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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움직이는 건 이성이 아니라 관습과 습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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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호 29면

프랑스 사람들은 데이비드 흄을 ‘사람 좋은 다비드(Le bon David)’라고 불렀고 흄의 고향에는 그의 이름을 따 ‘성(聖) 데이비드 거리(Saint David Street)’도 생겼다.

영어는 영어로 ‘잉글리시(English)’다. 영국은 영어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에 대해선 고민을 좀 해야 한다. 영국의 정식 국명은 ‘그레이트 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이다. 줄이면 ‘유나이티드 킹덤(연합왕국·United Kingdom)’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레이트 브리튼(Great Britain)은 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로 구성된다.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 <26> 데이비드 흄 『인간 이해력 탐구』

영국 역사에서 힘의 원천 중 하나였던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와 합친 것은 1707년 합동법(Act of Union)을 통해서다. 300년 전에 합쳤지만 다시 분리해야 한다는 둥 지금도 영국이 시끄럽다.

『인간 이해력 탐구』의영문판 표지.

스코틀랜드는 우리나라로 치면 함경도나 전라도나 경상도 정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자그마한 스코틀랜드가 없었으면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은 없었다. 18세기 스코틀랜드는 홀로 유럽대륙의 계몽주의와 쌍벽을 이루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시대를 열어갔다.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중심에는 고전파 경제학의 창시자 애덤 스미스(1726~97), 근대 지질학의 창시자 제임스 허턴(1726~97)과 더불어 철학자 데이비드 흄(1711~76)과 같은 걸출한 인물들이 있었다. 흄의 시대에 스코틀랜드는 유럽에서 가장 문맹률(25%)이 낮은 지역이었다.

오늘날의 스코틀랜드 분리주의 운동에 대해 흄은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른다. 흄은 목젖을 진동시켜 r 발음을 내는 등 스코틀랜드 말씨를 평생 고치지 못했지만 유려한 영어를 쓸 수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애덤 스미스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견인
흄은 대단한 인물이다. 스스로는 그저 ‘문인(man of letters)’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흄은 정치학·경제학·심리학·미학·종교·사학에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흄에게 어울리는 표현은 경천동지(驚天動地)다. 독일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1788~1860)는 헤겔의 저작 전체보다 데이비드 흄이 쓴 한 페이지 한 페이지에서 건질 게 더 많다고 주장했다.

흄의 그림자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1776)이나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1859)에도 발견된다. 이마누엘 칸트(1724~1804)는 흄 덕분에 ‘도그마 때문에 생긴 침체’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공리주의의 아버지 제러미 벤담(1748~1832)은 흄 덕분에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졌다”며 흄을 찬양했다.

올해는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불리는 흄이 태어난 지 300년이 되는 해다. 300주년을 맞아 전 세계에서 전시회·학회·강연회 등 기념행사가 연말까지 개최된다. 흄 300주년 기념의 중심은 단연 에든버러대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출생한 흄은 12세였던 1723년 에든버러대에 입학해 3, 4년간 공부했다. 당시의 대학 입학 연령을 고려해도 흄은 2년 정도 빨리 대학에 입학한 것이다.

오늘날 흄은 에든버러대의 자랑스러운 동문이지만 흄은 생전에 에든버러대의 교수가 되는 데는 실패했다. 1744년 교수직에 응모했으나 에든버러 시의 목사들이 맹렬한 반대 운동을 펼쳐 꿈이 무산됐다. 흄이 무신론자라는 의혹이 제기됐기 때문이었다. 글래스고대 교수 자리에 1751년 지원했을 때도 같은 이유로 임용되지 못했다. 흄은 교수직에 어울리는 인물이었으나 문필가로 성공해 상당한 부를 축적하기 전까지는 설탕 수입업자의 서기(1729년), 사서(1752년), 비서(1763~66년) 같은 직업으로 살아가야 했다.

흄이 살던 시대는 세속화가 아직 완료되지 않은 시대였다. 그가 태어나기 15년 전인 1696년 신성모독(神聖冒瀆)을 이유로 영국에서 마지막 교수형이 행해졌다. 흄은 17세였을 때에는 ‘마녀’라는 이유로 어떤 여인이 교수형에 처해진 일도 있었다.

유언장에서 흄은 친구였던 애덤 스미스에게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Dialogues Concerning Natural Religion)의 출간을 부탁했다. 스미스도 종교의 반응을 두려워해 흄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다. 결국 책을 발간한 것은 흄의 조카였다.

근대 무신론의 선구자
흄은 조숙한 철학자였다. 흄은 철학적 집필을 16세에 시작했다. 그는 30세도 되지 않은 1738~40년 인성론(A Treatise of Human Nature)을 출간했다. 뜨거운 논란을 야기시키겠다는 그의 기대와는 달리 학계와 독자들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문체 등 서술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고 판단한 흄은 인성론의 1권을 인간 이해력 탐구(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1748년)로 출간했다.

인간 이해력 탐구는 흄의 저작 중에서도 오늘날 가장 많이 읽힌다. 인간 이해력 탐구에서 흄은 합리주의와 종교를 비판한다. 그의 목표는 인간성에 대한 과학적인 체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흄은 인간의 자기 이해에서 합리성이 차지하는 위상을 깎아 내렸다. 당시 인간은 합리적이라는 게 정설이었다. 흄에 따르면 인간의 삶에서 이성은 매우 제한적인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관습과 습관이다.

관습과 습관은 이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온다. 흄에 따르면 인간의 지각(知覺·perception)은 인상(印象·impression)과 관념(觀念·idea)으로 나뉜다. 인상은 사람이 보고, 느끼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뭔가를 바라거나 의지를 행사할 때 발생한다.

흄에 따르면 인상은 관념보다 생생하다(lively). 관념은 인상의 복사물이기 때문이다. 관념은 경험을 회상하거나 상상력을 행사할 때 사용되는 대상이다.

흄은 인과(因果) 관계에 대해서도 메스를 들이댔다. 그는 모든 지식이 원인과 결과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지만 원인과 결과의 관계는 증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인과 관계라는 것은 없으며 원인-결과 역시 이성의 작용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관습에 의한 것이라는 게 흄의 생각이었다.

인간 이해력 탐구에는 종교에 대한 비판도 포함됐다. 현대의 무신론자들은 흄을 그들의 선구자로 간주한다. 흄은 모든 지식의 불확실성을 드러내려고 했다. 불확실성에는 신(神)에 대한 믿음이 포함됐다. 그는 특히 기적의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성직자들의 야심과 복수심과 같은 부정적인 면에 대해서도 맹공했다. 흄은 온건한 장로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10대에 기독교 신앙에 대해 회의하게 됐다. 창조를 믿지 않게 됐으며, 도덕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공동체로서 살아가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믿게 됐다. 설계된 것처럼 보이는 사물이 있어도 반드시 유일한 설계자가 설계한 것이 아니라, 예컨대 설계 위원회에서 설계했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흄은 심지어 인간에게 자살할 도덕적인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흄에게 믿음은 합리성보다는 느낌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대륙의 합리주의자들과는 달리 흄은 이성의 힘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흄은 심지어 불변의 자아(自我·permanent self)의 존재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자아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흄은 불교와 유사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 일각에는 흄이 국제 예수회 네트워크를 통해 유럽으로 전달된 불교 문헌을 접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흄은 1734년 프랑스로 떠나 라플레슈에 머물렀는데 그곳은 르네 데카르트가 1604~12년에 공부하던 예수회 대학이 있는 곳이다. 흄이 불교를 접했다면 바로 그곳에서였다.

프랑스 살롱가의 인기남
흄은 철학자라기보다는 사학자로 유명했다. 6권으로 출간된 영국사(History of England)(1754~62) 덕분이었다. 사실 흄은 독서계에서 인기 있는 작가였다. 출판사들은 그가 새로운 저작을 내놓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40세께 흄은 철학에 대한 집필을 그만두었으며, 다른 분야에서도 50세 초반에 집필을 그만뒀다. 출판사의 독촉에 그는 자신이 새로운 저작을 내놓기에는 “너무 늙었고, 너무 뚱뚱하고, 너무 게으르고, 너무 부자다”라고 대꾸했다.

1729년 가을부터 5년간 신경 쇠약으로 고생했으나 흄의 인생은 대체적으로 순탄했다. 프랑스 살롱가를 비롯해 흄은 여성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으나 평생 독신이었다. 위대한 철학자였지만 1769년에 쓴 어느 편지를 보면 흄은 자신이 요리를 잘한다고 자랑하는 평범한 생활인이기도 했다. 흄의 인생에서 흥미로운 사건 중 하나는 프랑스 철학자 장자크 루소(1712~78)와 관련된 것이다.

흄은 1765년 12월 처음 루소를 만났는데 흄은 갈 곳 없는 루소가 1766년 영국에 망명할 수 있게 도왔으며 영국 정부로부터 연금까지 얻어줬다. 둘 사이가 틀어진 것은 루소에 대한 악소문이 떠돌면서부터다. 루소는 음해의 중심에 흄이 있다고 봤다. 루소의 편집증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게 중론이지만 일각에서는 흄이 루머 퍼트리기에 가담한 것은 사실이라고도 주장한다. 흄은 기독교로 다시 회심하지 않았으며 이설은 있으나 놀랄 만큼 담담하고 침착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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