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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55세로 별세한 삼성 2군 감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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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고 장효조씨가 7월 22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레전드 올스타 베스트 10 사인회에 참석해 밝게 웃고 있다. 고인이 팬들과 만난 마지막 행사였다. [임현동 기자]

‘영원한 3할 타자’가 영면했다. 프로야구 타격왕 장효조(삼성 2군 감독)씨가 7일 오전 7시30분 부산 동아대 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55세.

 고인은 지난 7월 갑자기 체중이 줄어 병원을 찾았다가 위암과 폐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프로야구 30주년 레전드 올스타 10명 중 한 명에 뽑혀 7월 23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올스타전에 참석한 것이 팬들과의 마지막 인사가 됐다.

 1956년 7월 6일 부산 동래구에서 출생한 고인은 대구 삼덕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대구상고(현 상원고) 2학년 때 팀을 전국대회 3회 우승으로 이끌며 ‘대구상고 전성시대’를 열었다. 2·3학년 때 열린 8개 전국대회에서 다섯 차례나 타격왕이 됐다.

 한양대 2학년이던 76년 백호기 대회에선 실업 선배들을 제치고 타격왕이 됐다. 이 대회 타율은 무려 0.714(14타수 10안타)였다. 그리고 그해 최연소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뽑혔다. 77년 니카라과 수퍼월드컵에선 한국야구 사상 첫 국제대회 우승에 힘을 보탰다. 대학 졸업 뒤 포항제철과 경리단에서 활약했다.

1983년 프로 데뷔 당시 장효조씨 모습. [중앙포토]

 ‘투수는 최동원, 타자는 장효조’라는 말이 정설로 통하던 시절이었다. 그라운드 구석구석 타구를 보내는 그의 스윙은 ‘부챗살 타법’으로 불렸다. 그의 스윙을 기억하는 이들은 “공을 몸에 붙여놓고 자유자재로 밀고 당겼던 타자”라고 평한다.

 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한 고인은 83년 27세의 나이에 삼성 라이온즈 선수로 프로에 데뷔했다. 4월 개막 3연전 성적은 12타수 1안타. ‘장효조의 부진’은 화제였다. 그러나 한 달 뒤 타율 2위에 올랐고, 5월 10~15일 8연타석 안타를 기록한 뒤론 타격왕 등극이 기정사실이 됐다. 데뷔 시즌 타율은 0.369. 프로 첫 타격왕을 차지했다. 이후 85~87년 세 번 더 수위타자에 올랐다. 3년 연속 타격왕은 그가 유일하다.

 고인은 “한때 수위타자를 인생의 끝으로 알았다”고 술회했다. 89년 롯데로 트레이드된 뒤 92년 타율이 0.265로 떨어지자 은퇴를 발표했다. 시즌 중 고인은 “3할을 치지 못하면 은퇴할 것”이라고 했고, 자존심을 지켰다.

 그는 ‘천재’로 불렸다. 그러나 1m74㎝·70㎏의 체격으로 최고 타자가 되기까지는 지독한 노력이 있었다. 고인과 고교·대학 동기인 김한근 전 삼성 코치는 “매일 밤 스윙을 거르지 않았다. 한 번 배트를 잡으면 100번을 돌렸다”며 “고교 3학년 겨울 대한야구협회에서 유망 선수 합숙훈련을 했다. 덩치가 작은 친구가 120㎏ 바벨을 번쩍 들어올렸다. 거구의 윤동균 선배를 이겼다”라고 회상했다.

 장 감독의 아들 의태(28)씨는 “밥을 드시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됐는데도, 매일 저녁 야구 중계를 보며 응원했다. 삼성의 경기는 빼놓지 않고 보셨다”고 말했다. 고인은 숨을 거두기 2주 전부터는 하루에도 몇번씩 의식을 잃을 정도로 병세가 악화됐지만, 자신이 지도한 선수들에게 전화를 걸어 격려했다고 한다.

 통산 타율 0.331(역대 1위)와 최고 출루율(0.427), 그리고 1009안타 기록을 남기고 고인은 그라운드를 영원히 떠났다. 그러나 고인은 숫자만으로 기억하기에는 아쉬운 사람이었다.

구본능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는 지난달 취임 직후 “장 감독이 투병 중이다. 돌아가시기 전에 꼭 육성 테이프를 남기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육성을 들을 수 없다. 달인의 스윙은 야구팬의 추억 속에만 남았다.

글=최민규 기자
사진=임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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