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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을 제대로 읽는 목소리 순수함의 절정 ‘새벽 숲길’ 걷는 듯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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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호 27면

내게도 분망한 저녁약속의 시절이 있었다. 어쩌다 보니 세월은 흘러 인생은 한가롭고 적적해졌는데 그런 지도 꽤 오래됐다. 아무 이유 없이 전화할 수 있던 친구들은 죽었거나 싸웠거나 너무 바쁜 신분이 되어 버렸다. 텅 빈 작업실에서 뚝 떨어진 자 되어 하루하루를 산다. 때론 은퇴자의, 때론 망명자의, 때론 하릴없는 노숙자의 심정으로 컴퓨터 화면에 띄워져 있는 시계가 천천히 빙 돌아가는 걸 지켜보곤 한다. 배낭 메고 회사 대신 약수터로 출근한다는 중년 사내들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책을 펼쳐도 음악을 틀어도 e-메일을 열어봐도 아무 감각이 없는 공백의 시간에 간혹 망치처럼 뒤통수를 때리는 것이 있다. 대부분은 지난 일에 대한 자책이다. 까닭 모를 불안이 엄습하기도 한다. 전화통에 대고 지금 한반도와 자본주의의 미래를 염려하고 있다니까 상대가 껄껄 농담으로 받아들이던데 그런 염려도 실제로 한다. 하지만 진짜배기 망치질은 따로 있다. 종종 찾아오는 제법 아프고 괴로운 일격.

詩人의 음악 읽기 테너, 마틴 힐

그것은 마치 허기처럼 찾아온다. 잊혀진 얼굴처럼, 내가 두고 떠나 온 강 건너편의 세상처럼. 지나간 시절 어떤 열망의 흔적처럼. 그렇게 찾아와 뒤통수를 때리는 형체 모를 그것에도 이름이 필요하겠지.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나. 어쩌면 뜨거운 것인지도 아니면 차디찬 것인지도 혹은 온도로 측정될 수 없는 것인지도. 지금 나는 틈틈이 찾아와 뒤통수를 가격하는 그 감정상태를 일러 순수라고 쓰고 싶다. 하지만 말이 빙빙 돌며 배회한다. 순수는 언제나 과거 시점에 존재하고 순수 앞에서는 자신감이 없어지고 순수를 발음하려는 순간이면 오히려 마음에 거센 역반응이 일어난다. 그래, 순수에 화가 난다. 모든 욕설의 근원은 인간의 원초적 순수가 아닐까. 나는 순수의 생을 살고 싶었지만 이미 그것은 낙방하여 입학할 수 없었던 학교처럼 불가항력의 옛일이 되고 말았다.

고전 연구가 출신 성악가 에마 커크비
간혹 일부러 순수에 얻어맞기 위해 꺼내 듣는 음반도 있다. 테너 마틴 힐(큰 사진)의 베토벤 가곡집. 우리는 모두 베토벤이 얼마나 끔찍한 성품으로 일생 괴로워했고 대인 기피증이 심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런 베토벤이 노래를 통해 연모한 갈래머리 해맑은 소녀의 이름은 ‘아델라이데’였다.
약 6분에 걸친 연가 ‘아델라이데’를 어떻게 불러야 옳은지 마틴 힐은 하나의 길을 제시한다. 크리스토퍼 호그우드가 순박하고 여린 포르테피아노로 반주를 하고 마틴 힐은 어떤 기교도 바이브레이션도 없이 민낯의 생소리로 잔잔하게 노래한다. 절정 순수의 새벽 숲길을 걷는 기분. 수많은 아델라이데를 들었지만 마틴 힐만이 베토벤의 순수를 이해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검색을 해보니 그도 이젠 육십이 훌쩍 넘어 은발의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100여 장의 음반에 참여했지만 이 베토벤 가곡집과 슈베르트 음반 두 장, 이렇게 셋으로 마틴 힐의 성악은 완성된다고 보아도 좋다.

유명해지면 순수에서 멀어질까. 에마 커크비(작은 사진)는 어떨까. 고음악 세계에서 커크비는 매우 특별했고 소수의 애호가만 그녀를 남달리 사랑했다. 그러다 느닷없이 영화 ‘샤인’의 삽입곡인 비발디 모테트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가 대히트하면서 고전연구가 출신의 수줍은 성악가는 세상이 찾는 스타가 되어 버렸다. ‘고통이 없이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 고뇌와 고문 가운데서도 평온한 영혼….’ 에마 커크비는 초지일관 정격 음악이 추구하는 순도를 유지했고 반면에 마틴 힐은 엘리엇 카터의 현대음악 레코딩에도 참여하는 등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펼쳐왔다. 커크비의 수많은 음반 가운데 주디트 넬슨(Judith Nelson)과 함께 한 듀엣곡집들이 최고의 기량을 보여준다.

마틴 힐의 음성으로 베토벤의 아주 긴 노래 ‘멀리 있는 연인에게’를 들으면서 순수의 건너편, 내 쪽에 가까운 것들을 생각해 본다. 순수 반대편에 있는 것은 평범이다. 평범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순수를 배반해야만 한다. 순수는 특별한 능력, 남다른 의지의 산물이 아닐까. 대체 평범한 자가 무슨 수로 순수를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인가. 김영삼의 대통령 선거 때 구호가 군정종식이었는데 그때 내 곁의 친구들은 ‘반성종식’이 우리들의 구호라고 외쳤다. 항상 자책하고 반성만 하고…. 그것은 평범한 능력을 타고난 사람들에게 독이었고 비겁한 변명이었다. 지금은 모두 평범한 교수, 교사, 평론가들로 근근이 살아간다. 문득 그 국문학 연구모임 때의 우리들이 마틴 힐이었고 에마 커크비는 아니었는지 회상하면서.

음악 속으로 파고들 때면 무언가가 쌓이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벗겨진다는 기분이 든다. 책 읽을 때와는 반대 현상이다. 머리는 텅 비어 생각 없는 진공상태에 이르고 육신은 자꾸만 비워진다. 나이도 떠나고 온갖 인연도 떠나고 다 떠나서 마침내 오롯한 실존의 막막절벽에 이르고는 한다. 그런데 이런 무명(無明)의 상태를 혹자는 순수라고 부른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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