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기자도 넘어갈 뻔한 보이스피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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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박혜민
경제부문 기자

23일 오후 3시쯤 휴대전화가 울렸다. 경상도 말씨의 한 남자는 “대검찰청 금융범죄특별수사팀 김명호 수사관입니다. 박혜민씨의 통장이 지난 30일 동안 금융범죄에 사용됐습니다. 알고 계신 사실입니까”라고 말문을 열었다. 깜짝 놀라 ‘모른다’고 하니 그는 국제적인 금융 사기 사건으로 180여 명의 통장이 수억원대의 돈세탁에 사용됐으며 기자의 통장도 그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졌다. 최근 잇따랐던 해킹 사고가 떠올랐다. 그는 당장 대검찰청에 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 안 된다고 하니 “그럼 0130번 박창식 금융사기 사건의 조사를 진행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증거 채택을 위해 녹음을 하겠다는 말도 빼먹지 않았다. 덜컥 겁까지 났다. “농협계좌를 개설한 사실이 있느냐, 알고 지내는 은행 직원은 있느냐, 인터넷뱅킹은 하느냐” 등의 질문이 이어졌다. 기자는 농협통장을 갖고 있다. 이런저런 법 조항을 들먹이며 여러 질문을 던진 그는 “진술에 거짓이 있을 경우 위증죄와 공무집행방해죄가 추가된다”는 등의 경고도 했다. 잠시 후 대검찰청 팀장이라고 밝힌 사람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계좌 추적 조치를 해야 한다며 PC 앞으로 가라고 했다. 그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어 ‘출두 의사’를 밝히자 “알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휴대전화에 찍힌 번호(02-2480-2000)로 전화를 걸어보니 ‘없는 번호입니다’라는 안내 멘트가 나왔다. 그제야 아직도 극성인 전화사기, 보이스피싱에 넘어갈 뻔했다는 걸 깨달았다.

 농협에 전화를 했다. 상담원은 “계좌번호를 안 불러줬으니 괜찮다”며 “요즘엔 주민등록번호나 주소를 다 알고 전화한다. 어르신들 중엔 계좌번호·비밀번호에 신용카드 비밀번호까지 불러주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기자는 최근 ‘해킹 사고로 보이스피싱 등 2차 피해가 우려된다’는 내용의 기사를 써왔다. 그러면서도 통화하는 30여 분간 한 번도 보이스피싱이라는 생각을 못했다. 경찰청 관계자는 “많은 사람들이 보이스피싱을 ‘바보나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며 “공공기관이나 금융권에서는 전화조사를 거의 하지 않으니 계좌번호를 불러주거나 돈을 송금하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점점 더 교묘하고 대담한 보이스피싱에 누구라도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하루였다.

박혜민 경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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