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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타지아 2000〉(FANTASIA 2000)

중앙일보

입력

프레드릭 백의 〈위대한 강〉이 공개되었을 당시, 작품을 감상하고 극장을 나온 다카하타 이사오와 미야자키 하야오는 호주머니에 손을 깊게 찔러 넣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린.. 역시 안돼."

같은 의미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본 만화영화가 아무리 인재 발굴에 기술 혁식을 거듭해도 결코 미국을 따라 잡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극명하게 증명해 준 작품이 지난 1월 1일 개봉된 월트 디즈니의 IMAX 애니메이션 〈판타지아 2000〉 이다.

그동안 많고많은 영화와 만화영화를 보아왔다고 생각하지만 앉은 자리에서 한 번 보고 나온 것이 이렇게 아쉬웠던 영화는 없었다고 단언한다. (그 순간의 감동들을 지금부터 어떤 식으로 표현해야 할지 막막할 정도로!)

다만 한가지 푸념부터 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전세계에서 헐리웃 영화가 가장 빨리 개봉되기로 소문이 자자한(일본 보다도 평균 한 시즌을 앞서 감) 한국 시장에 이런 세기의 대작이 개봉 일정 조차 잡혀 있지 않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하나 있는 IMAX 영화관 주인이 작년 내내 9시 뉴스 톱으로 출연하는 고초(?)를 격으셔서겠지만, 그 문제를 뒤로하고라도 더 큰 문제는 우리나라가 과연 〈판타지아 2000〉을 유치할만한 관람 문화 수준이 되어 있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IMAX판 〈판타지아 2000〉은 소위 G7으로 불리는 소수의 선진국들에서만 독점 선행 로드쇼 되고 있기 때문이다. 뭐.. 다른 나라들도 앞으로 순차적으로 필름이 돌아가겠지만 1차 개봉국에서 만큼의 관람 질서가 지켜질지는 의문이다.(63 빌딩에서 아이들 뛰어다니는 와중에 감상하고 싶진 않다)

필자가 왜 이런 사치스런 얘기를 길게 하고 있냐하면, 일본에서 〈판타지아 2000〉 관람 당시의 관람 문화 자체가 부러웠기 때문이다. 디즈니 만화영화의 단골 손님인 어린 아이를 동반한 관객은 아무도 없었고 만화영화가 아닌, 한편의 오페라를 감상하기 위해 온 듯한 복장과 연령 층. 상영 시작 전에 나비 넥타이를 맨 사회자가 무대에 나와 친절한 안내 멘트를 해주고 내려가는 매너. 결국 이런 것이 갖추어진 나라들에서만 〈판타지아 2000〉의 실황 오케스트라가 열린 것이다.

음악을 보고! 영상을 듣는다!

막이 올라가면, 지휘자를 중심으로 오케스트라 악단이 연주 준비를 하고 있고 그 뒤로 마치 병풍을 연상케하는 3차원 오로라가 아름답게 가물거리고 있다. 자세히 보면 그 3차원 오로라 속에서 어떤 그림들이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중 하나가 화면 앞으로 입체적으로 다가 온다. 바로 개개의 장들이 그 오로라 속에 담겨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첫번째 장이 그 유명한 베토벤의 제 5번 운명 교향곡. 무수한 색종이들이 쌍쌍이 나비 모양을 하고 나부끼다가 이내 추상적 이미지로 재조합을 시도하기도 하면서 화면을 온통 수놓는다.
앞에서 밝혔지만 〈판타지아 2000〉은 단순 70mm 극장판도 아니고 IMAX 영화이다. IMAX 영화를 보신 분들은 그 위력을 잘 아시겠지만 스크린이 한 시야에 전부 들어오지 않는다. 한마디로 영화 속에 자신이 들어가 버린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운명 교항곡의 박력과 함께 음악과 영상의 절묘한 앙상블 속에 몰입하고 있는 사이 첫 번째 장이 끝나고 잠시 악단이 악기를 조율하는 동안 이번 장을 소개하기 위한 스티브 마틴의 설명이 이어지고 작년에 예고편을 보고 경악했던 환상의 스테이지 고래 떼 에피소드가 시작된다.
연주되는 음악은 Ottorino Respighi의 '로마의 소나무'. 등장 부터가 압권이지만 고래들이 부상하여 구름을 해쳐나가던 장면에서는 그 어마어마한 위압감에 온몸에 소름이 돋아 올랐을 정도였다.

그 다음 곡이 'Rhapsody in Blue'라고 George Gershwin의 곡인데 팜플렛을 보고 반가웠던 것은 에릭 골드버그의 연출을 〈포카혼타스〉 이후 오랜만에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신분에서 일탈하고 싶은 4가지 부류의 등장 인물들의 우여곡절이 신나는 음악과 박자를 맞추어 흘러가고 모두에게 바람직한 결론으로 장이 마감된다.
M-TV 스타일의 극단적인 색채 대비와 개성적인 연출이 백미인 이 에피소드는 지금까지의 디즈니 클래식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참신한 작품이다.

그리고나서 등장하는 제시카 아줌마(안젤라 란스베리)가 다음 곡을 친절히 소개해 주고 역시 예고편때 기대했었던 〈주석 병정〉 에피소드가 시작된다. 개인적으로 〈주석 병정〉 이야기는 〈일곱개의 완두콩〉, 〈나이팅게일〉 등과 함께 어린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안데르센 동화라서 감회가 새로웠는데('토이 스토리'의 원전이 되기도 했다) 음악과 길이를 맞추어야 하는 시간적 제약 때문인지 마지막의 반전이 약해서 조금 아쉬웠다. (그렇지만 발레리나의 어여쁜 디자인은 참 인상적이었다)
연주된 곡은 Dmitri Shostakovich의 피아노 협주곡 2번 알레그로이고 곧바로 에릭 골드버그가 짬을 내어 한편 더 수록시킨 〈동물의 사육제〉가 이어진다. 짧지만 굵은 재미를 만끽해 볼 수 있는 이 에피소드에는 공포의 '요요'가 등장하는데 무겁고 고풍스러운 분위기에서 마음껏 웃을 수 있는 청량제 역할을 해주고 있다.

그 다음 장은 과거 〈판타지아〉 매니아들에게 추억의 향수를 느끼게하는 작품. 바로 폴 듀카의 〈마법사의 제자〉 이다. 놀라운 사실은 리메이크가 아니라 1940년에 제작되었던 그 때의 필름을 IMAX 버전으로 다시 한번 복원 업그레이드 시켰기 때문인데 필름 스크래치 하나 없이 거의 완벽하게 복원되었다. 설마 이 에피소드를 IMAX 화면으로 보게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는데, 역시 걸작은 시대를 초월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과거 1940년판 〈판타지아〉에서처럼 실제로 미키 마우스가 지휘자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는데 이번엔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이 발생한다. 과거 〈판타지아〉에 제외되어 입이 나와 있었던 도달드 덕이 무대에서 소란을 피우다가 결국 자신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에피소드를 따내서 출연한 것이다.
〈판타지아 2000〉에서 가장 구성이 탁월한 장으로 예상외(?)의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노아의 방주'가 바로 도널드 덕 주연의 에피소드이다. 도날드 덕에 대한 선입견을 잠시 접어 두고 감상하면 정말로 한편의 오페라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명작으로 대사가 한마디도 없으면서 음악에 맞추어 내용이 착착 진행되는 전개가 상당히 인상적이다.

도날드와 데이지의 숨바꼭질이 끝난 뒤. 드디어 마지막 장의 오로라가 화면 앞으로 다가 온다. 곡명 부터가 관객을 흥분시키는 이골 스트라빈스키의 〈불새〉..!! 정말이지 이런 영상이 과연 인간의 창조물일 수 있을까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지금까지 듣도보도 못한 충격 영상이 폭풍처럼 스크린을 장악해 버렸다.
〈민둥산의 밤〉을 연상시키는 악의 화신과 불새의 처절한 싸움. 불새의 죽음. 그리고 부활. 이어지는 숲의 재생을 이야기하는 이 에피소드는 마지막에 대자연의 산림을 녹색으로 물들이며 비상하는 불새의 모습과 함께 세기의 막을 장식해 버린다. (관객 모두가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해 말. PC 통신상에서 20세기 최고의 작품이 무엇이냐에 대한 흥미로운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뭐.. 개개인의 취향차에 의해 주관적으로 평가되는 20세기 최고의 작품이야 수없이 존재하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이 별로 좋아하지 않더라도 승복할 수 밖에 없는 위압감에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농구로 따지자면 마이클 조던의 존재감이 그러했던 것처럼 어느 분야에 있어서건 최고수가 있어서 즐거운 것은 그 분야의 최고 기량이 어디까지인지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일 거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재평가해 보자면, 20세기에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애니메이션 영상물은 〈판타지아 '40〉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며 그와함께 월트 디즈니는 새천년의 시작과 때를 같이하여 전작에 뒤지지 않는 밀레니엄판 〈판타지아〉를 세계 애니메이션사에 탄생시킨 것이다.
다만. 현재 2000년을 21세기 원년으로 수정한 나라(ex. 우리나라..)들과 본래대로 2001년을 21세기 원년으로 고수하는 나라(ex. 일본..)들이 혼재되어 있어서 〈판타지아 2000〉을 20세기 마지막 걸작 영상으로 보아야 할지, 21세기의 첫번째 중간 집계 순위 1위의 창조물로 보아야 할지 정의하기 힘든 부분이 있긴 하다.
하지만 금세기이건 다음 세기이건 최고수의 위치를 지키기 위한 월트 디즈니의 도전과 노력이 앞으로도 지속되길 바램해 본다.

월트 디즈니가 이 작품을 선진 7개국에만 우선 배급하면서 내걸은 주목해 볼만한 단서 조항이 있다. IMAX 상영관 상영은 당연한 조항이지만,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반드시 자국어로 우리말 녹음을 해서 더빙판(자막판이 아닌)을 상영하라는 조항이다.
왜냐하면 자막이 화면을 가리는 만행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입장 때문이다.
(분명 똑같은 더빙판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나라 처럼 어린 아이들의 이해를 위해 더빙을 하는 것과는 원천적으로 동기 자체가 다른 것이다)

미국 영화의 주간 흥행 순위를 집계하는 박스 오피스 흥행 랭킹에서 1위를 차지하려면 최소 2,000개 이상의 개봉관을 잡고 있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아직까지도 흥행 20위 안에 들어 있는(개봉 첫주 11위) 〈판타지아 2000〉의 개봉관 수 이다. 불과 64개의 극장에 개봉되어 흥행 10위권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무리 미국이라도 IMAX 극장이 많지 않기 때문인데, 그런 이유로 극장이 모자라서 영화를 못보는 상황이라고 하며 극장당 평균 관객 동원율에서는 역대 1위가 확정적이라고 하다. (물론 역대 IMAX 영화 흥행 1위도 이미 따논 상황이고!)

반면에 일본의 경우, 전국을 통틀어 IMAX 극장이 7개 밖에 없다고 한다.
(도쿄에 2개, 지방에 나머지 5개) 그래서 그런지 거국적인 붐은 일어나고 있지 않은 듯 싶지만, 대신 상영 기간을 1월 1일 부터 5월 7일까지 무려 5개월이나 잡아 놓고 천천히 여유롭게 와서 보라는 분위기 이다. 바로 그 여유만만한 관람 문화가 부러웠던 것인데, 신주쿠 타임 스퀘어(IMAX 극장이 있는 건물)에서 바라 본 도쿄 시내 야경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극장이 있는 14층의 복도 외벽을 모두 투명한 유리 벽으로 해놓아서 마치 하늘 위에 떠 있는 극장 같았던 것이다. (부디 63 빌딩도 이에 못지 않는 아름다운 문화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

홈페이지 : www.fantasia20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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