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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대금과 비싼 소작료 악용 … 토지·가옥 ‘합법적 강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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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호 26면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동척(東拓)은 일본이 별다른 자본금을 들이지 않고 한국의 토지를 강탈하기 위해 세운 국책 회사였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식민통치 구조
② 토지 획득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일본은 1904년 기를 쓰고 러일전쟁에서 승전해 대한제국을 차지하게 됐지만 경제구조로 볼 때 식민지가 절실한 상황은 아니었다. 일본 자본주의는 과잉 생산된 상품과 잉여 자본을 유통시키기 위한 식민지가 필요할 만큼 발전하지 못했다. 군사력만 이상(異常) 비대한 기형 구조였다. 그러니 결국 군사력으로 식민지의 토지를 빼앗는 원시적 자본 축적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1904년 5월 각의(閣議)에서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편입시키기 위한 대한방침(對韓方針)과 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을 결정했다. 일본인들의 토지 소유권 확보가 주요한 내용으로 들어갔다. 대한시설강령에서 일본은 “현 시점에서 조약상 거류지 외 1리 내의 토지를 임차 내지 소유할 수 없으므로 내지에서 전연(田烟:토지)을 소유해도 그 권리가 명확하지 않아 자본가가 불안을 가지고 투자를 주저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1 1910년 무렵의 남대문 거리. 2 2대 통감 소네 아라스케. 3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총재 이기용.

그러면서 “농업자본가를 위해 한국의 내지를 개방시킬 수단으로 두 가지 방책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나는 관유황무지(官有荒蕪地)를 개간하는 방법으로 차지하는 방법이었고 다른 하나는 민유지도 일본인이 사거나 영구대차권처럼 사실상 일본인이 차지하는 것을 한국 정부가 인정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외피라도 남아 있는 한 이는 쉽지 않았다. 대한제국 정부는 외국인에게 토지를 파는 문제만큼은 강경하게 대응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 정부는 광무(光武) 9년(1905) 4월 29일 형법 제200조 5호로 외국인에게 토지를 매매하는 행위를 엄격하게 금지시켰다. 이 법은 “일체의 전토(田土)·삼림(森林)·천택(川澤)·가옥(家屋)을 외국인에게 몰래 팔거나 혹 외국인에게 붙어서 차명(借名)으로 속여서 팔거나[詐認] 혹 차명으로 속여서 파는 자에게 그 정(情)을 알면서도 고의로 판 자는 교수형에 처하고 멋대로 허락한[擅許] 해당 관원도 같은 죄로 처벌한다”고 규정했다. 백성들이 외국인에게 토지를 몰래 팔거나 중개하면 사형에 처하고 이를 허락한 관료도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었으니 일본인의 토지 소유 확대는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조선통감부를 설치하면서부터였다. 일본은 1905년 9월 포츠머스 조약으로 러시아와 강화협상을 체결하고 두 달 뒤인 11월에는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이듬해 2월에는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통감으로 임명했다. 통감은 대한제국 황제가 아니라 일본 천황에게 직속된 친임관(親任官)이었다.

대한제국의 심장부를 접수한 통감부는 토지 소유 확대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1906년 11월 토지가옥증명규칙(土地家屋證明規則)을 반포해 일본인들의 토지 소유를 합법화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자본력이 우세한 일본인들은 흉년이 들어 토지값이 폭락하면 싼값에 사들일 수 있었다. 대한제국의 농지 가격이 일본에 비해서 헐값인 데다 전호(佃戶:소작인)에게 경작시킬 경우 도조(賭租:소작료)가 수확량의 50% 이상이었으니 꿩 먹고 알 먹는 구조였다.

토지가옥증명규칙과 쌍둥이 법이 그해 12월 반포된 토지가옥 전당집행규칙(土地家屋典當執行規則)이었다. 일본인들이 고리대로 빚을 놓아 제때 갚지 못하면 전당 잡은 가옥이나 토지를 빼앗을 수 있게 한 법이었다. 이 두 법에 의해 일본인들의 토지 소유는 급격하게 확대되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토지 확대에 대한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1908년 2월 대리 통감 소네 아라스케(曾<79B0>荒助)가 외무대신 하야시(林董)에게 보낸 통감부 비밀보고(機密統發) 205호가 이를 말해준다. 소네는 보고서에서 ‘각지에서 폭동(의병)이 봉기해 아직까지도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는 이때, 한국정부가 내지에서 외국인들의 토지 소유 금지 제도를 폐지했을 때 일반 인민들의 오해를 자초하거나 간악배들에게 우둔한 인민들을 선동시키는 구실을 제공할 우려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므로……(토지·가옥 매매에 대한) 공적인 포고와 통고는 적당한 시기가 도래할 때까지 보류……(해야 한다)”고 보고하고 있다. 일본인들의 토지 소유 확대가 농토를 신앙처럼 여기는 한국 농민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 의병에 가담케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보류 조치들은 의병이 진압될 때까지 한시적인 조치에 불과했다.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 삼아 1907년 7월 ‘한일신협약’이 체결되면서 조선 통감은 한국수비대 사령부의 병력을 사용할 수 있는 군사권, 1년 이하의 금고형과 200원 이내의 벌금형을 부과할 수 있는 사법권, 행정 사무 집행 후 한국 정부에 통보하는 행정권까지 갖게 되었다. 조선통감이 3권을 장악하자 통감부는 1907년 7월 ‘국유미간지(國有未墾地) 이용법’을 발포했다. 개간이란 명목 아래 일본인들이 국유지를 차지할 수 있게 한 법이었다. 주요 조항들은 다음과 같다.

1. 국유미간지, 즉 민유지가 아닌 원야(原野:미개척 벌판)·황무지·초생지(草生地:풀이 난 물가 땅)·소택지(沼澤地:습한 풀밭) 및 간사지(干瀉地:간조 때 바닥이 드러나 보이는 땅)를 대부 받을 자는 농상공부 대신에게 출원하여 허가 받아야 하며, 대부 기간은 10년을 초과할 수 없다.

1. 대부받은 자는 농상공부 대신이 정하는 대부료를 납부해야 하고 농상공부 대신은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 이를 감면할 수 있다.

1. 대부를 받은 자가 예정 사업에 성공했을 경우 농상공부 대신은 그 토지를 불하 또는 대여할 수 있다.

1. 본법(국유미간지 이용법) 및 시행세칙 규정에 의거한 처분은 통감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이 법의 핵심은 일본인들이 황무지를 대부 받아 10년 내에 개간에 성공하면 소유권을 인정하겠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 법에 의거한 처분은 통감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통감부의 뜻대로 처리되게 만들었다. 이런 토대 위에서 일본이 국가 차원에서 대한제국의 토지 강탈에 나선 것이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이하 동척) 설립이었다. 그 전에도 일본인들은 대창(大倉)·동산(東山)·촌정(村井)·웅본(熊本)농장 등을 설립해 토지를 차지해왔지만 동척(東拓)은 차원이 달랐다.

동척(東拓)은 개인 소유 회사가 아니라 1908년 3월 일본 의회에서 특별법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법’을 공포하고 설립한 회사였다. 동척의 주요 대상지가 한국이었으므로 일제는 이 법을 대한제국에 실시할 것을 강요했고, 순종은 재위 1년(1908) 8월 26일 동양척식주식회사법을 비준할 수밖에 없었다. 동척법은 “토지를 개척하고 주민을 이주하는 사업을 경영할 목적으로 설치하여 본점을 서울에 두고 지점을 일본 동경과 그 밖의 지역에 둔다”고 규정했다.

동척은 대한제국의 토지를 확보하고 일본인들을 이민시키기 위한 회사였다. 동척의 영업과목은 “1)농업 2) 토지의 매매 및 대차(貸借:임대차) 3)토지경영 및 관리 4)건축물의 축조와 매매 및 대차 5)한국과 일본 이주민의 모집 및 분배 6)이주민 및 농사짓는 사람에 대하여 토지 개척과 이주에 필요한 물품의 공급과 그 생산물과 획득한 물품의 분배 7) 토지 개척과 주민 이주에 필요한 자금의 공급” 등이었다. 단적으로 식민지 농업개발회사였다.

이 법은 ‘총재(總裁) 1인은 일본인으로 일본국 정부에서 임명하고 부총재(副總裁) 2인은 한국인과 일본인 각 1인’으로 임명하고, 임원의 ‘3분의 2는 일본인으로 임명한다’고 규정했다. 동척의 초대 총재 우사가와 가즈마사(宇佐川一正)가 1908년 12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조슈(長州)군벌 출신이란 점은 군사적 폭압에 기대지 않고서는 운영할 수 없는 수탈 회사라는 뜻이었다. 민영기(閔泳綺:망국 후 남작 수여)가 한인 부총재였다. 창립자본금 1000만원은 1주당 50원으로 모두 20만 주였는데, 6만 주는 한국 정부에 토지로 구입하게 했다.

그래서 한국 정부는 논 1만2523정보, 밭 4908정보를 비롯해 도합 1만7714정보를 출자했다. 일본 왕실은 500주, 일본 왕족은 1000주, 한국 왕실은 1700주를 배당받았다. 나라를 빼앗으면 한국 정부 출자 토지는 고스란히 일제가 차지하게 되어 있었다. 한국 정부와 왕실, 일본 왕실에 배정한 6만7700주를 제외한 13만2300주를 일본과 한국에서 공모했는데 일본에서는 응모주수가 공모주수의 35배에 달하는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한국 내 응모주수는 공모주수의 1.9%에 불과했다.

회사라는 이름의 수탈 기구를 한국인들은 공포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1926년 의열단원 나석주(羅錫疇)가 동척에 폭탄을 투척한 것은 한국인들의 이런 시각이 가미된 것이었다. 동척(東拓)은 일본이 한국을 어떻게 지배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