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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구조조정 2년은 겉화장에 불과했다”

중앙일보

입력

98년 정부가 조성했던 공적자금이 바닥나고 40조원 가량을 추가로 투입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자 공적자금의 실효성에 대한 우려의 소리가 높다. 게다가 도대체 금융권이 어디까지 곪았는가라는 의구심과 탄식도 터져 나오는 실정이다.

정부가 발표한 공적자금 64조원 외에도 추가로 투입된 ‘準공적자금’과 ‘회수자금’까지 합하면 1백조원을 육박하는 천문학적인 자금이 부실금융기관에 투입되었지만 부실은 해소되지 않고 갈수록 문제는 꼬여만 가고 있다.

이미 외국의 시각도 부정적으로 돌아서고 있다. 세계적인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지난 2년간 한국의 구조조정은 한낱 ‘겉화장(cosmetic)
’에 불과했다”며 그간의 노력들을 한 마디로 평가절하했다.

대량 실업사태를 견뎌내며 국민의 혈세로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으며 진행된 구조조정 노력들이 최근 다시 국내외의 싸늘한 시선을 받고 있는 이유는 뭘까. 64조원의 공적자금은 왜 모자라는 것일까. 공적자금 투입은 왜 ‘밑빠진 독에 물붓기’로 끝나는 걸까.

애시당초 정부가 필요한 공적자금을 너무 적게 잡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정부가 추산한 금융부실 규모 1백18조원이 과소평가된 것이었고 따라서 정부가 장담한 64조원으로 부실을 해결하기엔 턱없이 모자랐다는 것이다.

한국개발연구원의 안영석 연구위원은 “공적자금이라는 것이 조금씩 나눠 넣어서는 효과가 없다”며 “일시에 필요한 만큼 충분한 액수를 투입했어야 효과를 볼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예상 밖으로 금융권의 부실규모가 급속히 증대된 것도 공적자금 부족의 또다른 이유로 지적된다. 삼성경제연구원의 김경원 이사는 “금융부실은 미루면 미룰수록 커지는 경향이 있다”며 “부실원인에 대한 근본적인 처방이 없어 신규 부실외에 누적부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고 지적했다.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기업의 부실 규모가 갈수록 커지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1백조원을 넘어 계속 증가세를 나타내고 있는 워크아웃 기업들에 대한 여신이 은행들의 목줄을 죄고 있다. 이들 여신은 부도처리될 가망이 커 결국 고스란히 은행권 부실로 전가될 전망이다.

투신권에 대한 신속한 처방을 차일피일 미룬 것 또한 공적자금이 제대로 효과를 보지 못한 이유다. 막상 문제해결이 시급한 투신문제는 뒷전으로 하고 지난 2년간의 금융 구조조정이 은행과 종금에만 집중됐던 점이 결국 환부를 곪아 터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특히 지난해 대우 채권 관련 수익증권 환매사태가 터지자 일시적인 시장 안정을 위해 개인투자자들에게 환매비율을 최고 95%까지 보장해 줌으로써 투신권 부실을 더 심화하는 결과를 빚었다.

이미 투신권에 투입된 3조원 외에 기존의 공적자금을 긁어모아 5조원을 추가로 투입하겠다는 것이 정부의 발표이지만, 이로써 투신부실이 해결될 수 있을지 시장은 불신하고 있다.

증권연구원의 최운열 원장은 “정부가 투신권 문제 해결을 위해 서둘러 공적자금 투입부터 외칠 것이 아니라, 부실규모를 정확히 파악해 이번에 투입하는 공적자금이 마지막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적자금이란

공적자금은 97년 외환위기 당시 금융기관 구조조정을 위해 정부가 IMF와 합의한 ‘퍼블릭 펀드(Public Fund)
’를 번역한 말이다. ‘공적(公的)
’이란 말에는 정부가 국민의 세금으로 집행하는 돈이 아니라, 공공기관이 조성한 자금이란 의미도 들어 있다. 공공기관들은 정부의 보증으로 채권을 발행한다. 정부산하 특수법인인 자산관리공사, 예금보험공사 등이 이 업무를 맡고 있다. 공적자금 지원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부실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을 정부가 자산관리공사를 통해 사주거나(부실채권 매입)
▶부실 금융기관이 영업정지 처분을 당해 고객의 예금을 지급할 능력이 없을 때 예금보험공사를 통해 정부가 예금을 대신 지급해 주는 방법(예금 代지급)
▶정부가 예금보험공사를 통해 부실은행의 증자에 참여해 자기자본비율을 높여 주는 방법(증자지원)
등이 있다.

정부가 투입한 공적자금의 투입 규모와 관련해 최근 얘기되고 있는 ‘준공적자금’이란 채권발행을 통한 것이 아니라 정부가 산업은행 등 공공기관을 통해 현물출자한 금액을 말한다. 정부에서는 이를 공적자금에 포함시키지 않으려고 ‘공공자금’이란 말을 쓰기도 하지만, 부실해소를 위해 투입된 자금 규모 파악을 위해서는 공적자금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정부·금융기관의 모럴 해저드

정부가 중장기적인 비전 없이 단기적이고 가시적인 성과에만 집착해 구조조정을 추진해온 것 또한 문제로 지적된다. 경기회복 등 구조조정 외적인 목표에 얽매여 공적자금 투입후 필요한 추가조치와 사후 관리에는 소홀한 측면이 많다는 것이다.

정부의 금융 구조조정은 공적자금 투입과 함께 꼭 필요한 경영기법 혁신, 신용평가 및 위험관리 능력 강화 등을 제대로 유도하지 못하고 몇몇 은행의 퇴출·합병, 고용감축, 장부상 BIS비율 충족이라는 가시적 성과를 보여 주는 것에 그쳤다는 점이다.

금융기관 또한 공적자금으로 부실규모 축소에만 급급했지 실질적인 자구노력은 뒷전이었다는 지적이 많다.

한빛은행의 경우 5조5천억원의 공적자금을 지원받는 대신 정부와 경영개선에 대한 양해각서(MOU)
를 체결했다. 하지만 지난해 말 3급 이상 직원의 연봉제 실시 계획은 노조의 반발로 흐지부지됐다. 정부는 사정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한빛은행과 맺은 MOU를 완화해 줬다.

뉴브리지에 넘어간 제일은행은 최근 퇴직자들에게 명예퇴직금으로 24~30개월치 임금을 더 얹어 줘 논란을 빚기도 했다. 또한 제일은행이 임명한 사외이사들의 봉급도 1인당 수억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모럴 해저드가 심하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원의 김근동 수석연구원은 “정부, 금융기관 모두 부실을 돈으로 메우면 된다는 식의 안일한 생각에 빠져 있다”며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금융부실 해소를 위해 공적자금을 투입한 일본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고 설명했다.

김연구원은 “일본의 경우 정부가 요구하는 강도가 워낙 높아 금융기관들은 차라리 자구노력을 하겠다는 생각을 가질 정도였다”며 일본의 사례를 소개했다. 일본도 98년 말 금융기관 부실을 해결하기 위해 60조엔이라는 막대한 규모의 자금을 투입했지만 그 사용 행태는 우리와 판이했다.

우리의 경우 공적자금 투입을 결정하자마자 순식간에 64조원이 바닥난 반면, 일본 금융기관들은 정부의 공적자금 사용 권유에도 불구하고 이 돈을 쓰는데 소극적이었다. 결국 공적자금 투입을 결정한 지 1년이 지나도 금융기관이 사용한 액수는 약 10조엔에 불과했다.

일본 정부는 금융기관에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대신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요구했다. 자금 투입도 한꺼번에 부실을 메워 주는 식이 아니라 조건 이행 여부를 검토해 가며 단계적으로 자금을 투입했다. 금융기관들은 경영권도 내놓을 각오를 해야 했다.

또한 일본 금융기관들은 근본적으로 공적자금을 받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살을 에는 듯한 구조조정을 스스로 추진하고 그 노력이 잘되지 않는 최악의 경우에만 공적자금을 받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했던 것이다.

반면 우리의 경우는 금융기관들이 이자율이 낮아 공짜나 다름 없는 공적자금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장사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김연구원은 “거저 생기는 돈이라 안받으면 바보라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였으니, 60조원이 아니라 6백조원이라도 모자랐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공적자금 내역 공개 않는 이유는…

또한 지금껏 방대한 공적자금의 상세한 운용내역과 회수실적이 정부 기관을 통해 발표된 적이 없다는 것이 문제로 지적된다. 구조조정 대상 금융기관들의 구조조정 이행 실적 역시 물론이다. 과연 돈이 목적대로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 전용되는 부분은 없는지 낱낱이 공개해야 함에도 정부는 ‘꿀먹은 벙어리’다.

한나라당의 이한구 정책실장은 “64조원의 행방에 대한 추적이 안되고 있다”며 “정부가 이러한 자료를 안 갖고 있는 것인지 사용내역에 대해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국정조사를 해서라도 꼭 밝혀야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그는 “부실금융기관을 어떤 식으로 정리하고 자금투입 후에는 어떤 모습으로 금융기관이 변모할지 청사진이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고 정부 정책의 불투명성과 무원칙성을 비난했다.

뿐만 아니라 공적자금 운영 전에 금융기관 부실에 대한 정확한 실사가 이루어졌던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정확한 자산과 부채, 경영성과 수익성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공적자금이 집행된 것이 아니냐는 점이다.

전주성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금 필요한 것은 이미 쓰여진 자금의 실효성과 잠재적인 재정부담에 대한 냉정한 평가”라며 “이를 근거로 새로운 추가자금 조성 방식과 규모를 결정해야 시장이 정부 정책에 신뢰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코노미스트=김승렬 기자 <sy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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