨나고 삶의 질도 달라진다. 이걸 양극화의 시발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서열을 가리는 일은 그 이전에도 수없이 많았다. 그동안 거친 수많은 시험이 다 그런 과정이었다.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두 대학 학생들은 비교우위 집단이다. 그럼에도 또다시 걸러지는 과정에서 일부가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는 과정과 그 뒤의 사회생활에서도 관문은 끝이 없다. 인생 어느 단계에서도 낙오자는 나오고, 그로 인해 그의 삶은 영향받을 것이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제동을 걸어야 격차의 문제를 풀 수 있을까.

 빌 게이츠도 답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인생이란 원래 공평하지 못하다. 그런 현실에 대해 불평할 생각 말고 그냥 받아들여라”고 충고한다. 오래전 세상도 공평하지 못했다. 그땐 신분 차이까지 있었다. 그동안 문명이 눈부시게 발전했고, 인간의 지혜가 엄청난 문화유산으로 축적됐다. 그럼에도 왜 이 문제는 풀지 못할까. 18세기 영국 경제학자 맬서스는 『인구론』에서 식량 증가에 비해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때문에 재앙이 올 것으로 내다봤다. 그의 예상만큼 인구가 폭발하지는 않았지만 인구 증가로 빈곤과 범죄의 발생은 불가피할 것이라는 예견은 탁월했다. 불어난 인구는 경쟁을 부추겼고, 여기에 탐욕은 더욱 왕성하게 기생했다.

 세상은 본래 불공평하다고 하니 그냥 가만 있어야 할까. 당연히 아니다. 거기에 맞서는 개인의 노력과 사회적 고민은 계속돼야 한다. 그런 노력과 고민의 집합체가 우리의 삶이니까.

심상복 경제연구소장·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