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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밸리의 두 얼굴

중앙일보

입력

1,500여개의 벤처기업이 저마다 ‘성공’이라는 꿈을 꾸며 새벽녘까지 불을 밝히는 곳. 또 이들을 유혹하는 단란주점·룸살롱의 불빛으로 흥청거리는 곳. 희망과 불안, 생산과 소비의 두 얼굴이 교차하는 테헤란밸리를 찾았다.

지난 3월13일 새벽 1시가 조금 지난 시각. 서울 지하철 2호선 역삼역 7번 출구 근처의 아주빌딩(서울시에서 서울벤처타운으로 지정한 건물로, 총 50여개의 벤처기업이 입주해 있다) 입구에서 셔터문을 사이에 두고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들어가야 한다’는 취객과 ‘너무 취했으니 집으로 돌아가라’는 빌딩 경비원간에 승강이가 한창이다. 거래처 사람을 접대하고 오는 길이라는 그 취객은 다름아닌 이 빌딩 12층에 입주해 있는 모 벤처기업 직원. 오랜 승강이 끝에 결국 셔터문이 올라가고, 그 직원은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진다.

“거의 매일 이런 비슷한 일이 서너차례 일어납니다. 오늘은 그래도 점잖은 편이에요. 술먹고 고래고래 소리치며 문을 발로 차는 사람, 야식 사러 가는 사람, 새벽녘에 쉴새없이 들락거려 잠시라도 눈을 붙일 새가 없어요.” 건물 경비를 맡고 있는 이경복(58)씨의 푸념 섞인 말이다.

18층 2, 17층 2, 16층 1, 15층 3 …. 이씨의 관리대장에 적힌 숫자들이다. 관리대장에는 이런 숫자 옆에 ‘철야’ 혹은 ‘야근’이라고 적혀 있고 해당업체와 새벽 몇시까지 근무하는지 꼼꼼하게 기록돼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이날도 철야하는 업체가 8개, 새벽 2∼4시까지 근무하는 업체만 해도 20개 정도 된다. 건물 밖으로 빠져나와 위를 쳐다보니 7층에서 18층까지 불이 꺼져 있는 층은 보이지 않는다. 주변의 다른 고층빌딩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강남지역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이곳 테헤란로는 지하철 2호선 서초역에서 교대·강남·역삼·선릉·삼성역에 이르기는 약 10Km, 넓이 40m의 도로로서 강남구를 동서로 연결하는 주요 도로를 지칭한다.

지난 1970년대 호황을 구가했던 중동지역의 건설특수를 끌어들이고, 이란과의 우호를 증진한다는 외교적 의미로 이란의 수도 테헤란의 명칭을 따서 명명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1977년 6월 골람 레자 닉페이(Gholam Reza Nikpay) 테헤란 시장과 구자춘 서울시장간 ‘서울-테헤란 길명 교환 합의서’에 의거, 서울에는 ‘테헤란로’를, 이란에는 ‘서울로’를 지정하여 명명하기로 합의했던 것이다.

그런데 1990년말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1998년 초부터 이 거리에 서서히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소프트웨어·이동통신·네트워크 등 정보통신 관련업체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테헤란로로 명명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 이곳은 산업의 무게중심이 이동함에 따라 건설산업, 금융업계의 상징에서 정보통신산업의 중추로 탈바꿈했다.

테헤란로 탄생은 1970년대 중반 중동붐 영향

테헤란로의 중심부에는 국내 인텔리전트 빌딩 1호인 포스코센터가 위용을 자랑하며 우뚝 솟아 있다. 포스코 센터 건너편 건물 외벽에 낯익은 노란색 글씨가 눈에 띈다. ‘www.auction.co.kr’이라는 인터넷 주소가 큼지막하게 붙어 있다. 이 건물은 국내 최대의 인터넷 경매사이트를 운영하는 (주)옥션을 비롯, 한국노벨·미래넷·와우북·인티즌 등 쟁쟁한 벤처기업들이 입주해 있다.

삼성역에서 강남역 방향으로 죽 따라 올라가면 8차선 도로 양옆으로 와와컴·한별인터넷·안철수 바이러스연구소·라스21·나모인터렉티브·드림커뮤니케이션스·야후코리아·비트컴퓨터 등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벤처기업들이 입주한 고층빌딩들이 하늘을 가릴 정도로 빽빽하게 늘어서 있다.

현재 테헤란로(테헤란밸리)에는 줄잡아 1,500개의 벤처기업이 군락지를 형성하고 있다. 한국 벤처기업의 총본산(總本山)이자 성지(聖地)인 테헤란로는 한마디로 두 얼굴을 가진 거리다. 소비와 생산이 똑같이 극대화 돼 있는 곳이다. 테헤란로의 밤거리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밤을 새워 연구 개발에 몰두하는 벤처빌딩의 꺼지지 않는 불빛과, 그 뒤편에는 이들을 유혹하는 단란주점·룸살롱의 흥청거리는 불빛으로 테헤란로는 화려하게 장식된다.

이런저런 불빛을 지고 살아가는 테헤란로 사람들. 그들에게 낮 밤의 구별은 별 의미가 없다. 오직 테헤란로라는 공간과 24시간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시공 속에서 매일 ‘성공’이라는 꿈을 꾸고 살아간다. 연봉 수천만원에 스톡옵션, 고급 승용차 등 벤처기업 하면 생각나는 화려한 문구들. 하지만 이곳에서 생활하는 대부분의 벤처기업가들에게는 남의 얘기다. 그들이 살아가는 실제 삶은 어떤 모습일까.

3월13일 토요일 자정 무렵, 서울 강남구 지하철 2호선 삼성역 부근에 위치한 한 스튜디오. 주말 늦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20여명의 스태프들은 촬영작업에 여념이 없다. 15초짜리 TV 광고용 CF를 찍고 있는 중이다. 스튜디오 한켠에서 작업과정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세사람이 있다.

인터넷 서비스업체인 유인커뮤니케이션(uin.com)의 이성균(37) 사장과 그의 부인 박정희(35·교사)씨 그리고 이 회사의 기획·마케팅을 담당하고 있는 김정수(35) 차장이 그들. 이사장은 오전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출근하자마자 최근 다음커뮤니케이션과의 합병과 관련한 투자자들의 문의가 빗발쳤다. 10시경 임원진과 30분간에 걸쳐 간단한 미팅을 끝내고 이사장은 잠시 눈을 붙였다. 전날 새벽 늦은 시간까지 회사에 남아 잔무를 처리한 탓인지 졸음이 쏟아졌다.

오후 2시부터는 몇군데 거래선 방문을 비롯해 1∼2시간 간격으로 외부인사와 다섯건의 미팅이 계속됐다. 저녁 9시경 회사 근처에서 부인 박씨를 만나 사무실로 돌아온 이사장은 한시간쯤 휴식을 취한 후 밤 10시가 다 돼 부인과 함께 삼성역 근처에 있는 CF 촬영장으로 향한다. 촬영장에는 먼저 도착한 김차장이 기다리고 있다. 오전 9시에 시작된 이사장의 이날 일과는 토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저녁 늦게까지 쉴 새 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1990년 삼성SDS에 입사한 이사장은 9년간의 안정된 직장생활을 접고 벤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98년 7월 삼성 SDS 입사동기 2명과 중·고교 시절 동창으로 모 일간지에서 9년간 기자로 근무하던 친구까지 포함해 네사람이 의기투합했다.

평일 주말 구분없는 고달픈 삶의 연속

유인케뮤니케이션의 창업 멤버들은 이른바 최근 열풍처럼 번지고 있는 ‘벤처 엑소더스’(일반기업 사원들이 안정된 직장을 탈출해 벤처기업가로 변신하는 최근의 실태를 지칭하는 말)의 제1세대인 셈이다. 이들은 몇달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1999년 2월 마침내 ‘인터넷 친구’라는 서비스를 정식으로 시작했다. ‘인터넷 친구’는 인터넷상의 모든 이용자를 대상으로 채팅, 실시간 메시지 전송, 국내 최초 무료 클럽(사이버동호회), 개인정보 관리 등 모든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인터넷 커뮤니티 서비스다.

유인커뮤니케이션은 정식 서비스를 시작한 지 1년만인 지난 2월 회원수가 100만명에 육박하는 건실한 인터넷 서비스업체로 발돋음했다. 이처럼 단시간 내에 기업을 안정된 기반 위에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이사장을 비롯한 창업 멤버들의 다년간 실무를 통해 다져진 실력이 밑바탕이 됐다. 창업에 동참했던 직장동료 두사람은 이사장과 함께 삼성 시절 ‘유니텔’ 멤버로 통했다.

이들은 유니텔 서비스의 기획·개발·마케팅에 이르기까지 실무를 맡아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유니텔이 정상궤도에 오르고 안정화되자 이사장은 서서히 탈출을 꿈꿨다. “정보통신업계라는 것이 타이밍 싸움이어서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이쪽 생리에 발빠르게 대처해야 하는데 대기업에 있다 보니 점차 한계에 부닥치게 됐습니다.”

이사장은 독자적인 길을 모색했고 얼마후 이를 실행에 옮겨 현재에 이르게 됐다. 벤처기업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이 다 마찬가지겠지만 밤샘작업이 연일 계속되다 보니 가정을 제대로 돌볼 수 없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 중 하나다.

이사장의 경우는 이미 벤처사업가의 길로 뛰어들기 훨씬 이전부터 이런 문제를 안고 있었다. 유니텔 서비스 초창기에도 요즘처럼 새벽 2∼3시가 돼서야 집에 들어갔다. 6∼7시면 출근하는 고된 시간의 연속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답시고 매일같이 늦느냐”며 따지는 부인과 말다툼이 잦아졌고 급기야 부인으로부터 회사를 그만두지 않으면 이혼하겠다는 ‘협박’까지 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날도 어김없이 새벽 2시쯤 퇴근해 보니 집에 불이 켜져 있고 부인 박씨가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잘 다녀왔느냐” “저녁은 먹었느냐” “출출하면 과일 좀 먹겠는냐”는 등 평소와 전혀 다른 부인의 부드러운 태도에 이사장은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6개월 동안 부부관계도 없이 지낼 때였는데 그날은 집사람 태도가 좀 이상하더군요. 마지막으로 잘해주나 싶었어요. 나중에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됐습니다.”

사정은 이랬다. 과중한 회사일 때문에 가정불화가 심해진 것을 알게 된 한 직장 상사가 이사장도 모르게 집으로 격려편지를 보낸 것이었다. “남편이 지친 몸을 이끌고 새벽에 퇴근하고, 또 처진 어깨로 출근하는 것은 그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지금 남편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받아든 부인은 한동안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부부간에 쌓였던 오해도 서서히 풀렸다.

미팅 10건 하면 하루가 끝

이런 경험 탓에 이사장은 창업 이후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서 가정문제로 힘들어 하는 회사 임직원 집으로 당사자도 모르게 편지를 띄우곤 한다. 또 일요일이면 가끔 부인을 데리고 회사에 나와 책상정리라도 같이 하면서 회사 사정을 자세히 설명해 준다. 이날 밤 CF 촬영장에 부인 박씨가 동행한 것도 부부가 회사일을 함께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사장이 일부러 데리고 나온 것이다. 이날 이사장 부부는 새벽 2시가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김정수 차장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하다. 김차장은 “결혼생활 7년째로 접어들었는데 요즘이 결혼생활의 최대 고비인 것 같다”고 털어놓는다. 최근 김차장도 이사장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직원 중 한사람이다. 이처럼 야근이나 철야근무로 인해 가정에 소홀해지는 것은 ‘벤처맨’들에게는 공통적인 고민거리다.

아이마스(iMAS)의 김민영(35) 사장의 경우도 마찬가지. 벤처업계에서는 드물게 인문학(성균관대 철학과 졸업)을 전공한 김사장은 대학 시절부터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경력을 쌓아오다 인터넷 뱅킹 솔루션 회사에 취직, 전자상거래 관련 분야에서 일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1998년 11월 인터넷 마케팅 솔루션 개발업체인 ‘아이마스’를 창업했다.

김사장은 회원이나 고객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정보를 제공하는 방식이 아니라 개인별로 특성을 일일이 파악해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쌍방향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이른바 ‘맞춤정보’ 서비스를 구상했다. 하지만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창업 두달만에 사무실 임대와 장비구입 등으로 자본금 1억원을 다 써버리고 이후 6개월 동안은 어떻게 버텨왔는지조차 상상하기 싫을 정도로 힘든 나날을 보냈다. 김사장은 당시를 한마디로 “처절한 생활의 연속이었다”고 회상한다.

1주일에 나흘 정도는 아예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또 설령 집에 들어가는 날도 새벽 3∼4시가 다 되어서였다. 직원 중에는 2주째 회사에서 먹고 자는 경우도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 직원의 아버지는 회사로 편지를 보내 아들의 안부를 묻거나, 회사로 직접 전화를 걸어 “우리 얘 좀 찾아달라”는 웃지 못할 일까지 생겼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던가. 현재 아이마스는 창업 1년여만에 국내 인터넷 1대1 마케팅 솔루션업계의 선두주자로 성장했다. 또 연간 4억달러로 추산되는 미국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실리콘밸리에 현지법인을 세웠다. 이를 통해 올해 약 80억원의 매출도 예상하고 있다.

어느 정도 회사가 안정궤도에 올라 있지만 김사장의 하루 일과는 여전히 바쁘다. 퇴근시간이 창업 초기보다 약간 빨라졌을 뿐이다. 김사장의 다이어리에는 매일 처리해야 할 일과 함께 만나야 할 사람과 장소가 시간대 별로 빼곡이 기록돼 있다. 어떤 날은 출근과 동시에 미팅을 시작해 밤 11시 이후까지 계속되는 경우도 있다. 기자가 찾아간 날도 이미 4건의 미팅을 해치우고 난 후라고 했다.

벤처기업을 바라보는 일반 대중들은 컴퓨터 몇대 갖다 놓고 하루종일 모니터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상황은 많이 다르다. 거의 처녀지를 개척하는 사업이다 보니 기술·콘텐츠 개발도 중요하지만 홍보와 마케팅 전략도 그에 못지 않게 중시된다. 이런 까닭에 벤처CEO들의 하루 일과 중 외부 관계자들과의 미팅으로 보내는 시간이 만만치 않게 차지한다.

유인커뮤니케이션의 이사장 역시 “많은 날은 하루에 10여건이나 되는 미팅을 갖다 보면 하루가 끝나는 날도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컴퓨터만 켜놓는다고 해서 벤처기업이 저절로 굴러가는 것은 아니다. 벤처기업도 결국 ‘기업’이다 보니 ‘사람장사’를 못하는 벤처는 성공의 대열에 합류하기 어렵다는 것이 벤처업계에 종사하는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내뱉는 말이다.

웹 솔루션 제작업체인 그래텍(gretech.com)의 송길섭(37) 사장 역시 위의 두 업체와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야전형 벤처기업’을 이끌고 있다. 국내 굴지의 가전업체인 삼성전자 출신인 송사장이 그래텍을 창업한 것은 지난해 2월. 창업멤버 4명으로 인터넷 서비스 업계에 뛰어든 이후 이들은 몇달 동안은 예의 다른 벤처기업처럼 그야말로 ‘살인적인 노동강도’를 온몸으로 체험해야만 했다.

“철야근무가 계속되다 보니 어느날부터인가 직원들이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했어요. 저도 마찬가지였구요.”
송사장은 간신히 몸을 추스려 자전거를 타고 근처 병원에 도착해 링거 주사 신세를 져야만 했다. 어떤 날은 쓰러진 회사 직원을 들쳐업고 병원까지 뛰어가기도 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송사장은 지난해 11월 첫번째 결실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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