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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돌아본 리눅스의 역사]

중앙일보

입력

다음은 리눅스코리아(주) 한동훈 사장이 회사 설립2주년을 맞이하여 지난 시간을 잠시 되돌아 보며 리눅스의 입문 배경과 사업화 과정, 방향에 대한 개인적인 소견을 담은 글입니다.

리눅스를 시작하게 된 동기

지금은 리눅스가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어 리눅스가 무엇이냐는 질문은 받지 않지만, 2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러한 질문을 던져오는 기자들이나 산업관계자들에게 리눅스를 이해시키는 데에 상당한 애를 먹었다.

운영체계(OS)라는 말조차 낯선 상황에서 자유 운영체제의 전형인 리눅스의 개념과 역사를 쉽게 설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에다 덧붙여 ''무료 운영체제로 어떻게 사업을 하느냐''는 한술 더 뜬 질문에는 보다 정교한 답변이 필요했다. 새로운 산업에서 낯선 개념이나 흐름은 언제나 조심스러웠고 일반인 깊숙이 파고드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리가 리눅스로 사업을 하고자 마음먹은 것은 이러한 새로운 조류를 공식화하고자 한 것이었고 언젠가는 리눅스가 대중화될 것이고 각광받을 날이 있으리라는 굳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필자가 처음으로 리눅스를 접한 것은 1995년 가을이었다. 전공이 전산학이긴 하지만 컴퓨터에 관해서는 깊이를 두지 않았으며, 1995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컴퓨터와 관련 없는 산업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컴퓨터에 또다시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필자에게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이전에 하던 일을 그만두고 서서히 재미를 붙여가던 컴퓨터 분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이때부터 주경야독이 시작되었고 컴퓨터 입문서적부터 프로그래밍 서적까지 수십 권의 책을 닥치는 데로 섭렵했다. 학창시절에 접했던 애플, XT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전율을 뒤늦게 배운 셈이다.

이 즈음 윈도우 3.1이 대중화되어 가고 있었고 윈도우 95가 출시되기 직전이었다. 또한 인터넷은 매니아를 중심으로 급속히 전파되어 가고있던 때였다. 지금은 사라진 어느 컴퓨터 월간지의 다양한 OS(코드명 시카고라 불리었던 윈도우 95와 OS2 워프, 그리고 리눅스) 소개 기사와 함께 부록으로 딸려온 슬랙웨어 리눅스 2.3이 나의 첫사랑이었다.

처음 접하는 낯선 개념 때문에 설치하는 데 만 근 1개월이 걸렸다. 리눅스의 GUI인 X윈도우를 설정하는데 또 1개월이 걸렸다. 요즘과 같이 한글화가 잘 된 리눅스는 설치과정이 10분 내외이고 대부분의 한글 프로그램들이 자동으로 설치되지만 그때는 자신이 많은 프로그램을 직접 패치 해서 사용하는 식이었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당시에는 리눅스 관련 정보를 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요즘과 같은 한글 문서 프로젝트가 시작되기도 전이었고 리눅스 도서는 거의 없어서 정보문화사에서 나왔던 ''리눅스의 모든 것''이라는 책이 거의 유일한 것이었다. 주요 PC통신의 리눅스동호회 게시판에 등록되어 있던 정보들이 유익한 실전 참고 자료 역할을 했다.

필자가 리눅스에 매료되었던 것은 리눅스의 뛰어난 성능과 불가능할 것이 없을 것만 같던 프로그래밍 환경 때문이었다. 특히 리눅스를 사용할 경우 환상적인 인터넷 환경을 구현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또한, 소프트웨어 분야의 자유선언이라고 할 수 있는 리차드 스톨만이 기초한 ''GNU 선언문''은 당시로서는 가히 전율적이었다.

그전의 MS-DOS나 윈도우와 같은 독점적 운영체제 환경에 익숙했던 필자로서는 새로운 세상을 접한 것만 같은 감동이 밀려왔다. 이때부터 필자는 리눅스 환경에서 프로그래밍 작업에 주로 탐닉하면서 자신이 만든 것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면서 깊은 즐거움을 느껴왔던 것 같다.

이 당시에는 필자에게 소박한 희망이 하나 있었다. 바로 리눅스와 관련된 일을 하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소박한 생각이지만 당시의 상황, 즉 리눅스를 도입하는 것은 일부 매니아들이나 자금력이 부족한 선도적인 소기업 정도였음을 감안한다면 현실적인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리눅스 매니아라면 한번쯤 생각해봄직한 ''리눅스를 연구하고 전파하는 평화롭고 조그마한 회사''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언뜻 한 것이 그 때였던 것 같다.

리눅스는 기본적으로 사용자와 개발자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 커뮤니티 중심의 운영체계이다. 리눅스의 발전은 실력이 뛰어난 전문프로그래머와 해커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선진 매니아들의 지지가 뒷받침되었다. 국내에서 리눅스의 연구와 전파는 주로 PC통신 동호회와 뉴스그룹을 통해 프로그래밍 실력을 갖춘 선진적인 매니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외국과는 달리 우리 나라에서 PC통신이 주요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되었던 것은 인터넷보다도 PC통신이 먼저 대중화되어 접하기 쉬웠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리눅스 매니아들의 활동이 주로 활발했던 곳은 하이텔과 나우누리 리눅스동호회, 그리고 han.comp.os.linux를 비롯한 뉴스그룹이었다. PC통신의 주요 리눅스 동호회는 초창기 리눅스 바람과 더불어 94, 95년에 걸쳐 설립되어 리눅스 사용자들의 결집과 ''Do It Yourself !''라는 리눅스의 기본 정신(?)에 입각해 리눅스를 옹호하고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하였으며 사용자의 확대를 위해 상당한 공을 세웠다. 현재 주요 PC통신 동호회의 리눅스 부문 회원을 합산하면 어림잡아도 6만 여명에 달할 정도이다.

필자가 이만용씨(현 리눅스코리아 기술이사)와 처음 만난 것은 1997년 초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온라인 상에서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만난 것은 필자가 하이텔 리눅스동호회 회장으로 선출되고, 이만용씨가 나우누리 리눅스 동호회 회장으로 있을 때였다. 리눅스에 대한 서로의 정보와 의견을 교환하며 ''초보자용 리눅스 프로그래밍''이라는 책을 공동 번역한 것이 처음으로 함께 한 일이다.

필자는 주로 리눅스 기반 프로그래밍 작업에 열중하였으며 그 과정과 결과물을 강좌물 형태로 PC통신에 자주 등록했다. 필자의 생각은 ''리눅스 프로그래밍에 대한 지식과 기반이 넓어질수록 프로그래밍에 참여하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고 결과적으로 쓸만하고 편리한 프로그램이 많이 나올수록 리눅스 사용 환경이 나아질 것이다''라는 보다 중장기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리눅스를 이끈 사람들

초창기 국내에서의 리눅스 관련 개발 및 기여는 한글을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부분에 집중되었다.

리눅스에서 없어서는 안될 한글 터미널 프로그램(한텀)을 제작한 KAIST 출신의 송재경씨와 오성규씨, 리눅스에서 편리하게 통신할 수 있는 프로그램 가우와 한글 입력을 가능케 하는 한글 입력기 아미를 개발한 황치덕씨(현 미지리서치 근무), KIMS 한글입력기를 개발한 김범철씨(현 미지리서치 근무), 리눅스에서 한글을 사용할 수 있도록 2바이트 코드부분에서 공헌한 신정식씨, 최준호씨, 김병렬씨, 박원규씨, GNU 번역 한국어 책임자였던 KAIST 출신의 류창우씨, 리눅스의 각종 영문 문서를 한글로 번역하는 프로젝트를 전개해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둔 한글 리눅스 문서 프로젝트(www.kldp.org) 책임자인 포항공대 출신의 권순선씨, 데비안 한국화 작업을 주도했던 박주연씨, 알짜 리눅스를 개발해온 이만용씨와 김병찬씨(현 IC&M 근무) 등 수많은 사람들이 헌신을 아끼지 않았다.

1996년 즈음, 이만용씨는 온라인 상에서 초보자를 대상으로한 방대한 강좌물과 알짜 리눅스 개발, 그리고 리눅스 서적 집필자로서 사용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특히 그가 개발에 참여하여 1996년 9월에 프로그램세계를 통해 발표한 알짜 슬랙웨어 리눅스 3.1은 당시 사용자들 사이에서 획기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전까지만 해도 리눅스를 사용한다는 것은 온갖 패치와 컴파일을 자유자재로 수행하는 파워유저들의 전유물로 생각된 경우가 많았었는데 편리한 한글사용 환경이라는 당시까지만 해도 획기적인 시도는 리눅스에 목말라하는 많은 컴퓨터 사용자들에게 상당히 매력적인 것이었다.

1996년 6월 어느 날, 나우누리 리눅스 동호회의 대화방에서 하나의 작은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당시 국내에 배포되고 있었던 리눅스 배포본들은 모두 영문 배포본을 그대로 혹은 한글 관련 패치가 적용하였거나 패치 파일을 함께 포함시킨 형태로 배포되어 사용자들은 리눅스를 설치하고 나서 한글관련 설정을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었다. 리눅스 동호회의 질문 게시판에는 수많은 설치관련 질문들과 한글 설정에 관련된 질문들이 쌓여만 갔고, 답변들은 또 다른 질문들에 묻혀만 갔다.

이만용씨, 박재화씨(현 리눅스코리아 근무)가 그 날 나우누리 리눅스동호회의 어느 대화방에서 동시에 글로 쓴 내용은 리눅스배포본을 설치하는 동시에 한글에 관련된 설정이 이미 되어있는 배포본을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차례대로 서로가 입력한 글이 올라오는 것을 화면으로 보고 이를 바로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패트릭 볼커딩씨의 엄청난 쉘 스크립팅 솜씨에 항상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슬랙웨어가 첫 번째 목표물이 되었다. 이미 국내에서도 가장 많은 사용자 층을 확보한 상태였기 때문에 한글화작업이 훨씬 용이할 것이라 생각했다. 일단 작업에 필요한 인원이 모인 것은 그로부터 몇일이 지난 뒤였고, 유형목씨(현 미지리서치 근무), 류경호씨(현 한국IBM 근무), 그리고 이정훈씨가 합류했다.

가칭 리눅스 제작팀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초고속으로 진행되었고 결과물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만들어졌다. 슬랙웨어 3.0 영문버전의 리눅스 배포본을 커널 2.0.0에 기반하여 배포본을 재구성하고 관련 라이브러리들을 모두 최신의 안정된 버전들로 구성함은 물론 기본적인 한글 환경에 대한 설정도 설치 시에 모두 마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작업하는 동안 내내 류경호씨가 항상 이 한글화된 배포본을 가리켜 ''알짜''라고 부를 정도로 인터넷 상에 숨어있는 알짜배기 프로그램들을 찾아내어 배포본 속에 포함시키는 일이 그 다음 목표였다. 그 결과 프로그래밍 소스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가 턱없이 부족했던 상황에서 멀티미디어에 관련된 프로그램을 포함시키는 가하면, 에뮬레이터 게임까지 최대한 수록하였다.

이만용씨와 이정훈씨가 상당시간 동안 테스트에 몰입했고, 이렇게 만들어진 리눅스 배포본을 배포하는 데에도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결국 가장 저렴하게 배포할 수 있는 방법은 잡지사를 통해 부록으로 배포하는 방법이었고, 결국 그해 9월 프로그램세계의 부록으로 배포하기로 결정이 났다.

만들어진 한글리눅스 배포본을 배포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걸맞는 이름이 필요했다. 제작팀 다섯 명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맥주한잔씩 마시면서 이름을 생각하려 했으나 제작기간 내내 가칭으로 부르던 ''알짜''라는 이름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 결국 ''알짜웨어''로 이름이 정해졌다. 마무리 단계에서 슬랙웨어 96이 발표되어 제작팀은 새로이 모든 프로그램을 수정해야 했고, 마지막까지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로부터 벌써 3년 6개월이 더 지났다. 알짜 리눅스 배포본은 슬랙웨어에서 레드햇으로 기본 배포본을 바꾸었고, 제작팀 역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만용씨, 김병찬씨를 비롯하여 많은 리눅서들이 알짜 리눅스를 위해 패키징에 노력을 기울였다.

이제 어엿한 상용 리눅스 배포본으로서의 위치에서 알짜리눅스는 완전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또 국내에는 여러가지 한글 배포본이 출시되어 사용자들은 보다 더 훌륭한 한글 환경을 갖추게 되었다. 알짜 리눅스의 첫 시도는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누구도 하지 않는 일이다''는 생각에서 출발했고, 그것이 그 상황에서 적중했다.

리눅스를 수호하라!

필자는 이만용씨와 함께 한가지 모반을 꿈꿨다. 바로 KLUG(한국리눅스사용자모임) 결성을 추진키로 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갈수록 리눅스 사용자가 확산되고 이를 위한 가시적인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당시의 주요 리눅스 사용자를 모아 설립 준비위를 결성했다.

여기에는 우리 두 사람을 포함하여 박주연씨(98년 나우누리 리눅스동호회 회장, ~~비안 리눅스 한국화 책임자)와 이기동씨(당시 한양대 기계공학과 재학, 현 쓰리알소프트 근무), 장호준씨(당시 서강대 전산과 재학), 유종화씨가 참여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6.1 행사를 위해 조직 설립과 활동 계획안을 수립하였으며, 마침내 1997년 6월 1일, 전국 각지의 리눅스 사용자 500여명이 서강대에서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비록 그 활동이 지금까지 이어지진 않았지만 그 당시 우리에게 리눅스와 오픈소스에 대한 대단한 흥분과 에너르기를 느끼게 해준 계기가 되었으며 소그룹으로만 진행되던 온라인 만남을 보다 확대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참여했던 핵심 인력들은 이후 국내 주요 리눅스 기업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리눅스가 점차 매니아 수준을 벗어나 일반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온라인 상에서 여러 가지 논쟁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일부 기술자들과 타 OS제품 관계자, 각계에서 포진하고 있는 리눅스 개발자 및 옹호자들이 참여했다.

리눅스는 다른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나 IBM의 OS/2, 썬의 솔라리스 등에 비해 태생 자체부터가 달랐다. 즉, 다른 대부분의 OS는 어느 기업의 제품이지만 리눅스는 인터넷의 등장으로 탄생한 공동 프로젝트의 성과물이자 그 결과를 누구나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오픈 소스라는 점이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기업의 제품은 기업에서 홍보 및 옹호를 하고, 지원을 하고 있었지만, 리눅스는 개발자들의 자발적인 네트워크와 체제를 통해 개발되어 왔으며 사용자들의 자발적인 피드백과 지지가 크다란 힘이 되었다.

리눅스에 대한 논쟁이 전개되는 가운데 리눅스와 오픈 소스를 깍아 내리려는 공격과 시도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이러한 리눅스에 대한 공격 중에는 가끔 설득력 있는 내용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리눅스에 대한 오해로부터 출발하거나 또는 사실을 애써 폄하려는 시도들이 많았다.

''주인없는 공짜 OS''라는 말이 대표적으로 리눅스를 폄하하는 말 중 하나였으며, 이것도 모자라 ''리눅스는 개인용으로 쓸 만 하지만 기업용으로는 적합치 않다''라는 반론도 더러 있었다. 이러한 폄하는 곧 리눅스를 좋아하는 필자를 비롯한 여러 개발자와 매니아들의 자존심을 발동시켰다. 당시에 매니아들은 리눅스를 단순히 좋아한다는 차원을 넘어서 자신을 리눅스에 몰입시키는 경향이 많았다.

리눅스의 탄생 배경이 되었던 GNU에 대한 정서적 교감과 오픈 소스의 효율성에 대한 믿음, 리눅스의 성능과 비전에 대한 신뢰와 함께 MS로 대표되는 기존 상업적 회사들의 OS 소프트웨어 정책에 대한 반감이 적지 않았다. 필자를 비롯한 리눅스 지지자들은 이러한 반론에 맞서 리눅스의 객관적인 장점과 오픈 소스의 효율성에 대해 적극 지지했다.

본격 리눅스 벤처기업의 탄생!

이러한 토론을 통해 필자는 ''리눅스는 기업 제품이 아니기 때문에 지원을 받을 수 없으므로 기업에 도입하기 곤란하다''라는 현실적인 반론에 직면했다. 이미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외에서는 레드햇을 비롯한 칼데라 등의 회사들이 리눅스 및 오픈 소스에 대한 지원작업을 전개하고 있었지만 한국에는 아직 본격적인 움직임이 없었다.

결국 우리는 다음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리눅스 전문 회사 설립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하나는 ''리눅스를 비롯한 오픈소스와 관련 엔지니어들이 인정받는 풍토를 만들자''라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리눅스는 기업 제품이 아니기 때문에 지원을 받을 수 없으므로 사용하기가 곤란하다''는 사고를 불식시키기 위해 리눅스 전문회사를 설립하여 기업 및 개인 사용자에 대한 지원을 전개하여 리눅스를 확산시키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회사를 설립해본 경험도 없고, 경영, 마케팅, 자금 등 모든 면에서 열세였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사람과 기술, 리눅스 및 오픈소스의 미래에 대한 신뢰 그리고 우리를 마음속으로 후원해줄 전국의 리눅스 사용자들 뿐이었다. 믿을 것이라곤 우리 자신과 우리들이 믿고 추구해온 것뿐이었다.

회사 설립을 위한 조건이 부족하다고 해서 더 이상 늦출 수는 없었다. 이미 인터넷은 폭발적으로 대중속으로 파고들고 있었고 리눅스는 인터넷 서버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여주고 있었다. 또한 이미 윈도우 NT 4.0 이후의 버전이 1998년 내에 나올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하였고 이대로 더 있다가는 시장에서 리눅스 입지가 보다 좁아질 수도 있었다.

리눅스 전문 회사를 설립할 기회는 1997년 여름에도 있었다. 당시 필자와 이만용씨는 서로의 만남을 통해 리눅스 회사를 설립하자는데 의견을 함께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기도 전에 우리는 경영과 자금의 부재라는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혀 미래를 기약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나 우리는 그 생각을 하고 나서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그 꿈을 현실화 시켰다.

필자는 회사 설립을 위한 조건이 무르익었다고 판단하고 이만용씨, 그리고 나와 온라인을 통해 친분관계가 깊던 김성우씨(현 리눅스코리아 이사)에게 회사 설립을 제안하게 되고 모두 서로가 생각하고 있던 바를 밝히고 이에 동의하였다.

우리는 1998년 새해가 밝기가 무섭게 한자리에 모여 계획서를 작성했다. 당시 유형목씨와 김병찬씨가 지원자로서 준비작업에 도움을 주었다. 필자가 경영을 맡고, 이만용씨가 기술을, 김성우씨가 마케팅을 맡기도 내부 역할 분담도 정했다. 리눅스 컨설팅, 배포본 제작, 서버 비즈니스, 교육출판 사업 등의 세부계획안을 수립하고 세 사람의 주머니돈을 털어 1500만원이라는 거금(?)을 모았다. 그리고 각자가 사용하던 개인 컴퓨터를 들고 나와 1998년 3월 28일, 드디어 리눅스코리아라는 본격 리눅스 벤처 1호라는 신호탄을 국내 리눅스 사용자들의 관심속에 쏘아올리게 되었다.

그 이전에도 리눅스를 비즈니스화하려는 시도는 있었다. 1996년 클레스데이타라는 회사에서는 외국에서 발표된 리눅스를 조합해 ''슬랙웨어 리눅스 96''이라는 제품으로 발매했다. 이 즈음 지그재그소프트(현 리눅스인터내셔널)는 외국에서 발매된 리눅스 배포본과 애플리케이션을 국내에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초고속으로 성장하는 리눅스!

우리가 생각한 리눅스의 성장 예상치와는 달리 실제 상황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전개되었다. 우리는 2001, 2002년 정도 되면 리눅스가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일 것이고 IT 흐름의 중심에 놓일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역사는 우리의 판단보다 정확히 2년 빨리 움직였다.

리눅스의 성공할 것이라는 예감은 예전부터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징조는 1998년 2월경 넷스케이프의 소스 공개 사건에서 나타났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우의 절대적인 점유율에 기반한 익스플로러와 웹 브라이저 전쟁을 전개하던 넷스케이프는 보다 전향적인 리눅스 방식의 소스 공개 모델(GPL, GNU 공공 라이선스)과 유사한 NPL(넷스케이프 공공 라이선스)을 마침내 도입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IT에서는 리눅스에 대한 관심이 높아갔다.

리눅스가 본격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시점은 1998년 가을부터였다. 오라클을 비롯한 인포믹스, 사이베이스 등의 대형 데이터베이스 기업과 애플리케이션 소프트웨어 기업들이 리눅스 지원을 연달아 발표하였다. 당시 오라클과 인포믹스의 리눅스 지원 가능성을 두고 인터넷에서는 이런저런 소문들이 끊기지 않았다. 우리는 1999년 정도 가서야 이들 기업들이 리눅스를 지원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뭏던 리눅스 대변혁은 마침내 우리의 눈앞에서 전개되었고 우리는 쉴틈없이 울리는 전화통 때문에 점차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해 12월에 시장조사기관인 IDC에서는 리눅스가 전년 대비 서버 시장에서 212% 증가하였으며, 전체 서버 시장의 17%를 점유하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전해왔다. 우리는 여기에 고무되어 1999년에는 리눅스 시장이 본격 개화할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1999년 초에 들어서는 HP, 컴팩, 델 등의 시스템 벤더들이 리눅스 지원을 약속하면서 도화선에 불을 지핀 듯이 성장했고 봄에 접어들어서는 IBM의 전폭적 리눅스 지원 발표로 인해 마침내 일반인들앞에 리눅스가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새로운 도약

우리는 1999년 연초부터 본격적인 사업 추진을 위해 자금 확보가 절실했다. 하지만 직원 4명에 매출액도 미미한 설립한지 겨우 1년 밖에 되지 않은 회사에 선뜻 투자할 벤처캐피탈은 전무했다. 더욱이 리눅스 비즈니스 모델을 그들에게 이해 시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마치 레드햇이 리눅스 오픈 소스 비즈니스가 수익을 낼 수 있는 모델이라는 것을 당시 인텔, IBM 등에 이해시키는 것과 비슷한 일을 우리는 한국의 벤처캐피탈을 상대로 설명을 해야 했다. 어떻게 (흔히 ''무료'' 라고 이해하기 쉬운) 자유 운영체제로 사업을 해서 수익을 낼 것인지를 설명하는 일은 상당히 힘들었으며, 더욱이 기업은 수익을 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만큼 주요 사업인 리눅스 배포본을 무료로 자유로이 배포한다는 사실을 이해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국내 주요 벤처캐피탈과의 협상이 모두 실패로 돌아간 후에 나는 아직 한국은 본격 리눅스 비즈니스가 뿌리내리기에는 이르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1998년 회사 설립 초기부터 우리는 자금난을 겪었지만 정부에서 보조하는 차입금으로 근근히 버텼다. 또한 투자 유치가 실패로 끝난 1999년 상반기에도 리눅스코리아는 추가 차입금을 통해 성장하는 시장에 발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리눅스는 소비자와 기업 모두에게 막대한 이익을 주는 비즈니스 모델이었고, 그것은 우리가 보기에 충분히 올바르고 신선한 길이었으며 중장기적으로 사업으로도 성공할 수 있는 모델이라고 확신했지만 자본의 단순한 수익모델로만 평가를 받기에는 아직 시장 자체가 본격 형성되지 않았던 것이다.

1999년 여름이 되자 리눅스 비즈니스의 대명사격인 레드햇이 나스닥에 상장하게 되고, 주가가 폭등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시기를 전후로 무수한 리눅스 관련 지원정책이 거의 대부분의 IT 기업에서 발표되었고, 시장은 폭발적으로 넓어져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제야 한국의 벤처캐피탈과 기업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불과 1년만에 직원수가 10배 증가했으며, 운영자금도 제품개발에 여념해도 좋을 만큼 여유가 있어졌다. 이제 우리가 애초에 목료로 하던 일을 본격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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