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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달라 몇 번 서초구에 부탁했는데, 결국 그 나무가 아들 죽여 …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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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임방춘씨 부부가 29일 서울 흑석동 중앙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아들 시신을 실은 운구차를 보고 있다. [김홍희 인턴기자]

29일 정오 서울 중앙대병원 장례식장 앞. 아버지는 아들의 시신을 실은 운구차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임방춘(65)씨의 아들 고(故) 중경(33)씨의 영결식이었다.

 중견 설비회사에 다니던 중경씨는 우면산 산사태가 일어난 지난 27일 서울 방배동 남태령 전원마을의 집 앞에 있다가 쓰러진 나무에 깔려 장기 파열로 숨졌다. 아버지 임방춘씨는 “구청에 몇 차례나 ‘베어 달라’고 요구했는데 결국 그 나무에 아들이 변을 당했다”고 말했다.

 임씨의 집 앞에는 높이 20여m, 지름 1m가량의 상수리나무가 있었다. 대문에서 불과 몇m 떨어진 곳에 있던 이 나무는 지난해 추석 집중호우로 뿌리가 드러나고 집 쪽으로 크게 구부러졌다. 큰 가지들이 땅쪽을 향하고 있어 주민들은 늘 불안해했다. 임씨는 “두 달 전 구청장에게 진정서도 내고 구청에 지속적으로 민원을 제기했다”며 “당시 구청 공원녹지과 직원들이 와서 근처 나무들은 몇 그루 베어냈지만 ‘장비를 다시 가지고 오겠다’며 그 나무는 놔두고 갔다”고 했다.

 사고가 나기 3일 전 구청 직원들이 다시 마을을 찾았다. 임씨 집 근처에 있는 용덕식(60)씨의 집 앞 나무를 정비하기 위해서였다. 서초구의회 부의장이기도 한 용씨는 “당시 직원들에게 이웃 임방춘씨네 집 앞에 있는 나무도 위험하니 같이 잘라달라고 부탁했다”며 “하지만 직원들은 용씨와 임씨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자리를 떴다”고 말했다.

 임씨와 주민들에 따르면 27일 오전 토사가 덮치자 임씨와 아들은 모래주머니 등을 구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그 순간 상수리나무가 아들을 덮쳤다. 눈앞에서 아들의 사고를 목격한 임씨는 “그때 정비만 제대로 이뤄졌다면 아들은 사고를 피할 수 있었다”며 눈물을 보였다. 이 마을 부녀회장 이복선(60)씨는 “어린애가 봐도 위험해 보이는 나무였다”며 “구청이 왜 작업을 미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구청 측은 임씨와 마을 주민들의 주장에 대해 “위험하다고 민원이 들어오는 나무들은 바로바로 인력을 동원해서 제거해왔다”며 “임씨 집 앞 나무만 정비하지 않았을 리 없다”고 밝혔다. 구청 관계자는 “산사태로 마을 앞 나무들이 토사에 밀려 많이 쓰러졌다”며 자연재해임을 강조했다.

 이번 산사태로 임씨 집 반지하방에 세 들어 살던 부부의 두 살배기 아들 송모(2)군도 숨졌다. 주민들은 “송군의 죽음도 인재”라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임씨는 올해 초 KT를 상대로 ‘통신주를 옮겨 달라’는 내용의 소송을 냈다. 그는 “비가 많이 올 때마다 지하방으로 물길을 돌렸던 집 앞 통신주 때문에 물이 훨씬 빠른 속도로 차올랐다”며 “KT의 입장은 통신주를 옮기는 비용(2000만원 상당)을 집주인이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했다. 이런 와중에 산사태가 덮치면서 반지하방으로 물이 밀려 들어왔다. 임씨는 “100% 통신주 때문이라고 단정할 순 없지만 그것만 아니었다면 충분히 아이를 구할 수 있지 않았겠느냐”고 했다.

남형석 기자·김홍희 인턴기자(연세대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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