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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래 에디터의 경제 패트롤] 차기 대통령 챙기는 예산이라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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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김시래
에디터

정권 말기 현상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최근 돌발적으로 터진 ‘전력 대란’도 그중 하나다. 이렇게 확 드러나는 것도 있지만 사실 정권 말기 현상은 드러나지 않는 게 더 많다. 슬그머니 대통령 전용기(공군 1호기) 도입을 추진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청와대는 전두환 전 대통령 이후 미국의 에어포스 원과 같은 보잉 747급 비행기를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에서 임차해 쓰고 있다.

 우선 김대중 전 대통령 임기 말로 거슬러 가보자. 당시 청와대 핵심 인사는 대통령 전용기를 사자고 야당 국회의원들을 설득하고 다녔다. 전용기 도입은 국회 승인 사항이다.

 “우리가 이용하자는 게 아니고 차기 대통령을 위해서 사자는 거다.”

 하지만 야당이던 한나라당 의원들은 그럴 돈이 있으면 육군에 헬기나 사주라고 핀잔을 줬다. 육군 헬기는 현재도 10대 중 4대(40%)가 30년 이상 됐다. 1972년 이후 38년간(지난해 기준) 94대의 헬기 추락 사고로 장병들이 희생된 근본 원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임기 말. 청와대는 1000억원짜리 전용기 도입을 다시 추진했다. 명분도 똑같다.

 “우리는 구입만 해주고 차기 대통령이 쓰는 거다.”

 그때도 야당이던 한나라당은 공식 브리핑에서 “노무현 정권은 다음 정부 대통령 전용기나 챙겨줄 만큼 한가하냐”고 면박을 줬다. “그럴 예산이 있으면 빈곤층이나 도와주라”고도 했다. 이젠 이명박 대통령 임기 말이다. 민주당에서 한나라당으로 여야가 바뀌었는데도 ‘판박이 정권 말기 현상’은 또 나타났다. 정부는 대통령 전용기 도입을 다시 추진 중이다. 차기 대통령이 쓸 전용기라는 말도 그대로다. 지난해 예산안까지 마련했다가 중단된 뒤 이번에는 한국국방연구원(KIDA)의 연구용역 보고서까지 만들었다. 전용기를 20년 이상만 쓰면 임차하는 것보다 비용 면에서 낫다는 논리다. 미 보잉사의 747-8 기종이 유력하다고 한다. 값은 5000억원이 넘는다. 굳이 빗대자면 올해 청년 창업예산은 2000억원이다.

 그렇다면 왜 너나없이 차기 정권을 위한 전용기를 사주지 못해 안달일까? 예나 지금이나 비행기와 선박을 살 때는 ‘로비스트’ ‘리베이트’라는 단어가 따라다닌다. 그래서 5000억원이 넘는 전용기에 목을 매는 사람들의 속내가 수상쩍다는 말을 듣는 건 당연하다. 한국은 국제 항공업계에서 소문난 봉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 때 들여온 F-16 전투기 사건을 국민들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비행기 값 협상 끝에 계약을 하고 돌아서자 엔진 값을 따로 내야 한다는 황당한 일까지 당했다.

 진짜 부자들은 다 아는 얘기가 있다.

 ‘요트를 자주 즐긴다고 요트를 사면 바보고, 비행기를 자주 탄다고 비행기를 사면 바보다.’

 일년에 한두 번 타기 위해 요트나 비행기를 사면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자라는 지적이다. 사는 순간부터 돈만 먹는 애물단지가 되기 때문이다.

 국제적 위상에 걸맞은 대통령 전용기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일리는 있다. 웬만한 대기업 총수들도 전용기로 해외에 나가는 시대다. 그러나 총수들은 자기가 번 돈으로 전용기를 사고 해외에 나가서 더 많은 돈을 벌어 가지고 온다. 반면 정부는 국민이 낸 세금을 쓰기만 하는 조직이다. 정부 씀씀이를 아무리 엄격한 잣대로 감시해도 지나치지 않은 이유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참고할 만한 사례는 없을까. 미국과 러시아는 강대국다운 전용기를 자랑한다. 미국의 에어포스 원이 그렇다. 러시아의 푸틴도 방한 때 전용기를 5대나 띄웠다. 어느 비행기에 탔는지 모르게 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이런 수준의 위용을 과시할 필요가 있을까. 독일과 이스라엘은 중고 여객기를 사서 전용기로 쓴다. 그렇다고 이들 나라의 국격이 떨어졌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영국과 페루는 아예 전용기가 없다. 대처 총리 방한 땐 여객기 1등석을 타고 왔다. 페루의 가르시아 대통령은 정상회담 때 뉴욕 경유 서울행 일반석을 끊고 왔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굳이 대통령 전용기를 사야 하는 건지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이명박 정부는 자칫 ‘747경제(7% 성장, 4만 달러 소득, 7대 강국)’ 공약은 내팽개치고 ‘747전용기’만 샀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김시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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