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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돌며 ‘껌값 연설’ … 농민들 뭉쳐야 제값 받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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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그는 호주머니에서 껌 하나를 꺼냈다. “이 껌이 얼맙니까.” 여기저기서 “500원”이란 얘기가 나왔다. “이 껌이 왜 500원입니까. 껌 회사가 원가와 마케팅·유통 비용, 시장 수요를 따져 매긴 가격이 500원이어서지요. 그런데 왜 여러분은 직접 키운 멜론에 값을 매기지 못합니까. 왜 원가도 안 되는 가격에 멜론을 팝니까.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제값 받고 멜론을 팔게 한번 뭉쳐봅시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껌값 연설’이다. K멜론 농민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농협중앙회 안재경(48·사진) 품목연합추진팀장이 2009년 전국을 돌며 K멜론 참여 농가를 규합하기 위해 했던 연설이다. 그의 또 다른 직함은 멜론전국연합사업단장. 전국 최초의 농산물 연합 브랜드를 출범시킨 그는 공로를 인정받아 올 1월 3급으로 승진했다. 다른 4급 직원들보다 5년 정도 빠른 승진이었다. 그가 출범시킨 브랜드는 K멜론이 처음이 아니다. 전국 최초 시·군 단위 연합 브랜드 ‘햇사레’(복숭아)와 전국 최초 도 단위 연합 브랜드 ‘잎맞춤’(포도·배)도 그의 작품이다. 1981년 여상 출신 은행원으로 농협중앙회에 입사한 그가 30년 사이 농산물 연합 브랜드계의 대모로 성장한 것이다.

 그는 은행원으로 16년을 살았다. 농협에 다니면서도 농촌을 몰랐다. 97년 농촌지도사업부로 발령이 나며 처음으로 농업에 눈을 떴다. 2002년 경기지역본부 유통지원팀에서 파견직원을 모집할 때 지원했던 건 경기도 과천시 배 농가에서 만난 농민이 던진 충격 때문이다. “아저씨 이 배 얼마예요, 물었어요. 그랬더니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팔아봐야 알지’라고 하시더라고요. 농민들이 농산물 가격을 못 매긴다는 것, 시장에서 잘못 팔리면 원가도 못 건진다는 걸 그때 알았어요.”

 고민 끝에 농산물을 제값 받고 팔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정리했다. 첫째는 규모화, 둘째는 품질이다. 안 팀장은 “그러려면 농민들이 연합해 공동 출하 시스템을 갖추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때마침 경기·충북 지역 일부 복숭아 농민들이 “공동 출하작업을 하고 싶으니 농협중앙회가 도와 달라”고 찾아왔다. 경기 이천·장호원 지역 농민들과 충북 음성군 농민들을 규합해 2002년 연합사업단을 출범시켰다. 이듬해 ‘햇사레’라는 이름을 지어 브랜드를 출범시켰다.

 지역경계를 넘은 브랜드를 내기가 쉽지는 않았다. 브랜드 통합에 반대하는 농민들은 설명회에서 그를 협박했다. “제초제를 뿌려야 없어질 독한 여자” “어디서 내 브랜드를 없애려고 드느냐”는 식이었다. 지역 공무원들이 “우리 군 복숭아는 나름대로 유명한데 왜 듣지도 보지도 못한 브랜드를 달라고 하느냐”고 항의하기도 했다. 그는 “복숭아 시장을 철저히 연구한 끝에 이 길이 맞다고 판단해 과감히 밀어붙였다”고 말했다. 철저한 당도 관리 덕에 ‘햇사레’는 단숨에 파워 브랜드로 성장했다. 2002년 249억원 수준이었던 연합사업단 복숭아 매출은 지난해 465억원대로 늘었다. 2009년 한국농업학회가 실시한 ‘농산물 브랜드 가치 평가’에선 햇사레 브랜드 가치가 959억원으로 평가받으며 전국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성공 브랜드를 만들기 위한 조건으로 그는 ‘비전 공유’를 꼽는다. 농민들이 ‘이 브랜드가 성공하면 과실이 내게 돌아온다’는 것을 이해하면 품질관리가 저절로 된다는 것이다. 그가 K멜론을 출범시키며 매년 30여 차례씩 직접 전국을 돌며 설명회와 평가회를 여는 이유다.

 잇따라 연합 브랜드를 성공시키자 그에게 계속 새로운 과제가 떨어진다. 그는 올해 하반기 깐마늘 전국 연합 브랜드를, 내년엔 토마토 전국 연합 브랜드를 출범시킬 계획이다. 지난해 2명이었던 품목연합추진팀 직원은 6명으로 늘었다. 그는 스스로를 “고등학교 1학년인 둘째도 제대로 못 챙겨주고 전국을 쏘다니는 나쁜 엄마”라고 했다. 그래도 당분간 행보를 멈출 낌새는 비치지 않았다. 그는 “개방화 시대에 우리 농업이 살아남으려면 품질이 보장되는 전국 브랜드를 키우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농협중앙회가 아니면 이런 일을 맡을 곳이 없다”며 눈을 빛냈다.

임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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