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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장인 - 디자이너 공예 프로젝트 ② 입자장 박창영+디자이너 박진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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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8면

박창영 입자장(왼쪽)과 박진우 디자이너가 협업해 만든 갓 조명 작품 ‘현인의 그림자’를 사이에 두고 포즈를 취했다. 양태 가운데에 철골 구조가 들어가 인공위성처럼 전후좌우 180도 회전이 가능하다.


조선시대 선비의 기품이 서린 갓을 만드는 장인 박창영(68)씨와 제품·인테리어 등 다방면에 걸쳐 발랄한 색감을 뽐내는 디자이너 박진우(38)씨. 장인·디자이너 공예 프로젝트의 두 번째 조합이다. 언뜻 어울리지 않을 법한 이들이지만 자신의 색깔을 한 발 물리고 서로의 강점을 보강하며 뜻과 솜씨를 모았다. 디자이너는 발랄함을 접었고, 장인은 형태를 일부 생략했다. 내놓은 작품은 갓으로 만든 조명 ‘현인의 그림자’. 선비의 흰 얼굴에 농밀한 음영을 지워 무게를 더하던 갓은 LED 조명을 받고 실내에서 촘촘한 그림자를 펼쳤다.

글=이정봉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디자이너, 갓의 아우라에 반하다

박창영 입자장이 인두로 양태를 구부려 곡선을 만드는 ‘트집 잡기’를 하고 있다.

지난 6월 박창영 장인과의 첫 만남. 박진우 디자이너는 그 동안 알아왔던 갓에 대한 막연한 이미지를 수정해야만 했다. 가느다란 실로 짠 직물처럼 하늘하늘한 느낌이 아니라 꽉 짜인 동물의 뼈대 같았다. 검은빛이 촘촘하게 내려앉았고 매끈하게 부풀었다 내려앉는 양태(갓의 챙 부분)의 곡선은 탄탄했다.

“죽사(대나무실)로 만들어 그렇소.” 박 장인이 말했다. 삶은 대나무 껍데기를 칼로 훑어 아주 얇게 만든 뒤, 끝에 칼집을 내고 머리카락 한 올 굵기로 벗겨낸다. 박 디자이너는 갓을 내려다봤다. 갓은 가벼운 감이 적었고 짱짱한 힘이 느껴졌다. 박 디자이너는 “망사가 빛을 은근히 비춰내는 느낌의 조명을 떠올리고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디자인해야겠다”고 말했다.

며칠 후 장인은 디자이너를 서울 세종로 국립민속박물관으로 데리고 갔다. 옛적부터 현대까지 모자와 신발을 전시하는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전시실 불빛 아래 놓인 갓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조직이 치밀하고 섬세했다. 박 디자이너는 “갓의 표면에서, 그리고 그 표면을 통과해 나온 빛이 번지는 모양새에 아우라가 굉장했다”며 “그 섬세한 질감만 살리면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박진우 디자이너의 스케치.

6월 말부터 박 디자이너는 스케치에 들어갔다. 박 디자이너는 신윤복의 그림을 떠올렸다. 그림에서 양반들이 쓴 갓은 유난히 넓었고, 그래서 스타일리시하게 보였다. 박 장인은 “갓은 멋쟁이 양반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며 “우리 조상은 지름이 넓을수록 더 멋스럽게 느꼈다”고 설명했다.

박 디자이너는 갓을 조명을 두르는 셰이드로 쓰고자 했다. 대우(갓의 모자 부분)는 두고 양태만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갓이 조명을 덮고, 조명 아래 거울을 둬 빛을 반사시키면 다시 은은한 빛의 번짐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미래적 곡선미 뽐내는 갓 조명

지난 7월 서울 당산동 박진우 디자이너의 작업실에서 박 디자이너가 조명이 잘 받도록 양태의 각도를 조절하고 있다.

7월 초 박 디자이너는 기본 디자인을 들고, 장인은 곡선미를 살린 양태를 들고 다시 만났다. 갓으로 셰이드를 씌웠지만 장인·디자이너 둘 모두 모양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박물관에서 봤던 갓의 아우라가 느껴지지 않았다. 실험을 거듭하자 갓의 그림자가 가진 질감이 차츰 눈에 들어왔다. 죽사들이 얽힌 문양이 LED의 강한 빛을 만나자 그 그림자가 벽을 수놓았다. “그래, 이거다.” 조명 그 자체가 아니라 갓이 만드는 그림자가 주인공인 조명을 만들기로 둘은 뜻을 모았다.

갓의 촘촘한 그림자는 시간의 결정체다. 오랜 시간을 들여 장인이 간단한 도구와 손놀림만으로 짓는다. 그 수고로움의 핵심, 아름다움의 정수는 양태다. 양태장이 만든 대나무를 엮어 만든 양태는 평평한 상태다. 갓을 만드는 입자장이 가장자리를 정리하고 아교를 먹인 뒤 달군 인두로 양태를 지지면서 휘어준다. 이를 ‘트집 잡는다’고 한다. 양태가 휜 모양새가 장인의 솜씨를 말해준다. 잘 만든 갓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한결같이 봉곳한 형태를 만든다. 여기에 명주실을 올리고 옻칠을 하면 양태 하나를 제대로 만들어내는 데 보름이 걸린다.

박 디자이너는 보통 만드는 갓의 지름인 35㎝보다 더 큰 갓을 요구했다. 크기가 커야 공간을 지배하는 정도의 그림자가 남는다. 그래야 그림자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니까 신윤복의 그림에 나오는 정도의 큰 갓이다. 박 장인은 “45㎝가 적당할 것”이라고 했다. 갓의 촘촘함을 포기하고 약간은 성긴 듯한 질감으로 만들기로 했다. 그래야 죽사가 엮는 그림자가 또렷하게 보인다. 갓은 촘촘할수록 상품으로 치고, 성길수록 하품이다. 디자이너는 장인에게 일부러 솜씨를 덜 부리기를 요구했다. 박 장인은 “이번 작품은 갓 그 자체가 아니라 조명”이라며 흔쾌히 받아들였다.

갓으로 만든 조명은 그물처럼 빛을 걸러냈고, 그 자리에 단정한 무늬를 남겼다. 양태가 이룬 곡선도 그저 봉곳한 게 아니라 스포츠카의 유선형처럼 날렵한 곡선을 이뤘다. 박 디자이너는 “LED 조명 위에 걸린 갓은 인공위성이나 UFO처럼 미래적 느낌을 주기도 한다”고 했다. 박 장인은 “세계적으로 갓과 같은 방식으로 만드는 모자는 없다”며 “다른 나라 사람이 봐도 정교함과 고급스러움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잘 만든 갓 하나 값, 예전엔 쌀 세 섬

박 디자이너의 작업실에서 박 입자장과 아들 형박씨, 그리고 박 디자이너가 의견을 나누고 있다.

이번 작품은 양태 부분만 활용해 만들었다. 갓의 구조는 크게 양태와 모자로 나뉜다. 갓의 챙 부분이 양태, 원통형으로 불쑥 나온 부분이 모자다. 각 부분을 만드는 장인이 따로 있다. 하지만 입자장은 이를 가지고 죽사·촉사(비단)·명주나 포를 이용해 덧씌우거나 겹쳐 붙이고 인두로 지져 모양을 변형하는 등의 작업을 해 갓을 짓는다.

 양태작업의 핵심은 인두로 지져 곡선미를 만드는 트집 잡기다. 그 위에 먹칠을 하고 명주·삼베를 얹거나 죽사·촉사 등을 한 올씩 올려 붙여 무늬를 만든다.

 모자 부분은 대우와 모정으로 나뉜다. 원통의 둘레가 대우이고 덮는 부분이 모정이다. 대우와 모정, 그리고 양태는 서로 맞닿는 부분마다 장식과 엮는 방법이 다양하다. 대우를 실로 장식하거나 포를 씌워 꾸민다.

 대나무로 실을 만들어 붙이고, 철대로 이음매마다 연결하고 먹칠하는 등 공예 분야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복잡한 공정을 자랑한다. 그래서 잘 만든 갓 하나의 가격이 예전에는 쌀 세 섬 이상, 요즘은 500만원을 호가한다. 그래서 늘 양반집에서 갓은 가장 높은 곳에 걸어 어린 아이의 손이 닿지 못하도록 했다. 양태 부분은 죽사로 만드는 것이 전통적인 방식이나 모자 부분은 말총·명주 등으로 만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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