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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영화를 위하여 - 칸에서 '발견'된 신예 감독들

중앙일보

입력

칸 영화제는 이미 명성을 쌓아놓은 감독들, 또는 이른바 '대가'로 대접 받는 감독들에게 예의를 깍듯이 차리는 영화제로 유명하다. 오시마 나기사, 켄 로치, 제임스 아이보리, 코엔 형제 등, 올해에도 쟁쟁한 영화 감독들이 경쟁 부문에 진출했다. 그런 만큼 이처럼 유명 감독들로 주로 채워진 리스트에서 간간이 눈에 들어오는 새로운 이름들은 오히려 호기심을 더 발동시키는 면도 있다. 이들 가운데에서 (칸 영화제에서 수상함으로써 일약 '스타'로 발돋움했다는 의미에서) 제2의 소더버그, 또는 제2의 타란티노가 출현하는 '드라마'가 연출되리라고 기대하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물론 올해의 경우엔 그런 극적인 반전이 일어나지 않았다. 예컨대 황금 종려상을 수상한 라스 폰 트리에는 작년 수상자인 뤽과 장 피에르 다르덴 형제 같은 신인급이 전혀 아니며, 그의 영화 〈댄서 인 더 다크〉가 수상할 것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충분히 예견되던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황금종려상 그 아래의 수상 리스트를 살펴보면 의외의, 혹은 미지의 이름들이 자주 눈에 띈다. 새로운 세기의 첫 해에 열린 페스티벌답게, 올 칸 영화제는 비록 대규모는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의 지각 변동은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칸이 선택한 이 '미래의 시네아스트들'은 과연 어떤 인물들일까?(여기서 수상자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다른 사람들로부터 공증을 받았다는 점 때문이다. 영화제 수상 결과가 정확하게 승부가 갈리는 올림픽 경기의 기록과 같은 것은 아님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2등상에 해당하는 그랑프리(심사위원 대상)는 작년(브뤼노 뒤몽의 〈휴머니티 L'Humanite〉)에 이어 올해에도 이제 겨우 두 번째 작품을 마친 신인 감독에게 돌아갔다. 그 주인공인 강문(姜文)은 주지하다시피 〈부용진〉, 〈붉은 수수밭〉 등을 비롯해 많은 영화에 출연해 먼저 중국의 대표적인 배우로 이름을 알린 인물. 반(半)자전적인 성장 영화 〈햇빛 쏟아지던 날들 陽光燦爛的日子〉(1994)은 감독으로서 강문의 다음 행보에 기대를 걸기에 충분할 만큼 그의 인상적이고 출중한 감독 데뷔작이었다.

이번에 그가 들고 나온 〈귀신이 왔다 鬼子來了〉 (영어 제목은 '문 밖의 악마Devils on the Doorstep')는 거의 6년에 걸친 동면을 깬 작품이다. 1945년 1월, 만리장성 가까이에 위치한 중국의 한 외딴 마을에 일본군 포로와 그의 통역관이 맡겨지면서 사건이 벌어진다. 노신(魯迅)의 소설 〈아Q정전〉에 블랙 코미디의 톤을 가미한 듯한 이 영화는 민족주의, 전통 규범에 대한 기계적 집착, 무지와 주입된 편견에 대한 이야기를 흑백의 흔들리는 화면 안에 풀어놓는다. 그 편견의 우화적 세계 안에는 자기들 자신, 바로 중국 사회에 대한 비판의 칼날이 은밀하게 도사리고 있다.

사미라 마흐말바프(Samira Makmalbaf)는 최연소(20세) 칸 경쟁 부문 진출이란 이색 기록을 세운 이란의 여성 감독이다. 지난 해 칸에 다녀간 아버지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바톤을 이어받은 그녀는 〈칠판 Takhte Siah〉으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98년작 〈사과〉에 이은 그녀의 두 번째 작품 〈칠판〉은 이란-이라크 접경 지역에서 살아남기 위해 방랑해야 하고 고투해야 하는 쿠르드족 사람들에 카메라를 갖다 댄다. 칠판을 등에 진 선생들은 배움을 받을 학생들을 찾아나서지만 폭격의 위험이 상존하는 곳에서 그러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반복을 거듭하는 듯한 리듬 속에 삶의 힘겨움을 전달해 주는 동시에, 방패, 들 것, 부목, 신부 지참금 등으로 용도 변경되는 칠판의 은유를 통해 삶의 소박한 지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칠판〉은 지극히 이란 영화적인 작품이다. 비록 시나리오 작업에 있어서 아버지와의 협업 관계를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칠판〉엔 20세 젊은 여성의 작품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의 깊은 통찰력이 새겨져 있다.

스웨덴 영화 〈2층에서 들려오는 노래 SÅNGER FRÅN ANDRA VÅNINGEN〉는 〈칠판〉과 공동으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작품. 북반구 어느 곳인가의 한 평범한 마을에서 벌어지는 이 인간의 나약함과 아둔함, 수치와 존경에 대한 이야기는 불가해한 카오스의 느낌을 전달해준다. 고작 45개의 커트 안에 담긴 세심하게 구성된 비주얼은 이 세계 자체가 그처럼 다가갈 수 없을 듯한 미지의 그것이란 인상을 강화한다.

〈2층에서 들려오는 노래〉를 만든 로이 안데르손(Roy Andersson) 감독은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진 않지만 자국 내에선 "영화계의 미지의 천재"로 알려져 있는 인물. 사실 이미 1970년에 극영화 데뷔작 〈스웨덴의 러브 스토리〉를 만든 바 있는 그를 두고 신예 감독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지도 모른다. 75년에 두 번째 영화를 만든 안데르손 감독은 그 후 자신의 제작사인 '스튜디오 24'에서 단편, 다큐멘터리, 광고물 등을 만들었다. 세 번째 작품인 〈2층에서 들려오는 노래〉를 제작하기까지 긴 시간 동안 '영화'를 만들지 않은 것에 대해 그는 오히려 그건 자신에게 치욕이 아니라 행운이었다고 말한다. 그럼으로써 전통적인 규범의 영화 세계에 발을 디디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관습에 따르지 않는 신선한 영화를 창조하려는 야심을 가졌다는 점에서 안데르손은 아직도 새로운 영화 감독군(群)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인물일 것이다.

일본의 아오야마 신지(靑山眞治)는 이번 영화제에서 가장 긴 영화인 〈유레카 Eureka〉(3시간 37분)로 국제비평가협회(Fipresci)상을 수상했다.

그는 우리에겐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미지의 인물'이지만 사실 일본에선 첫 작품 〈헬플리스 Helpless〉(1996)를 내놓았을 때부터 자국내 비평가들로부터 관심을 모았던 기대주였다. 〈카이에 뒤 시네마 일본판〉 등에서 평론가로도 활동했던 아오야마는 지금껏 주로 장르 영화의 틀 안에 현대 일본 사회에서 방황하는 사회 부적응자들의 삶을 새겨놓았다. 이번에 칸에 진출한 〈유레카〉 역시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는 작품. 처절한 비극을 통과한 후의 트라우마(truma) 속에서 허덕이는 인물들의 갱생에로의 오딧세이를 따라간다. 미니멀리즘의 미학을 통해 역설적으로 풍부한 감정을 우려내는 〈유레카〉는 상당히 긴 러닝 타임과 연출가의 '방종'에 가까운 지루함 때문에 적지 않은 평자들과 관객들을 괴롭혔다. 하지만 칼라 필름에 촬영한 후 흑백으로 인화해 세피아 톤을 만들어낸 이 영화는 어떤 평자들로부터는 그런 시각적 느낌과 침묵을 잘 이용한다는 점에서 존 포드 영화에 대한 신선한 오마주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이 밖에도 각본상을 수상한 〈간호사 베티 Nurse Betty〉의 닐 라뷰트(Neil LaBute), 인간의 타고난 결점을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로맨틱 코미디 〈패스트 푸드, 패스트 우먼 Fast Food, Fast Women〉의 아모스 콜렉(Amos Kollek) 등이 칸에서 인정받은 신예 감독들이다.

칸 영화제의 집행 위원장인 질 자콥은 〈버라이어티〉와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들의 목표는 새로운 인재들을 찾아내는 것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예전의 영화를 경하하기보다는 미래의 영화를 찾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칸 영화제는 새로운 재능을 발굴한다기보다는 기존의 '작가들'에 의존한다는 볼멘 불평 소리들을 자주 들어온 것이 분명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과연 이들 칸에서 '(재)발견'된 신예 감독들 가운데 미래의 영화를 만들어나갈 인물은 누구일까? 단지 시끄러운 구호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진정한 미래의 영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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