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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대필해주며 우정도 성적도 쑥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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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서강대 정연재(오른쪽)씨가 이상진(지체장애 2급)씨를 부축하며 캠퍼스를 걷고 있다. 정씨는 올해 이씨의 ‘도우미’가 되어 강의실 이동과 수업 대필을 도왔다. [최명헌 기자]

“으악!” 지난 1일 서울 마포구의 서강대학교 정문 앞. 이상진(26·경제학과 4·지체장애 2급)씨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손에 들고 있던 음료수도 다 쏟아져 버렸다. 한 발 앞서가던 정연재(23·경제학과 3)씨가 황급히 뒤를 돌아보고 뛰어와 이씨를 일으켜 세웠다. “여기 턱이 있었네. 같이 걸을 걸 그랬다. 얼른 씻고 오자, 형.” 정씨는 이씨를 부축해 체육관으로 향했다. 내리쬐는 햇볕 아래 두 사람의 등에는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두 사람은 교내 천주교 단체 ‘서강 복사단’을 통해 입학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다. 이씨는 선천성 뇌성마비로, 말이 조금 어눌하고 걸을 때 다리를 절뚝거린다. 계단을 오를 때는 부축이 필요하다. 지난 1학기 ‘거시경제학’수업을 같이 듣게 되자 정씨는 학교의 장애학생지원센터에 신청해 이씨의 도우미가 됐다. 월요일과 금요일, 이씨의 강의실 이동을 도와주고 손이 빠르지 못한 이씨를 위해 필기도 대신 해주었다. 계절학기도 의기투합해 교양수업 ‘종교폭력과 평화’를 같이 들었다.

새로 시작하는 2학기에는 같이 듣는 수업이 없어 정씨는 다른 장애학생을 돕기로 했다. 이번 학기에는 ‘참선’수업에서 청각장애를 가진 학생을 돕는다. 정씨는 “도우미 수업이 1교시면 긴장돼요. 혹시나 제가 지각해서 장애인 친구에게 피해를 주면 안되잖아요. 주변 친구들은 피곤하지 않겠냐고 하는데 한 학기 내내 정신차릴 수 있어서 좋죠”라고 말했다.

캠퍼스에 장애인 학생들이 늘면서 정씨와 같은 도우미들의 역할도 중요해지고 있다. 대부분의 대학들은 장애학생지원센터를 만들어 도우미를 연결해준다. 도우미들은 주로 강의를 대필해준다. 장애의 정도나 종류에 따라 캠퍼스 내 이동을 돕거나 학습지도를 하기도 한다.

이상진씨의 경우 지금까지 정씨를 포함해 7명의 도우미를 만났다. 이씨는 “필기가 많은 수업은 혼자 듣기 정말 어렵다”며 “도우미들 덕분에 이번 학기만 마치면 무사히 졸업을 하게 돼 고맙다”고 말했다. 사실 난감했던 경험도 있다. “2년 전 공대 다니는 친구가 경제학 수업 대필을 해줬어요. 그런데 본인이 이해 못한 내용을 무작정 받아 적어 놓으니까 공부할 때 더 힘들더라고요.”

서강대에 이번 학기 등록을 한 장애인 학생은 70여명. 이 중 30여명이 도우미를 필요로 한다. 지원센터는 장애인 학생들과 도우미 지원자들의 시간표에 맞춰 서로 연결시켜 준다. 장애인 친구를 돕고 싶어도 같이 듣는 수업이 없거나 공강시간을 이용할 수 없으면 도우미가 되지 못한다. 최민주(21·여·신문방송/국문학과 3)씨도 2010년 1학기엔 ‘기본영어’를 청강하며 청각장애 신입생을 도왔지만, 그 뒤 두 학기는 연거푸 도우미 ‘탈락’의 아픔을 맛봤다. “드디어 이번 학기엔 다시 청각장애 학생을 돕게 됐다”는 최씨는 “도우미가 되면 수업을 열심히 들어야 하니 봉사도 하고 성적도 오르고 일석이조”라고 말했다. 그는 “기왕이면 같은 전공 학생을 돕는 게 수업 내용을 더 잘 이해해서 필기도 제대로 해줄 수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서강대는 효과적인 도우미 활동을 위해 2주에 한 번씩 도움 준 부분과 개선점을 써서 제출하도록 한다. 개강 일주일 전에는 간호사와 사회복지사가 도우미 학생들을 모아놓고 장애에 대한 기본 인식을 갖도록 돕는다. 서울대 도우미들도 매달 25일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학교마다 차이가 있지만 장애학생 도우미 활동을 하면 봉사활동 확인서·장학금·봉사학점 중에 선택해 받을 수 있다. 한 학기 동안 한 과목 도우미 봉사를 하면 10만원 안팎의 장학금이 나온다. 연세대 장애학생지원센터의 이주희씨는 “전에는 순수한 자원봉사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 학기 말로 갈수록 중도포기 하거나 성실하게 임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지난해부터는 책임감을 갖도록 하기 위해 대부분의 학생이 장학금을 받도록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장애학생이 1~2주 수업을 듣고는 어려움을 느껴 스스로 수업을 철회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서강대 장애학생지원센터 정연희 팀장은 “도우미가 있어도 일반 학생들과 같은 수업을 듣는 다는 것이 장애 학생들에게는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센터에서는 도우미들이 단순히 수업보조에만 그치지 않고 장애학생에게 자신감을 부어주는 역할도 할 수 있도록 틈틈이 격려한다”고 말했다.

지난 6월부터 두 달여간 시각장애 대학원생의 논문 검색과 대독을 도운 유란희(23·여·연세대 행정학과 4)씨는 “도움 받는 걸 미안해 하는 장애학생 모습에 도리어 더 미안했다”며 “장애학생과 도우미 사이에 친밀감이 형성되면 더 성실하게 봉사할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글=윤새별 행복동행 기자
사진=최명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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