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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에게 나무 없는 땅 물려줄 수 없어요"

중앙일보

입력

'나무'라는 단어를 조용히 소리 내어 입 속에서 굴려본다. 도심뿐만 아니라 한적한 시골길에도 나무가 사라진 지 오래됐다. 산이라는 단어가 공룡만큼이나 낯설게 느껴지게 됐으니. 나무를 볼 수 있는 것은 오래 된 영화나 웹 DB에서 끌어온 사진을 통해서일 뿐이다. 화석을 통해 공룡의 존재를 확인하듯. 이미 딱딱하게 굳어 버려 화석으로 존재하는 나무.

우연히 웹에서 본 차윤정님 인터뷰 기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구 상에 나무가 없어지면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말라"는 한 구절의 비장함 때문.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땅을 후손에게 물려줄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의 표현. 헐벗은 땅을 후손에게 물려준 지난 세대에 대한 원망과 이 곳에서 살 수밖에 없는 서글픔.

아찔할 정도로 아카시아 나무가 진한 향기를 뿜어대고 쏴쏴 사시나무가 울어대는 '시민의 숲', 초여름 바람이 부드러운 그곳 등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식물은 왜 바흐를 좋아할까〉의 저자 차윤정님을 그려본다.

목 둘레에 느슨하게 늘어뜨린 머플러,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풍성한 치마, 깔끔하게 귀 밑까지 잘라낸 커트 머리, 차윤정님은 겨울나무처럼 담백하면서도 참 예쁘다. 종자 번식을 위해 나무 한 그루가 꽃에 쏟는 지극한 사랑과 화려한 이파리로 그 사랑에 보답하는 암꽃.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다 할 때 꽃도 사람도 아름답다. 꽃이라 불리기를 거부하는 여성을 이해할 수 없다는, 꽃을 사랑하고 여성으로서의 삶을 사랑하는 차윤정님은 꽃처럼 아름다웠다.

"'팔도'에 안 가본 산이 없을 정도로 수없이 다녔지만 여성으로서의 삶을 후회한 적은 없어요.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온 힘과 정성을 다하는 식물처럼 여성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여성 스스로 자신의 삶에 긍지를 가질 때 진정한 아름다움이 나온다고, 환경의 제한은 내면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고. 종자를 맺기 위해 꽃이 지난한 고통을 겪듯 산고를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 때 여성성이 빛난다는 것.

"한 그루의 나무가 꽃을 피우기 위해 얼마나 헌신적으로 노력하는지, 이렇게 지극한 정성을 쏟아 종자를 번식시키는 식물 이야기로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지 책을 통해 알리고 싶었어요."

차윤정님은 하천 둑가에 아무렇게나 피어 있는 들꽃 하나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여유가 다른 생명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자신뿐 아니라 다른 생명에 대해서도 가치를 두지 않는 인간에 대한 경종이다.

나무 한 그루가 자라기 위해서는 만 그루의 희생이 필요하다며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강조한 그이에게는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있었을까?

여름에도 밤공기가 차서 밤에 창문을 닫아야 하는 경기도 광주에 살기를 고집하는 그녀. 지글지글 도심의 열기가 한밤중에도 식지 않는 삭막한 공간은 이제 질색이란다. "집에서 가꾸는 나무가 있냐?"는 질문에 정색을 하면서 손을 휘휘 내젓는다.

"식물은 인간이 어떻게 하든 성가신 거예요. 자연 그대로 건강한 모습으로 자라도록 내버려두는 게 최고지요. 산이 쑥쑥 올라오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로 15년 내내 산을 탔지만 풀꽃 한 뿌리 퍼온 게 없어요. 자연은 자연 그대로 내버려두는 게 가장 아름다워요."

어릴 적부터 시골집 뒷산에서 뛰어놀면서 식물과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는 그이는 그냥 산이 좋아 녹색 자원을 다루게 됐다. 대학 2학년 때 지리산에 20여일 동안 머무르면서 신발이 해져 덜그럭거릴 정도로 '산 거지'가 됐지만 그 상황에서 오히려 숲 속에서 새로 태어난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단다. 산이 좋아서, 산에 미치지 않고는 가질 수 없는 느낌일 터. 오죽하면 산에 시집가라는 말을 들었을까.

"〈식물의 사생활〉같은 책을 쓰고 싶어요. 열대 지방이나 유럽의 식물을 다뤘다는 것이 한계지만 정말 흉내내고 싶은 책이에요. 영국 BBC TV에서 이 책을 토대로 시리즈물을 방영하기도 했어요. 미국의 야생동물학자인 알도 레오폴드가 쓴 〈모래땅의 사계〉도 읽기가 아까울 정도로 좋은 책이에요. 표현도 얼마나 좋은지 자연문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부끄럽지만 남편과 함께 공들여 쓴 〈신갈나무 투쟁기〉도 읽을 만한 책이에요."

여전히 좀 더 본격적인 식물 이야기를 쓰고 싶은 마음 멈출 수 없다는 게 그이의 요즘 심정. 식물에 대한 애정은 그 개체가 살아가는 원리를 바로 이해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사람이야기는 자신보다 더 향기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 쓸 것이라고 겸손해 하지만, 식물을 향한 애정이야말로 향기로운 삶을 사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 아닐까.

인터뷰 도중 기자가 책을 펴들고 사소한 오자 하나 지적하자 황망하게 "41쪽 '결코 채울 수 있는'에서 '있는'을 '없는'으로 바꿀 것"이라고 수첩에 적어넣는 그이의 모습이 아름답게 보일 수밖에. 지금 환경이 절망적이지만 눈앞의 작은 식물부터 사랑하는 마음이 온 지구를 살리는 희망의 기초라는 차윤정님의 말을 조금만 귀기울여 들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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