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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총선과 정국]

중앙일보

입력

13일 치른 16대 총선은 48년 정부수립후 97번째 전국투표였다.

한해에 두번꼴로 선거를 치른셈이다.

그러는 사이 유권자수는 초대국회의원 총선거 때 7백84만명에서 16대 3천3백48만명으로 늘었다.

선거의 가장 큰 의미는 '민심 (民心)
' 의 확인이었다.

1978년12월의 10대 총선이 대표적 예였다.
유신 독재에 국민들은 제1야당인 신민당에게 4백86만표를 줘 여당인 공화당 (4백69만표)
을 응징했다.

비록 지역구 의석수는 공화당 (68석)
이 신민당 (61석)
을 눌렀지만 전체득표수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야당이 1.1%를 이긴, 일대사건이었다.

이같은 결과는 집권세력의 불안감을 가중시켰고, 한번 여당을 떠난 민심은 되돌아 오지 않았고 79년의 정권 붕괴로 이어졌다.
민심의 위력이 총선에서 출발함을 실감나게 보여준 유신말기였다.

5공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85년 12대 총선에서 드러난 민의는 정국분수령이 됐다.
선거 민심은 '신당 돌풍' 으로 나타났다.

국민들은 여당인 민정당 (7백4만표)
의 그늘아래 안주하며 '제2중대' 라는 조소 (嘲笑)
를 받던 제1야당 민한당 (3백93만표)
을 외면했다.
대신 두 김 (YS.DJ)
씨가 주도한 신민당 (5백84만표)
을 성원했다.
이같은 민의는 전두환정권을 압박하면서 민주화투쟁의 열기를 높였다.

87년 대통령직선제 이후 '민주 대 반 (反)
민주' 의 대결구도는 무너졌다.
그 공백의 상당부분을 지역감정이 메웠다.

지역감정은 선거때마다 맹위를 떨쳐 영.호남이나 충청세력 어느쪽도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하는 여소야대 (與小野大)
가 반복됐다.

88년 13대총선에서 민정당은 1백25석, 92년 14대때 민자당은 1백49석, 96년 15대때 신한국당은 1백39석을 얻어, 3회연속 여당이 과반수 (1백50석)
에 못미쳤다.

그때마다 역대정권들은 90년 3당통합과 같은 야당흡수 또는 무소속흡수의 방법으로 과반수를 만들어냈다.
이같은 인위적 의석숫자 늘이기는 야당과 그 지지자들의 반발을 불렀다.

그 결과 정국이 파행을 거듭하는 악순환이 되풀이 됐다.

이런 와중에 권력의 향배는 '영남세력+충청세력' 의 연합정권, '호남세력+충청세력' 의 공동정권 등 지역연합구도가 어떻게 짜여지느냐에 따라 결정됐다.

역대총선에서 가장 화려한 성적을 거둔 정당은 공화당이다.

6대부터 10대까지 5차례의 선거에서 내리 제1당, 그것도 원내과반수를 차지하며 집권자인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을 뒷받침했다.

그 다음 80년 신군부세력이 창당한 민정당이 11대~13대, 이승만 (李承晩)
대통령의 자유당이 3대, 4대 총선에서 제1당을 차지했다.

김교준 기자<kj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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