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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tory] 현대 첩보소설의 대부, 프레드릭 포사이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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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발간 40주년을 맞은 『자칼의 날(The Day of the Jackal)』은 현대 첩보 스릴러의 교본으로 불리는 소설이다. 출간 당시 뉴욕타임스는 “스파이 소설의 걸작으로 꼽혀온 다른 책들이 ‘아동용 미스터리’로 느껴질 정도”라고 극찬했다. 치밀한 자료 조사 때문에 많은 킬러와 스파이, 테러리스트가 교과서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암살자의 매뉴얼’이란 별칭이 붙은 이유다. 그런데 작가인 프레드릭 포사이스(73)의 삶을 들여다보면 소설보다 더 소설 같다. 열아홉 살에 영국 공군 최연소 조종사가 됐고, BBC 기자 시절엔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내전을 취재했다. 냉전이 한창이던 1960년대 초에 공산국가의 여성 비밀경찰과 사랑을 속삭였는가 하면, 독일 함부르크에선 무기 암거래상에게 쫓기기도 했다. 영국 주요 언론을 상대로 거침없는 정치적 발언을 쏟아내고, 자신보다 서른 살 가까이 어린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와도 가까운 사이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이 사람, 도대체 정체가 뭔가.

김선하 기자

[사진 출처=Getty Images/멀티비츠]


●원래 꿈이 작가였나.

 “아니다. 어린 시절 꿈은 ‘비행’과 ‘여행’ 두 가지였다. 공짜로 날고 싶어서 열여섯 살에 영국 공군(RAF)의 장학금에 지원했다. 민간 조종사 자격은 열일곱 번째 생일 직후에 땄고, 열아홉에 공군 조종사가 됐다. 그런데 공군이 내가 정말 원했던 1인승 전투기 탑승을 보장할 수 없다더라. 그래서 군인 관두고 해외특파원이 되기로 했다. 또 하나의 꿈이었던 여행을 다니기 위해서 말이다.”

●특파원?

 “제대 후 (지방 언론에서) 3년간 훈련을 거쳐 1961년 로이터 통신에 들어갔다. 입사 6개월 만에 파리 특파원 발령을 받았다. 파리에서 OAS 조직원을 여럿 만났다. 이 경험이 샤를 드골 전 프랑스 대통령 암살미수 사건을 다룬 『자칼의 날』의 소재가 됐다.”

 ‘비밀군사조직’이란 뜻의 OAS는 실제로 드골 암살을 여러 차례 시도했던 프랑스의 극우단체다. 테러조직 사람들을 직접 취재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의 ‘특파원’ 경험은 이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영어·프랑스어 외에 독일어에도 능숙했던 그는 파리 특파원을 거쳐 1963년부터 공산국가였던 동독(동베를린) 특파원으로 활동했다. 역시 공산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와 헝가리도 함께 담당했다. 서방 기자로선 보기 드문 경력이다. 몇 해 전 체코 신문이 과거 기밀문서를 조사해 “포사이스가 프라하(체코의 수도)에 올 때마다 비밀경찰 StB 요원들이 그를 철저히 미행했다”고 보도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첩보 소설을 읽는 느낌이다. 스파이 소설에 나오는 것 같은 ‘로맨스’는 없었나.

 “체코에 갈 때마다 항상 미행이 따라붙었던 것은 사실이다. 로맨스라…. 한번은 바에서 예쁜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옆에 앉아도 되겠느냐’고 했더니 ‘좋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술을 한잔 사고, 저녁도 같이 먹었다. 매우 더운 날이었는데 마침 내가 차가 있어서 둘이 함께 근처 호수에 놀러 가 수영도 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미행이 안 보이더라. 내가 ‘StB는 어디 간 걸까’라고 중얼댔더니 그녀가 말하더라. ‘바로 여기 있잖아요.’”

 1965년 BBC로 직장을 옮긴 그는 2년 뒤 비아프라 전쟁(나이지리아 내전) 취재를 위해 아프리카로 떠났다. 분리독립을 선언한 비아프라 공화국과 나이지리아 연방 간에 벌어진 이 전쟁은 영국·프랑스·소련 등이 개입하면서 대규모 전쟁으로 번졌다. 포사이스는 얼마 뒤 회사와의 견해 차이로 BBC를 떠났지만 프리랜서 기자로 전쟁을 계속 취재했다.

●아프리카에선 용병들을 쫓아다녔다던데.

 “외인부대 출신의 용병대장(독일인)이 있었는데 외국어는 프랑스어밖에 못했다. 비아프라 사람들은 영어만 할 줄 아는데 말이다. 그래서 내가 통역으로 따라다닐 수 있었다. 이 경험을 나중에 국제 용병을 다룬 『전쟁의 개들』을 쓸 때 유용하게 써먹었다.”


●소설은 왜 쓰게 됐나.

 “솔직히 아프리카에서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완전히 빈털터리였다. 몇 푼이라도 벌어볼까 싶어 쓰기 시작한 거다.”

 세계적으로 1000만 권 이상이 팔린 『자칼의 날』은 그의 데뷔 소설이다. 포사이스는 이 책을 불과 35일 만에 썼다고 한다. ‘몇 푼 벌어볼까’해서 시작했다 엄청난 대어를 낚은 셈이다. 하지만 처음엔 책을 내주겠다는 출판사가 없었다고 한다.

●출판사에서 왜 안 받아줬을까.

 “내가 이 장르 소설의 모든 규칙을 다 깼다고 하더라. 제일 큰 문제는 내가 출판사를 돌아다닐 때까지도 살아 있던 드골을 실명으로 등장시키는 걸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제1장도 채 안 읽고 거절한 출판사도 있었다. 다섯 번째 출판사가 겨우 책을 내주겠다고 했다.”

●왜 드골의 실명을 썼나.

 “내 책의 배경은 1963년(소설은 71년 출간)이다. 63년 당시의 프랑스 대통령 이름을 ‘뒤퐁’이나 ‘푸르니에’로 한다는 게 말이 되나. 드골이란 걸 만천하가 다 아는데!”

 그는 이후에도 자신의 작품에서 실존 인물들의 실명을 그대로 써왔다. 1972년 출간한 두 번째 소설 『오데사 파일』에선 나치스 친위대 소속으로 강제수용소장으로 일하며 많은 유대인을 학살한 에두아르트 로슈만이 등장한다. 2차대전이 끝난 뒤 남미로 도망간 로슈만은 책이 나올 당시에도 계속 도피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이름은 안 썼지만 쓴 거나 다름없는 묘사도 종종 등장한다. 최근 국내에도 번역된 2010년작 『코브라』에는 ‘케냐인 아버지와 캔자스 출신 어머니’를 둔 미국 대통령이 나온다. 이 정도면 그냥 ‘버락 오바마’라고 쓴 거나 다름없다.

●왜 실명을 쓰나. 항의를 받은 적은 없나.

 “보다 직접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서다. 독자가 ‘아, 그 사람 알아’ ‘이 사건 기억나는군’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말이다. 이렇게 되면 나머지 부분들이 더 그럴듯하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지금껏 항의한 사람은 없다. 오히려 좋아했던 사람이 많은 것 같은데….”


●작가가 된 뒤론 별다른 ‘모험’은 없었나.

 “70년대 초 세 번째 책인 『전쟁의 개들』을 준비할 때였다. 책을 쓰려면 무기 암거래상의 세계를 알아야겠더라. 독일 함부르크에 무기 밀매 조직이 하나 있었다. 그래서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무기 구매자를 가장해 그곳을 찾아갔다. 얘기를 잘 마치고 호텔로 돌아갔는데 (밀매 조직과 연결해 준) 내 친구가 다급한 목소리로 “당장 도망가라”고 전화를 걸어왔다. 일단 허겁지겁 기차역으로 달려가 막 떠나려는 기차에 간신히 올라탔다. 알고 보니 나와 만났던 밀매 조직원이 서점에 붙어 있던 내 사진을 봤다더라. 운 나쁘게 내가 독일에 있는 동안 『자칼의 날』 독일어판이 나왔던 거지.”

 포사이스는 철저한 조사로 유명한 작가다. 심지어 『자칼의 날』에선 암살범 자칼마저 자신의 저격 대상인 드골에 대한 ‘정밀조사’에 나선다. 자칼이 목표 인물의 세세한 성격까지 파악하기 위해 드골의 회고록을 읽는 장면은 섬뜩할 정도다. 꼼꼼한 조사와 날카로운 묘사 덕에 ‘전쟁의 개’는 아예 국제 용병을 지칭하는 일반명사가 돼버렸다.

●왜 그렇게 조사에 집착하나.

 “독자로서 내가 책을 읽다가 작가가 사실 확인을 게을리한 것을 발견하면 참기 힘들다. 그런데 세상엔 나 같은 독자가 많다. 실수하면 바로 들통난다는 뜻이다. 그래서 내가 책에 언급하려 하는 곳은 가능한 한 방문한다. 필요하면 각 분야 전문가들과 상의도 하고 말이다.”

 조사가 철저한 만큼 자신감도 대단하다. 그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뉴욕이 무대인 『오페라의 유령 2(The Phantom of Manhattan)』를 쓴 직후인 2000년 CNN의 래리킹 라이브에 출연해 “내가 당시에 그 카페가 거기 있었다고 하면, 분명히 거기 있었다고 보면 된다”고 큰소리를 치기도 했다.

●이 책은 왜 썼나. 당신의 다른 첩보물과 확연히 다른데.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작곡한 앤드루 로이드 웨버와 저녁을 먹는데 속편을 만들고 싶다더라. 준비된 스토리는 없고 말이다. 그래서 내가 한 번 써보마 했다. 그간 용병·암살범·나치·살인자·테러리스트·특수부대원 같은 분야만 다뤄왔는데 내가 인간의 섬세한 ‘마음’을 제대로 그릴 수 있을지도 궁금했다. 나중에 앤드루가 맘을 바꿔 그냥 책만 단독으로 나왔다.”

 하지만 이 책은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역시 포사이스란 이름은 첩보 스릴러와 어울린단 얘기다. 이후 그는 다시 ‘본업’으로 복귀했다. 작품 스타일뿐 아니라 모험가 기질도 다시 살아난 듯하다. 2년 전 그는 아프리카의 기니비사우를 방문했다. 상상을 뛰어넘는 규모의 글로벌 마약 소탕 작전을 다룬 『코브라』의 자료 조사를 위해서였다. 기니비사우는 남미 콜롬비아의 코카인이 유럽으로 향하는 중간 기착지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새를 관찰하는 척하면서 코카인 운송망을 들여다보러 갔다”니 정말 대단한 열정이다. 그런데 그가 공항에 내리자마자 쿠데타가 일어나 이 나라 대통령과 육군 참모총장이 암살됐다. 국경이 막힌 뒤 그는 영국 주요 언론들의 ‘임시 특파원’ 노릇을 톡톡히 했다. 말 그대로 ‘사건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다.

●냉전 시기 당신 책들이 미국 CIA, 소련 KGB 요원들의 필독서였다던데.

 “어찌 보면 이상한 일인데 냉전 시대 스파이들은 스파이 소설 읽기를 즐겼다. 그들 자신을 다룬 얘기를 좋아하더란 말이다. 그리고 내 책엔 늘 (스파이들의) 사적인 얘기를 포함시켰는데 이 부분을 특히 좋아했다.”

●어둠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어떻게 얻느냐는 세계 언론의 질문에 ‘낮은 곳의 친구들’에게서 듣는다고 말해 왔다. 그들이 누군지 밝힐 수 있나.

 “사실 농담이었는데…. 특수 작전, 살인 병기, 폭탄 조립 같은 걸 어찌 그리 잘 아느냐고 하도 물어서…. 왜 사람들이 흔히 ‘고위층’ 친구들을 자랑하지 않나. 그래서 나는 거꾸로 ‘낮은 곳’에 친구들이 있다고 말한 거다. 진짜 농담이라니까.”

●‘좋은 영웅’보다 ‘좋은 악당’ 찾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해 왔다. 냉전이 끝난 뒤 글쓰기가 전보다 어려워지진 않았나.

 “냉전이 끝났다고 달라진 건 없는 것 같다. 세상엔 아직도 무시무시한 악당이 너무 많다. 콜롬비아의 마약왕을 떠올려보라. 북한의 강제수용소를 운영하는 ‘괴물’들은 또 어떻고. 내 책의 줄거리는 정형화돼 있다. 완벽하다고 할 순 없어도 선한 사람들은 결국 승리한다. 악한 사람들은 패하고 말이다. 이게 실생활에서 항상 그렇진 않다는 건 나도 알고, 독자들도 안다. 하지만 적어도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야 한다’는 위안은 주지 않나.”

●20권 가까운 책을 냈는데 총 판매 부수는 얼마나 되나.

 “다 합쳐서 7000만 권 정도로 알고 있다. 하지만 해적판이 나온 나라도 많아 정확히는 나도 모르겠다.”

●성공 비결을 꼽는다면.

 “나는 일상의 지루함에 지친 사람들에게 책을 통해 이렇게 말해 왔다. ‘나와 함께 갑시다. 당신이 막연하게 들어온 것들의 실체를 알려줄 테니. 어둠과 그 어둠 속에 사는 사람들을 보여 드리겠소.’ 사람들은 이런 걸 좋아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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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싫어하는 포사이스 … 인터뷰도 팩스로

“ 누가 ‘러브 e-메일’ 모음집 읽겠습니까 ”

포사이스의 팩스 답변서.


프레드릭 포사이스는 청소년기부터 독특한 면이 많았다. 스페인에 머물 때는 투우를 배우기도 했다. 외국어 공부도 좋아했다. 젊은 시절엔 영어·불어·독어·스페인어·러시아어·이탈리아어 6개 국어를 구사했다고 한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외국어를 배웠나.

 “다른 언어를 듣는 ‘귀’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내가 아홉 살 때부터 여름방학 때마다 프랑스에 보냈다. 열세 살 됐을 땐 영어·불어 두 가지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됐다. 이후 3년 동안은 (방학 때마다) 독일에 가서 독어를 배웠다. 러시아어는 학교에서 배웠고, 스페인어는 고교 졸업 후 군 입대 전에 몇 달간 스페인에 머물면서 익혔다. 이탈리아어는 더듬더듬 하는 정도다. 사실 러시아어도 연습 부족으로 이젠 대부분 잊어버렸다.”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밝혀왔는데. 영국 보수당 지지자라고 들었다.

 “나는 보수주의자고, 어느 정도까지는 보수당 지지자다. 정치적 입장을 얘기하자면 나는 유럽연합(EU)에 반대하며, 이를 분명히 밝혀왔다. 내가 ‘유럽’을 싫어해서가 아니다. 민주주의가 최상의 정부 형태라는 내 믿음에 반하기 때문이다. EU는 선출된 권력이 아니다. 이는 사람들을 얕잡아보는 것이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와의 인연은.

 “그가 보수당 당수가 된 다음에 만났다. 내가 캐머런 총리에게 항상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함께 문제를 논의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남자다. 이따금 편지를 주고받는다(캐머런은 2008년 포사이스에게 군 관련 조사위원회를 이끌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반면 고든 브라운 전 총리(노동당)는 자기 눈엔 100% 옳았을지 모르지만 실제론 ‘멍청이(idiot)’라고 본다.”

●사기를 당해 거의 전 재산을 날린 적도 있다던데.

 “1990년에 내 돈을 관리하던 사람이 운영하던 회사가 망했다. 그제야 경찰은 그가 고객 돈을 횡령해 왔다는 걸 발견했다. 20년간 일하며 모은 재산이 몽땅 날아가고 다시 무일푼이 됐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50대 초반이라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다섯 권의 소설을 더 쓴 뒤 간신히 회복할 수 있었다. 그에게 사기를 당한 노인 중엔 인생이 완전히 망가진 사람도 많았다.”

 포사이스는 아직도 ‘컴맹’에 가깝다. j와의 인터뷰도 “서면으로 하자”고 해서 e-메일을 예상했더니 타이프라이터로 꾹꾹 찍은 답변서가 팩스로 날아왔다.

●왜 컴퓨터를 안 쓰나. 불편하지 않나.

 “마음만 먹었다면 익힐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나는 스크린보다는 사람들을 보며 대화하는 게 더 좋다. 인터넷에 정보가 많다지만 부정확한 정보다. 끊임없는 해킹과 자료 유출은 이것이 지금껏 발명된 것 중 가장 안전하지 못한 저장 시스템이란 점을 보여준다. 인터넷 포르노도 정말 싫다. 그래서 글을 쓸 땐 내 믿음직한 낡은 타자기를 사용하고, 친구들과는 전화로 대화하고, 각종 메시지와 글은 팩스로 보낸다. 그리고 손으로 쓴 진짜 편지를 영국 우정공사를 통해 부친다. 바이런 같은 시인들이 쓴 ‘러브레터’ 모음집은 오늘날 읽어도 경탄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대체 누가 ‘러브 e-메일’ 모음집을 읽겠느냐 말이다.”

김기춘 전 의원이 말하는 ‘문세광과 자칼의 날’

“자칼의 날 읽었나” “선생도 읽었소?”
“네가 자칼 아닌가” “그렇소”

김기춘 전 의원

1974년 8월 16일. 서울 남산 중앙정보부는 초비상 상태였다. 전날 국립극장에서 박정희 대통령 부부에게 총탄을 발사해 육영수 여사를 시해한 범인 문세광은 만 하루가 넘도록 입을 조개처럼 다물고 있었다. 사건 발생 후 31시간이 지난 오후 6시. 당시 중앙정보부장 법률보좌관으로 파견근무 중이던 검사에게 “옥쇄할 각오로 범인의 입을 열라”는 특명이 떨어졌다. 나중에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을 지낸 김기춘(72) 전 한나라당 의원이 바로 그 검사다. 그는 j와의 전화통화에서 “솔직히 처음엔 자신이 없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다른 사람들이 종일 수사해도 꿈쩍 않던 범인이 내게 덜렁 입을 열겠느냐”는 불안감이 들었다고 했다.

 한 시간 뒤인 오후 7시. 범인을 심문할 장소로 가던 그의 머릿속은 온통 ‘첫 질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수사 경험에 따르면 첫 질문에 입을 열지 않으면 심문은 그걸로 끝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얼마 전 휴가지인 대천 해수욕장에 가져가 읽은 『자칼의 날』이 떠올랐다. 범인의 가짜 여권, 총기 분해와 밀반입 수법이 살인 청부업자 ‘자칼’과 비슷했다. 그는 링거를 꽂고 누워 있던 문세광에게 첫 질문을 던졌다.

 “자칼의 날을 읽었나.”

 문은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되물었다.

 “센세(선생님의 일본어)도 읽어보셨소.”

 “읽었다. 네가 바로 자칼 아니냐.”

 “그렇소.”

 “혁명을 하겠다는 자가 묵비권을 행사하는 건 비겁한 것 아니냐.”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 저격을 시도한 1974년 8월 15일 제29회 광복절 기념식 현장. [중앙포토]


그때부터 문세광은 범행 동기와 경위를 상세히 털어놨다. 김 전 의원은 “책을 읽었을 때 ‘암살범의 필독서’라는 느낌이 들어 수사에 활용했다”며 “포사이스에게 도움을 톡톡히 받은 셈”이라고 말했다.

 『자칼의 날』과 암살범의 관계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995년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총리를 암살한 범인 이갈 아미르의 소지품에서도 이 책이 발견됐다. 75년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오스트리아 빈 회의장에 난입해 3명을 살해하고 60여 명을 억류한 채 인질극을 벌이는 등 수많은 테러를 저지른 베네수엘라 출신 테러리스트 일리치 라미레스 산체스는 본명보다 ‘카를로스 자칼’로 훨씬 유명하다. 그의 신출귀몰함에 놀란 서방 언론들이 포사이스의 소설에서 차용해 붙인 별명이다. 이래저래 참 사연 많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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