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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고 연주하는 배우들,새로운 무대 언어의 실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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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호 05면

고막을 찢는 바이올린의 고음은 작살의 날카로움이 되고, 한없이 침잠하는 콘트라베이스의 저음은 고래의 무게가 된다. 미국의 위대한 소설가이자 시인 허먼 멜빌이 1851년 발표한 장엄한 스케일의 장편소설을 배우들의 땀구멍까지 보일 듯한 소극장 무대 위에 압축시켜 놓았다. 창작 뮤지컬 ‘모비딕’은 국내 최초로 시도되는 본격 ‘액터뮤지션 뮤지컬’이다.‘액터뮤지션 뮤지컬’이란 배우와 연주자의 구분 없이 무대 위에서 배우가 직접 악기를 연주하며 연기와 노래·춤까지 모두 소화해내는 독특한 형식. 해외에서는 이미 2000년대 중반 존 도일이 ‘스위니토드’ ‘컴퍼니’ 등으로 토니상 등 주요 연극상을 수상하며 주목받고 있는 장르다.

뮤지컬 ‘모비딕’, 8월 20일까지 두산아트센터

뮤지컬평론가 조용신의 연출 데뷔작이기도 한 이 작품은 실험정신을 가득 싣고 뮤지컬이라는 바다를 향해 닻을 올린 한 척의 ‘고래잡이’ 배다. 그는 뮤지컬의 본질을 음악으로 규정했다. 음악을 고래 잡는 작살로 내세운 셈이다. 실체를 볼 수 없는 잔인한 흰 고래의 횡포에 산산조각나는 뱃사람들의 욕망, 자연의 측량할 수 없는 위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 원작소설에서 시공간을 초월한 초현실적 문장으로 이 같은 모습이 묘사됐다면 연출가는 악기의 초현실적인 사용으로 시공간적 제약을 극복한다.

따라서 이 무대는 음악에 바쳐진 이야기로 정의해야 한다. 악기는 이 무대의 음악이자 미술이며 캐릭터를 대변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그랜드피아노의 덮개는 배의 갑판이 되고 첼로의 핀이 절름발이 에이허브 선장의 의족이 된다. 육중한 콘트라베이스의 몸체는 그 자체로 이미 거대한 모비딕이다. 첼로의 활이 칼이 되고 클라리넷이 항해사의 망원경이 됨은 물론이다. 화자 이스마엘(팝피아니스트 신지호)의 재기 발랄한 피아노 연주에는 첫 항해에 부푼 설렘과 희망을 품은 젊음의 풋내음마저 감돌고, 화려하고 난해한 바이올린 선율은 이교도 퀴퀘그(집시바이올리니스트 이일근)만의 신비한 아우라를 발산한다. 그렇다면 객석은 그들이 정복해야 할 바다다.

눈과 귀를 연 관객은 고래가 되고 대왕오징어가 되어 이 음악극의 날카로운 작살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바다와 고래라는 더없이 장대한 스케일의 소재를 음악의 표현력으로 압축시킨 발상은 더없이 전위적이며 추상적이다. 대형 오케스트라도 아닌 피아노 한 대와 바이올린·첼로·콘트라베이스·클라리넷·트럼펫·기타·드럼의 실내악 규모로 음악이 가진, 아니 악기 하나하나가 가진 표현력의 가능성과 한계를 시험한다. 인물의 심리와 위기상황의 긴박함, 완급 조절 등 드라마의 기승전결을 이끄는 것은 클래식·팝·재즈·록·컨템포러리를 넘나드는 연주의 몫. 다양한 악기들의 불협화음적 충돌과 상식을 넘어선 주법으로 삐걱거리는 삶의 행로, 일상의 소음과 그 불안한 심리까지 동시에 전달한다. 이스마엘과 퀴퀘그의 연주 배틀은 마음의 벽을 허무는 우정의 교감을 한마디 언어의 도움 없이 표현했다. 감정의 증폭을 폭발하는 가창력으로 표현하는 뮤지컬의 공식을 깬 것. 새로운 무대 언어의 제안이다.

작품마다 엇비슷한 구성과 노래들로 더 이상 신선한 무엇을 찾기 어려운 뮤지컬계에 새로운 무대언어를 만들어내는 일은 분명 의미 있는 시도다. 그러나 관객을 향한 그들의 작살은 날카롭지 못했다. 원작의 방대한 이야기가 음악적으로 압축돼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갖고 객석에 와닿기엔 연기와 연주 간의, 장면과 장면 간의 유기적 응집력이 부족해 보였다. 이야기를 음악으로 풀어내는 데 집중했다면 객석도 음악을 통한 무대와의 교감 자체에 몰입해야겠지만, 아직 뮤지컬 무대에서 관객이 양보하기 어려운 것은 귓전에 오래 맴도는 멜로디와 화끈한 대리만족을 주는 극적 재미, 그리고 감동일 터. 많은 것을 보여준 음악적 시도는 신선했지만 깊게 파고들어 긴 여운을 남기는 울림은 없었다. 혼신을 다한 액터뮤지션들에게 보내진 객석의 환호는 아쉽게도 그들의 땀방울만큼 뜨겁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위험에 도전하는 고래사냥. 예측할 수 없는 리스크를 무릅쓰고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는 제작진과 배우들의 도전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피쿼드호의 모비딕 사냥이 비극으로 끝났어도 이스마엘의 고래사냥은 끝나지 않은 것처럼, 이들의 액터뮤지션 뮤지컬에 대한 도전은 계속될 것이다. 그들의 작살이 언젠가 관객의 급소를 날카롭게 찌를 수 있을까. 성서의 이스마엘이 ‘추방당한 개척자’로서 하나의 거대한 문명을 일구었듯, 여기 이단자를 자처한 이들의 모험 활극이 매너리즘에 빠진 뮤지컬계에 새로운 물길을 트는 중요한 사건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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