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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tory] 알랭 드 보통 “예술 기업가 되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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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철학가’로 불리는 스위스 출신의 영국 작가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42)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 문학과 철학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사랑과 연애, 여행과 건축, 그리고 종교 등 다양한 주제를 종횡무진하며 세계 독자들을 사로잡아온 그다. 사람들의 세밀한 심리를 포착해내고 특유의 통찰력으로 일상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해 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세계 30개국에서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국제적 작가지만 특히 한국은 드 보통의 독자층이 유난히 두터운 나라로 손꼽힌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시작으로 『여행의 기술』 『일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최근 출간된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까지 국내에 출간된 책이 10여 권이 넘는다. 지난달 28일 오전 서울 신라호텔에서 그를 만났다. 이날 인터뷰에서 그는 그동안 글을 통해 보여줬던 모습을 훌쩍 넘어서는 새로운 면모를 보여줬다. 글쟁이로서의 열정뿐만 아니라 일상의 인문학 강좌 ‘스쿨 오브 라이프’와 건축 교육 기구 ‘리빙 아키텍처’를 이끌고 있는 기업가의 모습을 진솔하게 드러냈다. 감성과 지성, 가정과 일, 글쓰기와 사회 참여 등에서 이룬 팽팽한 균형이 그의 무기인 듯했다.

글=이은주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장소 협찬=신라호텔

●어린 시절의 첫 기억이 그 사람의 정체성을 엿보게 해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습니까.

 “레고 게임을 굉장히 좋아하는 어린이였지요. 블록을 쌓아 교회나 동네를 만들곤 했어요. 제가 지금 언어를 갖고 하는 일이 어릴 때 블록을 갖고 했던 일과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글쓰기도 제 방식으로 현실과 사물에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이죠. 부모님은 저를 여덟 살 때 영국 옥스퍼드의 기숙 학교에 보냈어요. 어릴 때부터 외로웠고, 내 또래 아이들보다는 혼자만의 내면 세계가 일찍 발달했던 것 같아요. 섬세하고, 예민한 아이였죠. 남자애들보다는 여자애들하고 인형 놀이하는 것을 더 좋아했어요.”

●철학 박사 과정을 하다가 공부를 중단하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죠. 진로 결정을 할 때 많이 불안하지 않았나요.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저는 항상 불안했어요. 불안해서 밤에 잠을 못 잔 적도 많지요. 진로를 바꿀 때는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닐까 많이 겁이 났습니다. 당시엔 저도 제 불안을 의연하게 다스리지는 못했습니다(웃음). 작가라면 니체나 보들레르처럼 방 한 칸짜리에 가난하게 사는 모습이 먼저 떠오르죠. 예술을 자신의 종교처럼 삼고 수도승처럼 살면서 많은 것을 희생하는 모습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기 좀 부끄럽지만 저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모든 남자가 사업을 하는 우리 집안에서는 작가라는 직업을 이상하게 여기는 분위기였죠. 그러니까 더 불안했죠. 다시는 20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됐습니다.

 “글쓰기가 주는 심리적 만족감이 정말 크니까요. 현실의 혼돈스럽고, 고통스럽고, 혹은 설레는 그런 감정을 콕 짚는 언어를 찾아내 묘사하는 순간 세상에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감정이 몰려옵니다. 우아하게, 그리고 제대로 설명했다는 뿌듯함이죠. 그게 글 쓰는 재미이고, 작가의 꿈입니다. 그리고 제가 현실에서 항상 주목하는 것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의 두 가지 측면입니다. 하나가 어떤 것에 대한 슬픔 같은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그것이 주는 흥분과 기쁨이죠. 정말로 아름다운 것은 슬픔과도 연결돼 있습니다. 아름다움(beauty)과 슬픔(sadness)이죠.”

●사랑과 건축, 여행, 지위 불안, 그리고 종교까지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었습니다. 이런 주제를 관통하는 핵심 요소가 뭘까요.

 “모든 게 다른 주제 같지만 사실은 서로 연결돼 있죠. 첫째는 일상성이고, 둘째는 양면을 파헤치는 접근 방법입니다. 저는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겪는 모든 일에 관심 있어요. 그게 아니면 도대체 뭐가 관심 있겠어요. 그리고 항상 좋은 점과 나쁜 점, 행복한 점과 불행한 점 등 양면을 봅니다. 예컨대 본래 건축은 공간을 통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것이지만 현실에서는 종종 그렇지 않죠.”

●글을 쓸 때 무엇을 가장 염두에 둡니까.

 “글을 쓰면서 항상 내 글을 읽을 가상의 독자를 상상합니다. 지적 호기심이 강하지만 시간은 별로 없는 그런 독자들이죠. ‘그래, 독서는 중요한 것이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머릿속에 그리지는 않아요(웃음). 제 목적은 어떻게 하면 TV앞으로 가지 않고 내 책을 읽도록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시(詩)를 좋아하는데, 간명하게 핵심을 짚는 글을 쓰려고 하죠. 짧게 장을 나누고, 거기에 핵심 아이디어를 담는, 일련의 패턴은 그런 고민의 결과죠.”

●한국은 경쟁이 심한 나라입니다. 그만큼 불안도 더 가중된다는 느낌입니다.

 “불안은 한국뿐만 아니라 영국에서도 심하고 어디에서나 심합니다. 내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고, 10년 후를 예측하기 어려운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예요. 유일한 해결책은 사람들이 모두 이런 불안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리고 일(work) 바깥의 영역에서 우정을 나눌 친구들, 공동 관심사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종교가 그런 역할을 했어요. 부자든 가난하든 선의 하나만을 보고 받아들여 주는 기관이었죠. 우리는 그런 위로의 역할을 떠맡았던 종교로부터 배울 게 많습니다.”

 드 보통은 그의 책 『불안』에서 “우리가 중요한 부분에서는 근본적으로 다른 모든 사람과 다를 것이 없다는 인식이야말로 가장 고귀하고 인간적인 깨달음”(330쪽)이라고 썼다. 또 신작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에서는 “종교는 우리의 고독에 관해 상당히 잘 알고 있다”(31쪽)고 말했다. 현대인이 겪는 여러 가지 문제는 기존 종교가 제시해온 해결책에 의해 성공적 대처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드 보통은 우리가 종교에서 부활시킬 수 있는 교훈들로 ‘공동체’ ‘친절’ ‘교육’ ‘자애’ ‘비관주의’ ‘미술’ ‘건축’ 등을 꼽았다.

●어떻게 ‘스쿨 오브 라이프’와 ‘리빙 아키텍처’를 창립하게 됐습니까.

 “5년 전부터 내가 책에 쓴 것들을 돌아보며, 이것들을 책이 아닌 데서 다른 방식으로 풀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시작이 스쿨 오브 라이프였어요. 스쿨 오브 라이프는 시험이 없는 어른들의 학교죠. 지금까지는 성공적입니다. 멤버십으로 운영하지 않고, 학기별로 등록하지도 않아요. 관심 있는 강좌의 티켓 을 사 듣고 싶은 강의만 듣는 겁니다. 한국인 수강생도 여럿 있었어요.”

●글쓰기와 사업은 많이 다를 텐데요.

 "다르죠(웃음). 다르지만 제 글쓰기와 사업의 공통 주제는 아름다움(beauty)과 지혜(wisdom)입니다. 글쓰기와 사업을 병행하며 사람들을 만나고 삶을 좀 더 낫게 만드는 게 제가 정말 하고 싶은 일입니다. 저는 이론적인 것 못잖게 실천적인 일을 좋아합니다. 더는 혼자 틀어박혀 글 쓰는 일만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생각한 것보다 두 사업에 굉장히 진지한 것 같습니다.

 “저는 기업인을 존경해요. 저는 글 쓰는 시간을 쪼개 이 일을 하는 게 좋습니다. 또 예술가도 존경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되고 싶은 게 예술 기업가(artistic entrepreneur)입니다. 예술과 결합한 좀 더 새롭고 다른 사업 모델을 만들고 싶습니다. 지금 계속 실수의 연속입니다. 매일 배우면서 가고 있죠. 이 일을 하면서 기업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사람들을 존경하게 됐습니다. 기업을 한다는 것은 멋진 일입니다. 사람들과 팀을 이뤄 일하면 멋진 일도 있고 끔찍한 일도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게 흥미롭다는 것입니다.”

●리빙 아키텍처도 성공적입니까.

 “늘 예약이 꽉 차 있을 정도입니다. 영국 주택에서 모던 건축은 보기 어려워요.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시골에 멋진 모던 건축을 지어 평범한 사람들이 이런 주택을 경험할 기회를 갖게 하고 싶었어요. 영국의 주택 건축이 왜곡된 데는 찰스 왕세자의 건축관이 큰 영향을 미쳤어요. 찰스는 모던 건축을 공격하는 글을 쉬지 않고 써 왔거든요. 그래서 새로 집을 짓더라도 옛날 식으로 짓는 집들만 나오는 겁니다. 저는 그게 오히려 키치, 그리고 가짜라고 생각해요. 옛날 건축만 고집하는 것은 좋은 건축이 아니라 나쁜 향수일 뿐입니다. 그런 면에서 리빙 아키텍처는 일종의 논쟁, 운동인 셈이죠.”

●『행복의 건축』을 쓴 저자로서 한국 건축을 본 인상이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한국 건축은 급속하게 산업화된 다른 도시들의 건축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서둘러 빨리 짓고, 콘크리트 건물을 완벽한 답변처럼 여기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한국 근대사의 반영이죠. 미래에는 한국만의 건축(original architecture)을 보여주는 건축가들이 나오겠죠. 제가 생각하는 오리지널 건축이란 전통을 진화시킨 것이고, 그 나라의 문화가 묻어 있는 건축입니다. 전통 건축을 그대로 따르는 노스탤지어의 건축은 아닙니다.”

 드 보통은 1일 오후 서울 홍대 앞 주차장 거리 일대에서 열리는 제7회 서울와우북페스티벌(www.wowbookfest.org)을 찾아가 독자들을 만나고 2일 한국을 떠난다.

알랭 드 보통

1969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났다. 은행가이며 예술품 수집가인 아버지를 둔 덕택에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8세부터 영국에서 교육을 받기 시작해 케임브리지대에서 역사학을 전공, 수석 졸업했다. 스물세 살에 쓴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Essays in Love)』로 데뷔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자신의 경험과 지적 위트를 결합해 사랑의 시작부터 이별까지 일련의 과정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분석해 주목받았다. 이 책은 이후에 발표한 『우리는 사랑일까』 『너를 사랑한다는 건』과 더불어 사랑과 인간관계 3부작으로 꼽힌다.

 드보통이 유럽은 물론 미국에서 폭발적 반응을 일으키며 국제적인 작가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마르셀 프루스트의 삶과 작품을 파고들며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에서 겪는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방법을 제시했다. 이 밖에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불안』 『여행의 기술』 『일의 기쁨과 슬픔』 『행복의 건축』 『공항에서 일주일을』 등의 작품을 썼다. 『불안』(원제는 지위 불안이라는 뜻의 『Status Anxiety』)에서는 늘 외부의 사랑을 필요로 하고, 아주 사소한 일에도 상처를 받으며 많은 사람이 공통적으로 안고 살아가는 ‘불안’의 정체를 밝힌다. 철학과 예술·정치·종교가 이 불안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추적했다. 건축 에세이 『행복의 건축』에서는 건축물을 인간이 보다 균형 잡히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밑그림을 그리는 도구로 분석했다.

 2003년 2월 프랑스 문화부로부터 ‘슈발리에 드 로드르 데자르 에 레트르’라는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같은 해 11월 유럽에서 뛰어난 문장가에게 수여하는 ‘샤를르 베이옹 유럽 에세이상’을 받았다.

 ‘더 스쿨 오브 라이프(The School of Life·인생 학교)’의 창립자며 회장이다. 건축운동 ‘리빙 아키텍처(Living Architecture·살아 있는 건축)’의 창립자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현재 런던에서 아내, 두 아이와 함께 살고 있다. www. alaindebotton.com

더 스쿨 오브 라이프(인생 학교)

알랭 드 보통이 2008년 여름 지인들과 함께 창립한 자기계발(selp-help) 학교. 대학들이 학문을 추상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비판의식에서 출발했다. 이곳에서는 회사생활·인간관계·정치·여행·가족 등 일상생활에서 겪는 주제를 주요 과목으로 강연회를 열고 토론한다. 학교는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 삶의 한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철학을 내세웠다. 함께 식사하며 토의하는 강좌, 개인 대상부터 커플 혹은 가족용, 주중 저녁, 주말, 그리고 휴가용 등 다양한 교실이 열린다. 70 Marchmont Street, London WC1N 1AB, tel 020-7833-1010, www.theschooloflife.com

리빙 아키텍처(살아 있는 건축)

알랭 드 보통이 영국 건축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겠다는 포부로 시작한 비영리 기구. 실력파 건축가들과 함께 영국 곳곳의 시골에 모던한 형식의 주택을 짓고, 일반 사람들이 호텔처럼 이용하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에 멋진 건축가들이 작업한 주택에서 직접 자고 식사하는 경험을 해 보게 함으로써 어떤 곳에서 살아야 하는지 비전을 제시하고 건축의 가치를 알리겠다는 뜻을 담았다. 네덜란드 설계회사 MVRDV 등 국제적 건축가들이 참여해 지금까지 5호가 지어졌다. 특히 5호는 오는 12월 완공 예정인데도 내년 1월부터 6월분까지 예약이 완료된 상태다. 6호는 스위스 출신 건축가 피터 줌토르가 설계했다. www.living-architecture.co.uk

j 칵테일 >> “아빠 왜 TV 안 고쳐요?”

고정관념이 깨졌다. 글을 쓰는 작가가 좋은 아빠, 좋은 엄마가 되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해 왔다. 그런데 알랭 드 보통을 만나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다. 일곱 살, 다섯 살짜리 아들 둘을 둔 아빠인 그는 ‘교육 참여형’ 아빠였다. 아이들을 키우며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을 물으니 망설이지 않고 “No TV!(TV 안 보기)”라고 외쳤다. 부부 침실에 텔레비전이 있지만 아이들에게는 TV가 고장 났다고 말해 왔다고 했다. “아이들이 ‘왜 TV를 고치지 않는 거예요?’라고 묻곤 해요. 심지어 엄마·아빠 방에 TV가 켜진 걸 본 아이에게 ‘아 그건 네가 꿈을 꾼 거야’라고 말했을 정도죠.” 짓궂은 표정으로 웃었지만 진지함이 묻어났다. “컴퓨터나 TV 같은 것들은 나중에 어른이 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그는 “요즘 아이들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집중력이다. 아이들에게 집중력을 키워주는 데 신경을 많이 쓴다. 컴퓨터나 TV에 의존하는 것은 가능한 한 천천히 배우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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